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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정 지적한 시민들에 ‘군주적 사고관’ 운운한 중앙일보
등록 2019.05.17 18:58
조회 390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 취임 2주년 대담 이후, KBS 송현정 기자에 대한 논란이 뜨겁게 일었습니다. 대담 내용보다 진행자의 태도가 논란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기에, 다수 언론이 이 사건을 논평했습니다. 그런데 중앙일보는 송 기자를 비난한 시민들을 일방적으로 ‘문빠’로 규정하거나, 국민을 비난하고 훈계하는 칼럼들을 내놨습니다.

 

 

중앙일보의 ‘문빠’몰이, 유감이다

먼저 살펴볼 칼럼은 <전영기의 시시각각/송현정과 누추한 촛불 민주주의>(5/13 전영기 기자)입니다. 먼저 칼럼 중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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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빠’ 때문에 언론자유가 도전받는다는 중앙일보 칼럼(5/13)

 

 

기자가 잘 들어야 하는 이유는 잘 묻기 위해서다. 경청은 수단일 뿐 질문이 목적이다. 이 총리는 이런 사정을 비틀어 훈계조로 송현정 기자를 비난했다. 아니 치열하게 취재하고 질문하는 기자 전체를 욕보였다. 이낙연의 궤변이 문 대통령이나 청와대, 소위 ‘문빠들’한테서 점수를 좀 땄는지는 모르겠다(중략)

송 기자의 정중하면서도 시종 긴장을 자아내는 취재 태도는 개인 스타일이기도 하거니와 기본기가 노무현 청와대를 출입할 때 단련된 것이다. 송현정이 문 대통령과 개인 인연을 넘어 기자로서 물어야 할 것을 묻고, 답이 나올 때까지 여러 각도에서 파고든 자세에 동료 기자로서 안도감을 느꼈다(중략)

이런 식의 일문일답은 얼마 전 트럼프 대통령과 CNN 기자가 삿대질하면서 싸웠던 미국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자유민주 사회에서 대통령과 기자 사이에 항용 일어날 법한 일이다. 이를 두고 “불량스럽기 짝이 없는 무례한 질문”이라며 송 기자를 공격하는 댓글과 방송사의 사과나 해체를 요구하는 청원이 빗발치고 있으니 우리가 사는 곳이 1인을 태양으로 모시는 군주의 나라인가.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2년이 만족스러운 모양인데,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언론의 자유가 군중 권력에 도전받고 있다. 촛불 민주주의가 누추해졌다.

 

 

‘문빠’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맹목적 지지를 보내는 일부 극렬 지지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물론 송 기자의 가족까지 언급하는 행동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소수의 극단적 여론이 주류는 아닙니다. ‘언론 자유가 도전받고 있다’고 느낄 만큼 위협적인 세를 형성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만 살펴봐도 알 수 있습니다. 편파방송 송현정 기자를 규탄한다는 청원은 5월 10일 올라와 15일 오전 11시 기준 6,900명 남짓이 동의했습니다. 보다 완곡한 톤으로 쓰인 대통령의 대담은 검증된 실력을 가진 대담자와 진행하도록 하여 주십시오라는 청원은 2만5,000명 수준입니다. 관련 청원 중 최다 동의를 얻었습니다. 3만 명 조금 넘는 시민이 ‘규탄’ 이나 ‘보다 검증된 실력을 가진 대담자와 진행하도록’ 정도의 표현으로 송 기자를 비판했다고 해서 언론 자유가 위협을 느낀다는 것은 엄살입니다. 몇몇 극단적 사례로 광장에 모였던 백만 촛불시민의 민주주의를 “누추해졌다”고 말하는 것은 비약 중 비약입니다. 180만 명 넘게 청원한 자유한국당 해산 청원정도는 돼야 피부로 느껴지는 유의미한 여론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미디어오늘 <KBS 내부에서도 혹독한 평가 받는 대통령 인터뷰>(5/14 이재진 기자)에 따르면 KBS 내부에서도 이번 대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나왔다고 전해집니다. 보수진영에서 제기한 아젠다에만 기반해 대담을 소화했다는 것입니다. 직원들뿐 아닙니다. 연합뉴스 <양승동 KBS 사장 대통령 대담 비판 안타까워··· 성장통 삼겠다”>(5/15 이정현 기자)에 따르면 양승동 사장 까지 대담에 대해 미흡했다는 소회를 밝혔습니다. KBS 대통령 대담이 전반적으로 부족했고 기획력과 질문 구성 등에서 지적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를 지적하는 국민을 모두 ‘문빠’로 등치시키고, 기자들이 엄청난 언론 자유 침해를 받은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과장입니다.

