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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연쇄살인사건 보도, 언론의 민낯 보여줬다지난 19일, 33년 전 일어났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특정됐습니다. 경찰이 이 사건 증거물 일부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내 DNA 분석을 의뢰한 결과 용의자 이 씨의 DNA와 피해자의 증거물에서 발견된 DNA가 일치한다는 통보를 받게 된 겁니다. 미제 사건으로 분류됐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실마리가 풀리자 언론들은 이 소식을 많이 보도했습니다. 용의자의 몽타주·범행이유·범행수법 등은 매일같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습니다. 국민적 관심이 높은 사안인 것은 사실이지만, 언론이 과도하게 해당 사안을 보도하면서 자극적이고 무차별적인 보도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용의자가 특정된 이후 6일간 신문과 방송에서 다뤄진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살펴봤습니다.
지나간 사건이라고, 범죄 수법 지나치게 상세히 알려주는 언론
우선 언론은 범죄 수법을 너무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유력 용의자가 지목된 이후, 그가 처제를 살해한 혐의로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언론은 처제 살인사건 당시의 사건 기록을 찾아보며 범죄 수법을 자세히 알렸습니다.
2012년 12월 12일, 국가인권위원회와 한국기자협회는 성범죄 사건이 매우 선정적이며 2차 피해를 양산하는 등 인격권 침해가 심각한 상황에서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권고기준에서는 “언론은 성범죄 사건의 이해와 상관없는 범죄의 수법과 과정, 양태, 그리고 수사과정에서의 현장 검증 등 수사 상황을 지나칠 정도로 상세히 보도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언론 보도는 이 가이드라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동아일보는 <처제 살해 때도 스타킹으로 묶어>(9/19 윤다빈 기자)에서 “이춘재의 처제 살해 수법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여러모로 닮은 점이 있었다”라고 말하며 지면에 사건 묘사가 담긴 기사를 실었습니다. 경향신문 역시 <처제 성폭행 후 살해한 용의자, 화성 사건과 범행수법 비슷>(9/20 이삭 기자)에서 당시 사건 기록 내용을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갈수록 기사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합니다. 국민일보는 <“얼굴엔 검은 비닐… 쿠션에 시신 구겨 넣어” 처제 살인사건 재구성>(9/19 박민지 기자)에서 처제 살인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습니다. 국민일보는 용의자 이 씨가 어떻게 처제를 유인했는지, 또 무엇을 이용해 살해했는지 도구까지 언급합니다. 사체 유기 방법도 자세히 알려줍니다.
△ 용의자 이 씨의 처제 살인 사건을 재구성한 국민일보(9/19)
물론 언론이 두 사건의 범행 수법이 비슷하기 때문에 용의자로 특정 지을 수 있는 보도를 할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도 언론이 수사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론이 가해자의 살해수법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용의자를 특정 짓는 데 도움을 주는 정보 외에 필요 없는 정보들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모두 언론이 눈길을 끌기 위해 자극적으로 제목을 뽑고 무리한 내용을 집어넣은 보도행태입니다. 위 기사들은 성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을 명백하게 어기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범죄자의 범죄 동기를 설명하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언론들은 피해자에 대한 배려 없이 범죄자의 범죄 동기를 설명하는 내용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용의자 이 씨가 벌인 처제 살해의 범죄 동기를 보도한 것인데요. JTBC는 <“몽타주와 닮아…처제 살해했다면서 무죄 주장”>(9/19 김태형 기자)에서 용의자 이 씨와 같이 수감되었던 교도소 동기를 인터뷰했습니다.
JTBC는 이 씨의 교도소 동기를 통해 여과 없이 범죄동기를 내보냈습니다. 교도소 동기는 “처제가 굉장히 예뻤다. 그 말을 강조하더라고요. 예뻐서, 강간하고 죽이고, 사체 유기까지 하고, 가족이나 친지한테 걸릴까 봐 죽였다”라고 말했습니다.
