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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남의 나라 사고 끌어다 세월호 유가족 깎아내리는 조선일보
등록 2019.11.01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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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6월 14일 영국의 공공임대주택 ‘그렌펠타워 화재사건’으로 70여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렌펠타워 화재사건은 영국에서 2차대전 이후로 가장 피해가 컸던 화재사건으로 꼽힙니다. 이 사건은 70년대 이뤄졌던 영국의 재개발 정책과 공공주택 관리 민영화, 안전불감증, 이민자와 빈민 문제 등이 결부되어 있어 당시 영국에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영국 소방당국이 ‘그대로 있으라(stay put)’는 화재 대응 지침을 고수하는 바람에 대피 명령을 늦게 내린 것과 테레사 메이 영국 전 총리가 관저에서 8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사고 현장에 10시간만에 나타난 것 등이 여러모로 ‘세월호 사건’을 연상시켰기 때문에, 국내 언론들도 당시 1면에 사고 기사를 연달아 내며 비중있게 다뤘었습니다. 경향신문 기사 <런던 화재 참사/불이 꺼지고 영국의 민낯이 드러났다>(2017/6/15)에 영국사회에서 나왔던 비판들이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영국 정부는 그렌펠 타워 화재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2019년 10월 말 1차 조사를 마무리했습니다. 영국 텔레그래프 지는 10월 28일 이 보고서를 입수해 <Grenfell Tower report: fire brigade condemned for 'systemic failures' as chief accused of 'remarkable insensitivity'>(10/28)이라는 기사로 보도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조사보고서는 소방 당국의 대처를 ‘체계적 실패’로 규정하고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엄청난 무감각’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 보도를 받은 연합뉴스나 뉴시스의 기사도 대체로 ‘조사보고서가 제도적 실패와 소방당국의 실패를 지적했다’는 내용으로 보도했습니다.

 

누가 봐도 ‘세월호 기사’인 조선일보의 관련기사

그런데 통신사를 제외한 국내 언론 중 이 조사보고서를 유일하게 보도한 조선일보의 기사 <책임 추궁은 나중에원인 규명 앞세운 영 그렌펠 참사보고서>(11/1, 손진석 파리특파원)는 무언가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일보는 중간제목으로 “주민은 조사위 배제, 유족 만남 최소화, 조사과정 공개 조사과정서 책임자 처벌 주장 안나오고 정치공방 없어”를 붙였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일보는 이 보고서가 나오기까지 과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책임자 규명과 처벌 등 인적 책임은 1단계 조사에서는 우선순위에서 빠졌다. 2단계 조사까지 모두 완료된 이후에야 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사 과정에서 여야 정쟁이 벌어졌거나 책임자 처벌 요구가 분출하지도 않았다. 메이 당시 총리, 사디크 칸 런던 시장에 대한 사임 요구도 없었다. 유족들은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중략) 무어-빅은 조사위 활동을 개시하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원의 의문은 고려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건의 실체에만 집중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조사위에 그렌펠타워 주민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단칼에 거부했다. 공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유족과의 만남을 최소화하겠다고 했다. 감정 개입을 막겠다는 의지 표시였다. (중략) 조사 보고서가 나오자 생존자와 유가족으로 구성된 단체 '그렌펠 유나이티드'는 성명을 내고 "오랫동안 결과를 기다려왔다. 진실을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조사위를 신뢰하고 인내하며 기다려왔다는 것이다. 그렌펠 유나이티드의 공식 입장과 별개로 일부 생존자는 "런던소방대 간부들을 해고하거나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은 "모든 조사가 마무리돼야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가 이뤄질 것"이라며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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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렌펠 참사 관련 기사에서 세월호 암시하는 조선일보 기사(11/1)

‘세월호’라는 키워드는 전혀 등장하지 않지만, 누가 봐도 영국의 사례를 끌어와 박근혜 정권의 세월호 사건 책임을 희석시키고, 세월호 유가족을 흠집내려는 의도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영국의 유가족들도 결코 가만있지 않았다

여러 기사와 사고 생존자 및 유가족으로 구성된 단체 ‘그렌펠 유나이티드’의 홈페이지를 참고해 보면 기사 내용도 대체로 사실이 아닙니다.