 

 

언론 본령은 국민 계도가 아니다

다음 살펴볼 칼럼은 <취재일기/송현정 논란, 대통령과 나랏님 사이>(5/13 유성운 기자)입니다. 칼럼은 과거 ‘김정숙씨 논란’ ‘밥 퍼먹다 논란’ 등을 언급하며 이번 사건도 다르지 않다고 규정합니다. “조선왕조의 봉건적 사고”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며 시민들을 진단했습니다. 여전히 박근혜 대통령에게 의리를 지키는 이들과 다르지 않다는 식의 서술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문빠’나 ‘태극기 부대’나 거기서 거기라는 양비론입니다. “국민이나 공동체보다 ‘우리 주군’이 먼저라는 사고방식의 발로”라 평가합니다. “민주공화국이란 제도로만 완성될 수 없음을, 결국 시민사회의 성숙한 의식이 기본이어야 함을 이번 ‘KBS 대담 논란’은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며 칼럼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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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조선왕조의 봉건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중앙일보 칼럼(5/13)

이 글에서도 마찬가지로 언론의 피해자 코스프레 그리고 엄살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정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일 수 있습니다. 그 중 특정 여론만을 다수에 의한 억압으로 규정하고 여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언론 행태가 외려 ‘군주적 언론관’입니다. 대중을 계도해야 한다는 엘리트주의도 엿보입니다. 시민 분노를 비합리적인 것으로만 치부해 신민·우민 취급하는 것은 기자가 가진 특권의식과 얕은 통찰을 드러낼 뿐입니다.

 

기자는 특권층이 아닙니다. 생업에 바쁜 시민 대신 현안을 파악하고 공부해서 알려주는 직업일 뿐입니다. 남들보다 진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것은 기자가 잘나서가 아니라 권한을 위임받은 직업 특성입니다. 대담을 보고 시민들이 분노를 느낀다면 어떤 요소가 그랬는지, 어떤 구조적 문제가 아쉬웠는지 분석하고 지적하면 됩니다. 시민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공허하고 무용(無用)할 뿐입니다.

 

 

‘미국식 언론자유’ 말하기 전에 ‘미국식 기자정신’부터 닮아야

미국 언론과의 비교도 흔히 등장합니다. 폭스뉴스나 CNN을 보니 대통령과 인터뷰하는 기자가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게 무례하더라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런 권한을 본인들도 갖고 싶다는 식의 주장이 나옵니다. 중앙일보 <김현기의 시시각각/워싱턴에서 보는 송현정 인터뷰>(5/15 김현기 워싱턴총국장)이 대표적입니다. 전체적으로 “사회의 후진성”을 비판하면서 미국의 언론 자유를 부러워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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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후진적’이라 미국처럼 공격적인 인터뷰를 할 수 없다는 중앙일보 칼럼(5/15)

 

 

 

굳이 미국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최대 권력 대통령에게 직설적으로, 비판적으로 캐묻는 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한 일이다. 고분고분 착한 질문만 하고, 그걸 칭찬하는 사회는 북한 같은 왕조사회다(중략)

인터뷰 뒤 송 기자 남편과 사촌동생이 누구며, 표정이 어떠니 하며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도배하는 행태는 본질은 외면하고 곁가지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보여준다.

60년 동안 무려 10명의 미 대통령에게 가슴을 후벼 파는 질문을 쏟아냈던 헬렌 토머스 기자가 은퇴하며 남긴 이야기. “거친 질문이 무례하다곤 생각 않는다. 대통령이 추궁을 당하지 않으면 그는 군주나 독재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인기를 얻고자 기자가 된 게 아니다. 답을 얻을 때까지 대통령에게 끊임없는 압박을 가해야 한다. 그건 우리 사명이다.”

