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좋은 보도상_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선 첫 시민항쟁’…부마민주항쟁 조명한 KBS부산민주언론시민연합(이하 민언련)은 2019년 10월 ‘민언련 이달의 좋은 보도상’ 시사 프로그램 부문에 KBS부산의 부마민주항쟁40년 특별기획 <1979, 부마>를 선정했다.
2019년 10월 ‘민언련 이달의 좋은 보도상’ 시사 프로그램 부문 심사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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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
KBS부산 부마민주항쟁40년 특별기획 <1979, 부마> 매체: KBS부산, 취재: 신중후 PD, 김경림 작가, 정연일‧이경찬 촬영감독 보도일자: 10/16 |
선정위원 |
공시형(민언련 활동가), 김언경(민언련 사무처장), 민동기(고발뉴스 미디어전문기자), 박영흠(협성대학교 초빙교수), 박진솔(민언련 활동가), 엄재희(민언련 활동가), 이광호(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 임동준(민언련 활동가), 조선희(민언련 활동가) |
심사 대상 |
10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7개 방송사의 탐사보도‧시사 프로그램 |
선정사유 KBS부산은 10월 16일 방송된 부마민주항쟁40년 특별기획 <1979, 부마>를 통해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하는 부마민주항쟁을 재조명했다. KBS부산은 1979년 부산대 학생들이 “유신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작한 시위가 부마민주항쟁으로 커져 나가는 과정을 정리했다. 특히 진행자 유재명 씨가 항쟁 참가자들과 함께 현장을 찾아 1979년의 분위기와 시민들의 외침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또한, 마산 경남대에서 일어난 유신반대 운동이 시민들에게까지 확산되는 과정도 전달했다. KBS부산은 항쟁의 과정에서 당시 유신독재정권의 부가세 신설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외침을 통해 부마민주항쟁이 학생들의 정치적 시위를 넘어 시민항쟁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KBS부산은 당시 시민들의 유신독재타도 외침에도 언론은 침묵했다는 점도 지적했고, 지금도 부마민주항쟁 진압 피해자들이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임을 전달했다. 무엇보다 KBS부산이 1979년 부마민주항쟁 진압을 전두환이 주도했고, 1980년 광주학살로 이어졌다는 연결고리를 짚은 점은 높게 평가할 대목이다. 부마민주항쟁은 계엄령 이후 총과 칼을 들고 온 군인들의 진압에 힘을 잃었고, 이런 진압작전은 7개월 뒤 광주에서 시민들에게 사격을 가하는 학살로 이어졌다. KBS부산은 부마민주항쟁이 유신독재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시민들의 외침이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대한민국 민주화를 이끌었다는 점을 보여줬다.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부마민주항쟁의 역할을 짚은 것이다. 40주년을 맞은 부마민주항쟁이 더 많은 시민에게 알려지길 바라며 민언련은 KBS부산의 부마민주항쟁40년 특별기획 <1979, 부마>를 2019년 10월 ‘민언련 이달의 좋은 보도상’ 시사 프로그램 부문에 선정했다. |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을 끝내고 대한민국 민주화의 시작을 알린 부마민주항쟁은 올해로 40년을 맞이했다. 정부는 올해 부마민주항쟁의 국가기념일 지정을 결정했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은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했고, 진압 피해자들 역시 국가와의 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KBS부산은 부마민주항쟁 40년을 맞아 항쟁 과정과 의미를 되짚는 <부마민주항쟁40년 특별기획/1979, 부마>를 제작했다.
국민들의 “유신철폐, 독재 타도” 외침에 무력진압으로 답한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KBS부산은 가장 먼저 1979년 부마민주항쟁의 의미와 유신독재정권의 대응을 설명했다. 부산대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가 커지자 유신독재정권은 대응을 위한 회의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항쟁이 “일반 국민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라며 “민심 수습책을 내놓지 않으면 저 사태가 서울 등 전국 대도시로 확산될 것”이라 설명했다.
