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모니터_
정의연 해명을 무시하는 근거가 된 ‘100만 원 이상 분리 공시’ 규정, 실효성 있을까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의 ‘회계 부정’ 관련 보도들은 ‘정의연의 성금 유용 의혹’, ‘윤미향 당선인의 개인 착복 의혹’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방향으로 전방위적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 보도들이 대부분 정확한 근거에 의해 작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의연의 회계 관련 의혹을 보도하는 보도는 대부분 국세청 홈텍스에서 볼 수 있는 공익법인 공시 자료를 근거로 합니다. 국세청에 공시된 회계 자료를 살펴보고, 기자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점이 있으면 일단 ‘회계 부정 의혹’으로 몰아가는 보도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세청 공시정보는 회계 부정을 판단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자료입니다.
대부분의 회계 조작 사건은 공개된 회계자료만으로는 그 내용을 파악하고 입증하기가 어렵습니다. 회계 조작을 벌이는 사람들은 ‘엔론 사건’과 같이 유령 회사에 부채를 떠넘겨 숨기거나, ‘대우그룹 사건’과 같이 이중장부를 만들거나, ‘저축은행 사건’과 같이 가짜 시행사를 만들어 대출서류를 조작하거나 ‘삼바 사건’과 같이 지분가치평가 방식을 바꿉니다. 이런 분식회계 사건들은 모두 공시된 회계 자료로 밝혀진 것이 아니라 유령 회사가 발각되는 등 실제 자금의 흐름을 파악했을 때 알려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의연의 공시 자료를 들여다 보아봤자 실제 계좌와 비교하지 않으면 ‘회계 실수’ 이상의 문제점을 찾아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회계 부정’이라는 프레임만 갖추었을 뿐, 매우 부실한 근거로 작성된 ‘아님 말고’ 식의 폭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언론이 정의연 해명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핵심 근거 : 100만 원 이상 따로 기재 규정
5월 7일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직후 사태 초기에는 정의연 기부금 사용 내역 공시 자료 중 수혜인원 ‘999명, 9999명’ 기재나 ‘맥주집에서 3000만 원 사용’ 등도 ‘회계 부정 의혹’으로 보도된 바 있습니다. 정의연의 국세청 공시에는 기부금 사용목적 별로 ‘대표 지급처’만 적게 되어 있고, 수혜인원을 확정할 수 없는 경우 인원수를 공란이나 ‘0’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999’등의 숫자를 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이를 비틀어 ‘회계 부정 의혹’을 제기한 보도들입니다. 이런 엇나간 의혹 보도가 처음 나온 것도 아닙니다.
△ <공익법인 결산서류 등의 공시> 서식에 있는 기부금품 지출명세서 관련 규정
민언련 보고서 <오보를 왜곡으로 덮는 조선일보>(2019/10/24)에서도 지적했듯, 조선일보는 2019년 10월 같은 방식으로 ‘공공상생연대기금’이라는 공익재단을 모함하다 오보를 낸 적 있습니다. 조선일보는 당시 공공상생연대기금의 기부금 명세서 자료만 보고 기금 측이 한겨레신문 장학 사업에 2억을 썼다고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공공기관 비정규직 및 저임금 노동자와 그 자녀들의 장학 사업에 쓰인 돈이었고 2200만원이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과 공동주최한 토론회 비용이었습니다. 조선일보는 한겨레 측이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하겠다고 입장을 밝히자 정정보도를 냈습니다.