△ 용의자 이 씨 살해동기 설명하는 교도소 동기의 증언 전한 JTBC(9/19)
중앙일보는 JTBC의 보도 내용을 그대로 옮겨 <“처제 예뻐서 그랬다, 난 무죄”···화성 용의자의 두 얼굴>(9/20 정은혜 기자)을 보도했고 국민일보 <“화성살인 용의자, 처제 예뻐서 강간…죽였다고 해놓고 무죄 주장”>(9/20 박세원 기자), 이데일리 <‘화성연쇄살인사건’ 이춘재 “처제 예뻐서 죽였다…난 무죄”>(9/20 장구슬 기자), 그리고 아시아경제 <“처제 예뻐서 성폭행…난 억울하다” 이춘재, 잔혹하고 이중적인 성격>(9/20 한승곤 기자) 기사가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JTBC의 보도로 시작된 이 기사 역시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에서 “피해자의 상태를 보도함에 있어 은연중에라도 ‘가치판단’이 가미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하며, 피해자의 어떤 상태 ‘때문에’ 범죄가 일어났다는 식의 표현은 삼가야 한다”를 위반한 것입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범죄사건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항을 별도 신설해 9월 27일부터 개정안을 시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방송심의 규정 제21조의2(범죄사건 피해자 등 보호) 2항 개정안에서는 “방송은 객관적 근거 없이 범죄 발생의 원인이 피해자 측에 있는 것처럼 묘사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규정이 없어도, 언론인이라면 당연히 생각해봤어야 합니다. 처제가 예뻐서 성폭행했다는 가해자의 주장을 그대로 내보내는 것은 아무런 공익적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이런 식의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세상에 그대로 전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이중삼중의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언론이 ‘피해자가 예뻤다’, ‘옷차림이 어땠다’, ‘술을 마셨다’, ‘늦은 시간이었다’와 같은 식의 성폭력 가해자들이 하는 변명을 한마디도 받아써주지 말기를 바랍니다.
용의자 아내 진술 통해서 '성도착증'이라는 개인성향에 집중하기도
조선일보는 처제 살인 사건이 일어난 당시 조사 자료를 통해 아내의 진술을 기사화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일보는 <“진술하러 온 이춘재 아내, 남편 성 도착증 호소하며 계속 울어”>(9/21 권상은 신정훈 기자)에서 “이춘재의 아내 A씨는 동생이 살해된 1994년 1월 경찰 진술에서 남편의 폭력 성향과 성도착증이 심하다고 호소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썼습니다. 동생을 잃은 엄연한 피해자이자 범죄자의 가족의 진술내용을 기사화한 것입니다.
게다가 MBN은 여기서 용의자의 폭력적인 성향이 ‘본능’이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MBN은 <“범행 끊으려 했지만 본능 못 참아”>(9/23 윤길환 기자)에서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는 10차 사건 발생 석 달 만에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전문가들은 용의자가 범행을 끊으려고 했지만, 폭력적인 본능을 참지 못하고 이후에 처제를 살해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성범죄를 저지르고 살해까지 하는 범죄가 ‘본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이와 같은 기사쓰기는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의 “언론은 수사기관이 제공하는 정보라도 그 공개의 적절성 여부를 판단해 자기 책임 하에 보도한다”는 내용과도 배치됩니다. 언론이 용의자 이 씨 아내의 수사 기록을 확인했더라도 그 내용이 얼마나 보도가치가 있는 것인지 생각했어야 합니다. 이 씨가 성도착증이 있었다는 내용은 수사 과정 중엔 중요한 단서가 될지 몰라도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지는 것이 과연 공적 이익에 부합하는 일인지는 의문입니다.
또한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에는 “언론은 성범죄의 범행 동기를 개별적 성향-가해자의 포르노, 술, 약물 등 탐닉, 자제할 수 없는 성욕 등-에 집중함으로써 성폭력의 원인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강화하거나 가해자의 책임이 가볍게 인식되지 않도록 주의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방송심의 규정 개정안 제21조의3(성폭력·성희롱 사건보도 등) 1항 개정안은 “방송은 성폭력·성희롱 사건을 선정적이고 자극적으로 다루어서는 아니 되며, 가해자의 책임이 가볍게 인식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특히 가해자의 개별적 성향을 부각하는 보도를 자제해야 하는 이유는 성폭력 사건을 특수한 사람에 의해 발생하는 예외적인 사건으로 인식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범죄의 근본적 원인은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사회구조에 있습니다. 언론이 성범죄의 원인에서 개인의 성격만 다루게 된다면, 성범죄의 구조적 문제를 짚지 못하게 됩니다. 이 씨의 아내가 성도착증에 대한 진술을 했어도 이 내용이 성범죄 근절에 올바른 영향을 줄 수 있는 발언인지 검토했어야 합니다.
용의자 어머니까지 찾아가 심경 묻는 언론, 이것도 알권리이고 공익인가?
언론이 유력 용의자의 가족들을 인터뷰한 것도 문제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는 유력 용의자의 모친과의 인터뷰 내용을 기사 제목으로 뽑았습니다. 기사에는 이 씨가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됐다는 것을 알게 된 가족들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조선일보는 <“모든 게 제가 자식을 잘못 키운 탓” 병상서 가슴 친 이춘재 모친>(9/23 조철오 기자)에서 “아들이 저지른 범행이 추가로 드러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중략) 김 씨는 아들 소식을 알게 된 직후인 지난 21일 퇴원해 자취를 감췄다”고 보도했습니다.
