손자병법에 따르면 전쟁을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의 싸우려는 의도를 꺾는 것이고, 둘째는 외교를 꺾는 것이며, 직접 싸워 병력을 분쇄하거나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다(고상병벌모, 기차벌교, 기차벌병, 기하공성). 이 기준에 따르면 일본 기시다 총리야말로 현존 최고의 명장이라고 할 만하다. 싸우지도 않았는데 상대방의 싸우려는 의도와 외교가 스스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벌모, 벌교 ‘당했다’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일본 자민당 정부의 최대 목적은 전쟁 가능한 나라로서 정상국가화와 군사력 복원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야 하며 일본 스스로가 중국을 막는 주전선이 되어야 한다. 최대 장애물은 바로 한국이다.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지지해 줘야 할 미국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으로 존재하는 한 일본을 정상국가로 만들 필요를 상대적으로 덜 느끼게 되고 일본의 군사력 팽창을 경계하는 한국 입장 역시 고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로비스트들을 동원해 한국을 친중으로 몰아가며 한미동맹을 이간질해 왔다. 일본의 자해극으로 드러난 2019년 뜬금없는 수출규제도 그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윤석열 정권의 대일외교는 18세기 독일 7년 전쟁 당시 벌어졌던 ‘브란덴부르크가의 기적’에 비유할 만하다. 영국-독일 연합과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이 벌였던 이 전쟁에서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중과부적으로 수도 베를린이 함락당하며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즉위한 표트르 3세는 프리드리히를 너무 좋아했던 나머지 유리한 전쟁을 포기하고 점령한 땅도 모두 돌려줘 버렸다. 덕분에 동·서 양면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난 프리드리히는 능력을 십분 발휘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신생국 독일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기시다 총리가 프리드리히 수준의 능력을 보여준 적도 없건만 이런 행운을 차지하다니 역사도 참 얄궂다.
개인적으로 민족주의를 거부하며 ‘토착왜구’라는 표현도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의 실리와는 거리가 먼 대일외교와 그걸 추켜세워 주고 있는 일부 언론을 보노라면 토착왜구라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다. 국익? 실제로는 ‘한국인과는 달리 냉정하고 실리적인’ 일본에 대한 막연한 환상, 우리 입장은 제쳐두고 일본과 한국이 밀착하기를 바라는 미국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는 사대주의, 전쟁 피해자들은 ‘당할 만해서 당했다’는 저열한 의식이 결합된 처참한 외교실패일 뿐이다.
일본 어떻게 상대해야 했을까
현재 한국 외교의 지상과제는 ‘전쟁 늑대’라는 살벌한 이름까지 붙은 중국의 공격적 대외정책에 맞서면서도 한국이 미·중 양강의 주 전장이 되어 경제적, 물질적 손실을 입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중국의 공격적 팽창을 대비해야 하지만, 일본은 한국에게 잘해 줄 이유가 없는 상황. 문재인 정부가 택한 것은 아래로 뻗는 것이었다.
일부 언론과 몇몇 극우 인터넷 커뮤니티들의 프레임 조작으로 문재인 정권의 외교정책은 상당히 왜곡됐지만, 문재인 정부의 공식 외교정책은 어디까지나 ‘신남방정책’이었다. 신남방정책 추진으로 중국 해상진출 봉쇄를 원하는 미국의 필요를 맞춰주면서 중국이나 일본을 직접 상대하지 않을 수 있고, 강대국 외교에 치중한다는 기존 외교정책의 한계를 탈피했다. 특히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같은 국가는 인구 구성이나 잠재력 면에서 중국의 대체재가 되기에 충분한 국가다.
신남방정책의 의도는 2021년 호주 국빈 방문에서 명확히 알 수 있다. 2021년 호주-중국 관계가 최악일 때 문재인 대통령은 호주를 국빈 방문해 동맹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는데, 당시 한국에게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인 국가는 미국과 호주뿐이었다(윤석열 대통령은 이후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위에 ‘글로벌 포괄적 전략적 동맹’이란 것을 만들어 그 자리에 미국을 앉혔다). 그러면서도 베이징 동계올림픽 보이콧 문제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내 중국이 아무 말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물론 외교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바둑에서 삼면이 막혔을 때 돌을 남은 한 방향으로 이어 놓으면 사는 것처럼, 이런 방법이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와 모든 걸 반대로 해야 된다는 마음이 앞섰는지, 집권하자마자 신남방정책을 별안간 폐기하더니 내용적으로 별 차이가 없는 인도-태평양 정책이라는 것을 발표했다(정작 인도와 뭘 하고 있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중무역 감소에 대한 대책은 없으면서, 건건이 중국에 대한 돌출 발언으로 업보를 쌓고 있어 매우 우려된다.
성공한 외교, 좋은 외교는 무엇일까? 동서양의 전쟁 고전 ‘손자병법’과 ‘전쟁론’은 모두 전쟁을 피하고 다른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할 것을 권한다. 전쟁론은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라고 정의하며, 다른 정치적 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굳이 전쟁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바꿔 말하면, 좋은 외교의 결과는 전쟁 위협을 낮추거나 최소한 현상을 유지하면서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고 실패한 외교의 결과는 전쟁 위협 증가로 정리할 수 있다.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되는 이 때, 좋은 외교가 절실하다.
공시형 미디어감시팀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