그러나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의 반응은 달랐다. 차 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 대원 100~200만 명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며 강경진압을 주장했고, 박정희 대통령도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고 발언했다. 정부의 부당한 정책을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한 국민들의 외침에 대한 유신독재정권의 대답은 무력진압과 학살 예고였던 셈이다. KBS부산은 이 대답을 유신독재정권의 결론으로 설명했다.
△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유신독재정권의 대응을 보여준 KBS부산 <1979, 부마>(10/16)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반응에 분노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1979년 10월 26일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을 겨눴다. 유신독재정권 최초의 시민항쟁이 독재자의 죽음으로 연결된 것이다.
‘대학생들의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부마민주항쟁 참가자의 목소리로 역사를 보여준 KBS부산
KBS부산은 부마민주항쟁이 진행된 과정을 유신독재정권의 문제점들과 함께 설명했다. KBS부산과 인터뷰를 진행한 전우용 역사학자는 유신독재가 “민주주의적 조건을 전혀 채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아주 강력한 1인 독재체제”였다고 평가했다. 이어 KBS부산은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기 전 유신독재정권의 만행들을 설명했다.
1979년 8월 YH무역 사측이 일방적으로 폐업을 통보하자 노동자들은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유신독재정권 경찰은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진압했다. 당시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가 이에 반발하자 국회는 김 총재를 의원직에서 제명했다. KBS부산은 이 두 사건을 “침묵하고 있던 부산과 마산의 민심에 불을 붙인 결적적인 사건”이라 설명했다.
연이은 유신독재정권의 만행에 부산대 학생들은 “유신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행진했다. 이렇게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부산 전역으로 번졌다. 학생들은 당시 최대의 번화가였던 남포동으로 향했다. KBS부산은 이 과정을 진행자 유재명 씨가 당시 항쟁에 참가했던 시민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과정을 통해 보여줬다. 당시 현장을 목격했던 항쟁 참여자 최용국 씨는 유신독재정권 경찰이 일반 시민 중 여성 학생을 “곤봉으로 내리쳤”고 “머리를 내리쳐서 제 바로 눈앞에서 뻗어버렸”다며 잔혹한 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에 합류했다고 증언했다.
△ 부마민주항쟁 현장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항쟁 참여자 최용국 씨 KBS부산 <1979, 부마>(10/16)
‘대학생들의 외침’에서 ‘시민항쟁’으로 이어진 부마민주항쟁
특히 KBS부산은 부마민주항쟁이 시민항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1979년 경제상황과 연결지어 설명했다. 유신독재정권이 집권의 정당성을 위해 내세운 경제성장은 멈추기 시작했고, 오일쇼크 등 외적 악재가 발생하자 물가가 폭등과 기업 도산이 이어졌다. KBS부산은 “특히 노동 집약적인 중소기업들이 몰려있던 부산과 마산의 부도율은 전국의 두배를 넘어섰”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은 유신독재정권이 1977년에 도입한 부가가치세에 불만을 터뜨렸다. 부마민주항쟁 참여자들도 “부가세 철폐”를 외쳤고, KBS부산은 이를 “부마항쟁이 단순한 청년들의 정치적 시위를 넘어서 시민항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했다.
KBS부산은 마산으로 이어진 시위도 조명했다. 마산에서 벌어진 시위는 박정희 정권 경호실장 출신 박종규가 이사장으로 있던 경남대에서 시작됐다. 경남대 학생들은 이사장 박종규로 인해 유신대학으로 칭해지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고, 부산에서 시위가 벌어진 이후 “박정희의 앞잡이 공화당을 말살하자”는 문구를 학교에 붙였다. 경남대 학생들이 시작한 시위는 거리로 이어졌고, 시민들이 합류했다. 유신독재정권의 문제를 지적하는 대학생들의 외침을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은 외면하지 않았고, 그렇게 부마민주항쟁의 역사가 만들어졌다.