한국일보 역시 <단독/이춘재 모친 “이웃 볼 낯 없어…세월 지나 얘기하는 건 잔인”>(9/24 임명수 기자)에서 “아들이 용의자로 지목됐다는 말조차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얼마 전에 갑자기 기자들이 찾아와 아들이 범인으로 지목됐는데 아느냐고 물어서 깜짝 놀랐다’며 ‘부모를 먼저 배려하는 착한 아들이었기에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중략) 다가온 현실 앞에서 아들을 감싸고 싶어 하는 김 씨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언론은 사건에 대한 가족의 반응을 담기 위해 범죄자의 가족을 만납니다. 아들이 범죄자로 지목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당연히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이 원했던 그림이 바로 이런 것일까요? 가족들은 범죄자와 혈연으로 묶여있지만 엄연한 다른 주체들입니다. 이미 가족 중 한 명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족들은 고통스럽습니다. 언론이 찾아가서 이들의 심경을 묻고 인터뷰하는 일은 그 상처를 더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씨는 용의자로 지목됐을 뿐 아직 혐의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기사는 수사에 도움을 주는 기사도 아니며 가족에 대해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용의자’ 얼굴 공개 이전에 공개된 과거 사진
이 씨는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강력하게 추정되지만 아직 신분은 용의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이 씨에 대한 너무 많은 내용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는 <화성 연쇄살인 용의자 이춘재 10건 터질 당시 화성 살았다>(9/20 권상은 조철오 이세영 기자)에서 1면에 이 씨의 고교 시절 사진을 실었습니다. 조선일보는 이 씨의 고교 사진을 단독 입수했다며 사진과 몽타주를 나란히 실은 것입니다.
사진이 나오기 전 이미 화성 연쇄살인사건 용의자 이름은 언론을 통해 보도됐습니다. 이번 사건을 재수사한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50대 이 모 씨가 교도소에 수감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름을 밝히지는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많은 단서를 가지고 있던 언론은 해당 용의자의 이름을 밝혀냈고, 사생활을 모두 보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진도 보도된 것입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달랐습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용의자의 이름을 기재할 때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이 모 씨’라는 호칭을 사용해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에도 피의자 신상 공개에 대해 “언론은 성범죄 피의자의 얼굴과 이름 등 신상 정보를 관련 법률에 의해 공식적으로 공개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보도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지금 용의자 이 씨의 이름, 나이, 직업, 출신지도 모자라 가족과 이웃들을 인터뷰하며 본격적인 ‘용의자 신상 털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심각한 범죄를 흥미위주로 풀어내
한겨레는 <여성 10명 희생된 범죄 괴담·추억이라 하기엔…>(9/20 김민제 기자)에서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괴담으로 소비하는 언론의 행태를 꼬집었습니다. 한겨레는 “일부 언론과 에스엔에스(SNS)를 중심으로 ‘괴담’ 등을 거론하며 사건을 쉽게 소비하는 모습도 나왔다”고 보도했습니다. 한겨레의 지적처럼, 심각한 범죄를 흥미 위주로 풀어낸 보도들이 보였습니다.
MBC는 <‘비 오는 날 빨간 옷’ 괴담까지…“하루하루가 공포”>(9/19 남재현 기자)에서 연쇄살인사건에 얽힌 괴담을 한 번 더 언급해줬고, 머니투데이도 <“빨간 옷 입으면 안 돼” 화성연쇄살인으로 소환된 괴담들>(9/19 정단비 인턴기자)에서 “18일 경기도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33년 만에 확인되면서 용의자에 대한 관심과 함께 공포스러운 사건 자체에 대한 괴담도 소환되고 있다”고 썼습니다. 이런 기사들은 범죄에 대해 지나치게 공포감을 심어주고 흥미를 유발하는 괴담 형식으로 범죄를 소비하게 할 여지를 줍니다.
흥미 유발에 그치는 기사도 많습니다. 이데일리 <‘화성 용의자’ 이춘재, 처제 살해 전 아내에게 한 말>(9/20 박한나 기자)이나 중앙일보 <화성 용의자, 아내에 “무서운 음모” 전화 뒤…처제가 당했다>(9/20 최종권 기자)가 그 경우입니다. 대중들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더 있는 것처럼 꾸며 클릭을 유도하는 전형적인 기사입니다. 대중들은 범행 당시 이 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필요도 없고 궁금해 하지도 않습니다. 언론이 이렇게 심각한 범죄 행위를 흥미로운 이야기로 소비할 때 본질은 멀어져가고 문제 해결에 대한 논의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게 됩니다.
지금도 사건에 대한 온갖 내용이 언론을 통해 쏟아지고 있습니다. 언론은 선정적인 보도에만 매몰되어 있지 말고 공적 이익에 부합하는 기사를 써야 합니다. 또한 인권 감수성을 길러 유의미한 보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기 바랍니다.
* 모니터 기간과 대상 :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전체 언론 기사 (9/19~9/24, 온라인 기사 포함)
<끝>
문의 박진솔 활동가(02-392-0181) 정리 주영은 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