공부도 부족하고 직업의식도 약한 기자들, 자신이 지지하는 대통령에 대한 비난에 익숙지 않은 국민들 모두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송 기자 인터뷰는 아직 폭스뉴스 월러스의 절반에도 못 갔다.

 

하지만 김 논설위원께서 좋아하시는 미국 언론자유는 결과물입니다. 미국 기자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권력을 견제했습니다. 먼 과거 워터게이트부터 트럼프 대통령 초기에 불거진 러시아 대선개입 게이트까지, 생생히 살아있는 권력에 의문을 제기하고 저항했습니다. 그 모습에 미국 시민들이 신뢰를 보냈습니다. 기자라면 권력자 앞에 다소 무례하더라도 괜찮다는 일종의 사회적 신뢰가 형성된 겁니다. 미국 기자들이 치른 비용은 못 본 체하고 미국 기자들이 누리는 언론 자유의 열매만 골라 먹고 싶다면 그것은 욕심이 지나친 겁니다. 공짜 점심은 없습니다.

시민의식이 부족한 게 아니라 언론이 시민 신뢰를 얻지 못한 겁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때, 세월호 사건 때, 심지어 국정농단 게이트가 터졌을 때까지도 권력 앞에 침묵했던 언론들을 기억합니다. 대다수 언론은 하이에나와 같았습니다. 권력이 살아있을 땐 주변부를 맴돌기만 하다가, TV조선과 한겨레, JTBC가 박근혜 정권을 완전히 넘어뜨린 다음에서야 대세를 확인하고 몰려들어 죽은 고기를 뜯었습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새벽 세 시에 간장게장 골목을 누비고 당최 손님이 없다며 최저임금을 탓한 ‘그 기사’는 최근의 일입니다. 외신을 그대로 베꼈던 ‘그 칼럼’도 있습니다. 이런 업보들과 본인들은 완전히 무관한 척하며 ‘언론 자유’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유체이탈 화법’ 그만두고 자기반성부터 하길

시민들이 분노하는 지점은 송 기자 개인이 아니라 결국 언론입니다. 이전 권위주의 정권 때 박근혜 정권을 비판할 생각조차 않은 언론들이 이제 와서 갑자기 참언론인이 된 양 날을 세우는 것이 시민들 보기에 불편했던 것입니다. ‘정작 필요할 때는 없더니’ 말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매 대국민 담화마다 준비한 연설문을 가지고 와서 읽었습니다. 읽고는 바로 등을 돌려 퇴장했습니다. 그나마 몇 번,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리 질문자를 정해 준비된 질문만을 받았습니다. 매 회담마다 쌍방향 소통이 아닌 일방적 통보라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껍데기뿐인 기자회견 중에 ‘말을 끊고 이의를 제기하는’ 결기를 보였다는 기자를 시민들은 단 한번도 본 적 없습니다. 기자들은 눈빛 레이저와 인사보복을 두려워했습니다. 회담장은 평온함 그 자체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나라 운영을 잘 해서 혹은 워낙 이해가 잘 되게 말을 잘 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기자들은 “더 공격적인 대담이 오갔어도 괜찮았겠다”고 말하는 민주적 대통령에게 날카로움을 위시한 몰예의를 보입니다.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에게 “무슨 자신감”이냐는 말이 나옵니다. “독재자”라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말도 서슴없이 등장합니다. 이전보다 민주적인 나라가 되긴 했구나, 실감이 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를 망각한 채 시민의식을 운운하는 언론들은 ‘유체이탈 화법’이란 옛 표현을 다시 생각나게끔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잘하겠다고 한다면, 적어도 이전까지의 행보를 반성해야 합니다. 하지만 반성의 기미가 존재했다면 위 중앙일보 칼럼들은 나올 수 없는 글들이었습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한국의 언론자유도가 비약적으로 높아진(2017년 63위 → 2018년 43위, 국경없는기자회) 것은 정권교체를 이뤄낸 촛불시민 덕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살만해진 기자들이 “촛불 민주주의가 누추해졌다”고 비아냥대는 꼴은 보기가 거북합니다.

 

 

* 모니터 기간과 대상 : 2019년 5월 10일~5월 15일 중앙일보(지면보도에 한함)

<끝>

문의 공시형 활동가(02-392-0181) 정리 박철헌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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