1980년 5월 광주학살 7개월 전, 전두환은 부마민주항쟁 폭력진압을 지휘했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은 비상계엄령 선포와 군의 개입으로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 유신독재정권은 끝내 민주주의를 외친 시민들의 목소리를 외면했고, 총을 든 군인들을 부산에 투입해 폭력진압에 나섰다. 국민을 상대로 무장을 한 군인이 폭력을 휘두르며 진압 작전을 펼친 이 계획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이었다.
KBS부산은 이 사실을 육군 군수사령부의 자료를 통해 확인했다. 문서를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전두환은 “군이 개입한 이상 데모자에게 강력한 수단을 사용하여 군의 위세를 과시해야 한다 명령했”다. 전두환의 명령 이후 “오후 1시 30분 공수여단과 해병대 등 3400여 명이 군용트럭 200여 대에 나눠 타고 시내에서 시위 진압작전에 나섰”고 시위는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 군수사령부 문건에서 확인된 전두환의 부마민주항쟁 진압작전 지시내용 KBS부산 <1979, 부마>(10/16)
군은 전두환이 주도한 부마민주항쟁 폭력진압을 통해 초기에 군대를 투입해 강경진압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리고 이런 진압 방식은 7개월 뒤 1980년 5월 광주학살로 이어졌다. KBS부산은 “부마항쟁 이후 시위진압을 훈련해 온 공수여단은 피의 진압작전을 펼”쳤고, “시위대를 향해 발포까지 서슴치 않았”다며 부마민주항쟁의 진압작전이 광주학살의 발단이었다는 점을 짚었다. KBS부산이 부마민주항쟁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연결점을 짚은 것이다.
민주화의 포문을 열었지만 피해자는 여전히 국가와 소송 중
KBS부산은 부마민주항쟁 진압 피해자들의 목소리도 담았다. 당시 항쟁의 목격자였던 옥상열 씨는 시위대의 분노가 만든 경찰서 화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진압대 온다”는 외침을 들었고,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이동하던 옥상열 씨는 “형사가 나와서 배를 걷어차”는 등 폭행을 당했다. 경찰은 당시 19살의 고등학생에게 “소요와 방화”를 이유로 고문을 통해 거짓자백을 강요했다. 옥 씨뿐만 아니라 KBS부산은 당시 고문 피해자인 송두한, 한영식 씨의 증언을 보여주기도 했다.
무력진압과 고문을 통한 자백으로 일부 진압 피해자들은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했다. 피해자 옥상열 씨는 “어떻게 싸울 방법이 없잖아요. 그래서 다 잊고 살았어요”라며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의 제대로 된 조치가 없었다는 점을 증언했다. KBS부산은 “지금도 부마항쟁 관련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과 함께 “이들의 삶 속에서 부마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설명했다. KBS부산은 부마민주항쟁을 조명하며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달했다는 점에서 진실을 보도하고, 약자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언론 본연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40년을 맞이한 부마민주항쟁…기억해야 할 민주화의 역사
KBS부산은 프로그램의 마지막에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행사를 다뤘다. 정부는 부마민주항쟁 40년만에 국가기념일 지정에 나섰고, 이 자리에서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부마민주항쟁은) 4대 민주화운동 중 유일하게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지 못해왔”고 “진상규명과 피해자의 명예회복, 피해보상은 다른 민주화운동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부마민주항쟁은 유신독재를 끝내고 대한민국 민주화를 이끌어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아래로부터의 외침, 시민들의 변화에 대한 요구는 2016년 광화문의 촛불과 같았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부마민주항쟁은 그간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특히 국가가 마땅히 사죄했어야할 공권력의 무력진압, 고문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인정조차 받지 못해 국가와 소송을 진행해야 했다. KBS부산은 부마민주항쟁 40년을 맞아 대한민국 민주화의 시작점이 된 부마민주항쟁을 재조명하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40년을 맞은 부마민주항쟁이 더 많은 시민들에게 알려지길 바라며 민언련은 KBS부산의 부마민주항쟁40년 특별기획 <1979, 부마>를 2019년 10월 ‘민언련 이달의 좋은 보도상’ 시사 프로그램 부문에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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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임동준 활동가(02-392-0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