우선, 조선일보는 조사보고서 결과 내용을 보도하면서 그렌펠 참사 조사위원장인 마틴 무어-빅이 강한 어조로 소방당국과 현장지휘관의 판단을 비판한 것을 “소방대의 최초 판단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해당 지시를 더 빨리 철회했으면 사망자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며 발언의 강도를 ‘자체 완화’ 했습니다. 또, 연합뉴스가 보도한 유가족 단체의 공식 성명에는 “이번 보고서 내용은 우리의 집을 죽음의 덫으로 바꾸는데 책임을 진 이들을 형사고발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강하게 한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조선일보는 “오랫동안 결과를 기다려왔다. 진실을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부분만 보도하며 그 동안 책임 추궁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그렌펠 참사에 정치공방이 없었다는 보도 내용도 사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민영화라는 당시 영국 집권당이었던 보수당의 주요 정책과 메이 총리의 사건 대처 태도, 그리고 유럽 최대의 정치 사안인 이주민 문제가 사건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된 만큼 당연히 ‘정쟁’이 벌어졌습니다. 영국 사회당 대표 제레미 코빈은 사고 당일 보수당 정부의 실정을 지적하며 “당신이 만약 필요한 지방정부 예산을 깎는다면 반드시 다른 형태로 비용을 내야 할 것”이라고 인터뷰했고, 서울신문 기사 <“서민만 다쳤다, 누굴 위해 공공예산 줄였나영국의 분노>(2017/6/15)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영국사회에 불평등 담론이 부상하면서 보수당은 큰 비판을 받았습니다. 가디언지 <Theresa May's ratings slump in wake of general election poll>(2017/7/2)에 따르면, 메이 총리의 지지율은 4월 +21%(긍정에서 부정을 뺀 지지율)에서 7월 –20%로 곤두박질 쳤고, 사회당 제레미 코빈의 지지율은 같은 기간 –35%에서 +4%로 급상승했습니다. 테레사 메이 총리가 사임할 때 브렉시트와 함께 가장 큰 실정으로 지목된 것도 그렌펠 참사였습니다.

유가족들이 마냥 보고서가 나오기를 기다린 것도 아닙니다. 우선, 조선일보 기사 내에서 서술이 배치됩니다. 조선일보는 “유족들이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했지만 뒷부분에는 “일부 생존자는 런던소방대 간부들을 해고하거나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조선일보가 ‘일부’라고 규정하면 유가족이 아니게 된다는 태도입니다. 이는 2014년 5월 초 세월호 유가족들이 청와대 앞에서 농성할 당시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의 ‘순수 유가족’발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조사위에 그렌펠타워 주민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단칼에 거부했다”는 대목도 있는데, 이는 바꿔 말하면 그렌펠타워 주민을 사고 조사위원회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그렌펠 유나이티드 홈페이지에 공유된 기사 <‘people have been so strong’:how grenfell united is fighting for justice>(2018/7/25)에 따르면, 그렌펠 유나이티드는 생존자들이 요구하는 위원의 조사위 참여를 위해 15만명 규모의 서명을 모집했습니다. 가디언지는 이에 대해 “총리가 피해자들의 배경과 경험을 더 잘 반영할 수 있는 조사패널들의 참여를 거부하고 있지만, 그렌펠 유나이티드는 아직 메이 총리가 생각을 바꿀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청원을 진행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조선일보, 언제까지 세월호 유가족 비방할건가

단순하게 생각해도 영국의 그렌펠 타워 조사위원회는 2년이나 막힘없이 운영되었고 앞으로도 2년의 진상규명 조사를 더 할 것이라고 하니, 정치권의 끈질긴 방해 끝에 2년을 못 채우고 해산됐던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와 비교해 보면 조선일보의 이번 왜곡보도는 더욱 악의적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앞서 <세월호 5주기에 타이거우즈·민노총이라니>(4/23)에서 지적했듯, 조선일보는 지난 4월 세월호 5주기에도 축소보도를 하고, 2기 특조위 활동에 대해서는 “지난해부터 다시 '2기 특조위' 조사를 하고 있다. 억지에 가까운 의혹들이 여전히 횡행하고 또 '책임자'들을 처벌하겠다고 한다. 세월호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미련을 버릴 줄 모른다.”고 주장했습니다.

세월호 특조위가 전 정권의 방해로 마비되었던 기간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세월호 특조위가 운영된 기간은 3년도 채 안됩니다. 그런데도 세월호 사건은 이미 끝났다고, 더 이상의 진상규명은 ‘정치적 이용’이라고 말하는 언론과 특정 정치집단이 있습니다. 그렌펠 사건 조사보고서로 한국사회가 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일 것입니다.

 

* 썸네일 : 위키피디아 커먼즈

* 모니터 기간과 대상 : 2019/11/1 조선일보 지면

<끝>

문의 공시형 활동가(02-392-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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