처음 이와 같은 의혹이 제기됐을 때, 정의연 측도 국세청 공시 절차상의 한계를 정확히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언론들은 공익법인 결산서류 등 공시 서식에 ‘100만 원 이상 사용처’는 따로 표기하도록 하고 있는 규정을 들어 의혹 보도를 이어갔습니다. 예를 들면 ‘무케게 재단에 1억 2천만 원을 지출했다고 썼지만 재단 측은 2000만원을 받았다고 하니 나누어서 적어야 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대표적입니다. ‘100만 원 이상 분리 공시’ 규정을 들어 정의연의 해명 내용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의연보다 훨씬 규모가 큰 공익법인의 공시자료를 살펴보더라도, 해당 규정이 과연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도대체 기준을 알 수 없는 ‘분리 공시’ 기준
연세대학교의 2018년 회계연도 공시자료를 살펴보겠습니다. 약 751억 1,954만원의 기부금을 받아 36,042명에게 장학금으로 전액 사용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평균을 내보면 1인당 약 208만 원입니다. 언론이 정의연에 적용하고 있는 ‘100만 원 이상 사용처 별도 표기 규정’에 의하면 수 만 개의 항목으로 모두 분리해서 적어야 합니다. 다음은 서민의 금융생활 지원에 관한 법률 제 3조에 근거를 두고 설립된 서민금융진흥원의 기부금품 공시 자료입니다. 민간 사업수행기관 대출 항목은 모두 분리해서 작성되어 있지만, 전통시장 소액대출 항목은 대표 지출처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총 245개 시장에 432억 8,420만 원을 지출했으니 평균 1억 7,667만원을 지출한 셈입니다.
△ 연세대학교와 서민금융진흥원의 ‘기부금품의 수집 및 지출 명세서’ 공시 자료(국세청 홈텍스)
기부금 모집금액 기준 상위 10개 법인의 공시자료를 보더라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처럼 나눠서 공시한 곳도 보이지만 ‘나눠서 공시하는’ 기준이 100만원인지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대목이 많이 보였습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경우 공시 된 지출내역이 정확히 1만개로 맞아 떨어지고, 1만개의 내역 중 지출 최소 금액은 100만원, 최대 금액은 130만원인데 가능한 일인지 의심이 듭니다.
반면, ‘학교법인고려중앙학원’은 1500원, 3000원 등의 소액 지출까지 모두 ‘장학금 등’이라는 내역으로 공시했습니다. ‘굿네이버스’는 2019년 공시 자료에서 르완다 6개 사업장에 2억 2천만 원을 지출한 것으로 나오는데 대표 지출처만 기재되어 있습니다. ‘은행권청년창업재단’은 약 68억 원을 ‘청년창업지원사업’으로 85곳에 지출했다고 공시했습니다. ‘총체적 회계 부실’이라기보다는 국세청이 규정을 만들어 놓고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사항들이 일일이 ‘회계 부정’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요?
‘회계 양식’에 매몰된 언론과 시민단체, 근본적 대안 찾아야
5월 7일 이용수 선생의 기자회견으로 촉발된 정의기억연대의 ‘회계 투명성 의혹’은 앞서 살펴본 언론의 부실하거나 비현실적인 잣대로 양산된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아무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시민들의 후원과 참여로 활동하는 시민단체는 당연히 회계 운영과 공시를 투명하게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정의기억연대 역시 몰아치는 의혹 보도와 검찰의 전격적 압수수색에도 불구하고 회계 투명성 제고를 약속했죠.
이번 사태에서 언론이 외면하고 있는 본질이 따로 있다는 점도 짚어봐야 합니다. 국세청 공시 절차에서 한 치라도 벗어난 사례들을 모아 ‘회계 부정’으로 보도하는 사이, 시민단체나 공익법인의 ‘회계 투명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할 기회가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보았듯 국세청의 공익단체 공시 시스템 관련 규정은 공익법인의 특성을 고려한 설계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미리 설계된 ‘회계 부정’ 프레임에 개별 사례들을 쑤셔 넣는 행태는 문제 해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정의기억연대를 포함한 시민단체와 공익법인 역시 근본적인 변화를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국세청 공시를 한 치의 틀림없이 입력하는 것은 분명히 힘들고 어려운 작업인 동시에 꼭 필요한 일입니다. 결산표와 제무제표 등을 기부자와 시민들에게 공개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시민단체가 이런 의무를 이행하고 있지만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법이 부과한 의무와 절차를 지키는 데 급급하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 기관과 시민단체, 공익법인 모두 행정 절차의 틀에서 벗어나 기부자와 시민들이 이해하기 쉬운 회계 공시 자료가 무엇인지, 기부자 의도에 따른 기부금 사용 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결산 자료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것이 ‘회계 투명성’의 진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 모니터 기간과 대상 : 2020/5/8~5/22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한국일보, 서울경제, 한국경제(*지면보도에 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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