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위원회_
[방송모니터위원회]200명 시민과 함께하는 KBS <토론쇼 시민의회>의 숙의 민주주의 실험
이 보고서는 민주언론시민연합 회원 모임인 ‘민언련 방송모니터위원회’의 공동 창작물입니다. ‘민언련 방송모니터위원회’는 매주 화요일 저녁에 만나 방송 프로그램과 뉴스 등을 모니터하고, 한 달에 1개 정도의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방송비평을 함께하고 싶은 분들은 민언련(02-392-0181)로 연락주세요 |
지난 2018년 9월 16일 KBS는 “공공갈등을 해결하는 보통 사람들의 특별한 선택”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토론쇼 시민의회>(이하 시민의회)의 첫 방송을 시작했다. 진행자 이광용 아나운서는 프로그램을 시작과 함께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우리는 각자 하고 싶은 말만 내뱉고 듣고 싶은 이야기에만 귀를 여는 상황”이라며 “<시민의회>는 우리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는 참여의 광장으로서 200명의 평범한 시민들과 함께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밝혀보려 합니다”라고 프로그램의 포부를 밝혔다.
지난 9월과 12월에 걸쳐 총 2회 방송된 <시민의회>는 현 정부의 공론화위원회를 모티브로 6명의 전문가와 200명의 시민의원이 참여한 가운데 ‘소년 범죄 처벌 강화’, ‘낙태죄 폐지’를 의제로 다뤘다. 2시간 10분 분량의 방송에서는 전문가들의 발제와 시민 의원들의 조별 토론이 진행됐고 이후 시민 의원들은 최종적으로 찬반을 선택했다. <시민의회>는 질적으로 강화된 시민의 참여를 통해 다른 토론 프로그램과 차이를 보였다. 또한 공론화위원회를 모티브로 차용해 숙의 민주주의를 일상으로 확대하려는 의지도 보여줬다. 방송모니터위원회는 KBS의 기획 의도에 공감하며 <시민의회>를 모니터 해 장점과 아쉬운 점을 평가했다.
공론화위원회를 모티브로 숙의 민주주의를 담아낸 <시민의회>
공론화위원회의 뿌리는 숙의 민주주의
<시민의회>가 모티브로 삼은 공론화위원회의 기반에는 숙의 민주주의가 있다. 양분법적인 조사 결과로서만 여론이 집계되는 것은 간접 민주주의의 한계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반면 숙의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관련된 정보를 충분히 숙지하고 토론을 통해 찬반 양측의 논거를 확인한다. 개개인들이 사안에 대해 충분히 숙고할 시간과 기회를 얻는 것이다. 숙의 민주주의는 여론조사로 집계된 찬성과 반대를 고정된 결괏값으로 보지 않고 학습과 토론, 소통을 통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실체로 간주한다. 승자독식의 패러다임이 아닌 과정적이고 개방적인 패러다임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인해 숙의 민주주의는 간접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일종의 보완책으로 언급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갈등관리 능력 OECD 국가 34개국중 27위>(2015/3/24)에 따르면 2015년 보건사회연구원은 ‘사회갈등지수 국제 비교 및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한국의 사회갈등관리지수는 2011년 기준 OECD 34개국 중 27위”라고 밝혔다. “사회갈등관리지수가 높다는 것은 갈등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능력이 크다는 것”이라는 해석을 생각해보면 현재의 행정이나 사회적 제도가 갈등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있지 못한 점이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숙의 민주주의는 사안에 대한 정보전달과 토론의 과정을 통해 사회갈등을 관리하는 방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월 청와대 수석, 보좌관 회의에서 “숙의 민주주의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더욱 성숙시키면서 사회적 갈등 사항의 해결 모델로 만들어 갈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숙의 민주주의의 실천방안이 되고 있는 공론화위원회
최근 정부 정책 결정에 활용된 공론화위원회는 숙의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공론화 모델은 현 정부가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다. 2005년 참여정부는 ‘8.31 부동산 정책에 대한 공론조사’를 최초로 실시했으며, 2011년 경찰청과 국가경쟁력강화 위원회가 4색 신호등을 3색으로 전면 교체하면서 시민참여형 여론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어 시민사회와의 소통을 강조하는 문재인 정부의 출범 이후 공론화 제도는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2017년에는 ‘신고리 원전 5, 6호기 건설’, 2018년에는 ‘대통령 개헌안’과 ‘2022학년도 대입제도 개편’ 등의 사안에 공론화위원회를 꾸려 정책 추진 방향을 결정했다.
물론 숙의 민주주의나 공론화위원회가 갈등을 해결하는 만능도구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공론화위원회의 결론을 그대로 따를 것인지에 대해서는 반대의견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인위적으로 샘플링된 공론화위원회가 국민을 얼마나 대표하는지의 문제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문제해결의 책임자들이 민감한 결정을 여론에 떠맡긴다는 주장도 있다. 국회와 같은 대의제 제도를 우회하는 것이 오히려 민주주의에 역행한다는 비판적 시각도 나왔다.
해외의 사례에서는 앞서 제기된 숙의 민주주의와 공론화위원회에 대한 비판적 지적을 일부 해결한 경우가 있다. 서울대학교 아시아 연구소의 웹진 ‘다양성+아시아’ 중 <동아시아의 새로운 민주주의: 숙의 민주주의의 현황과 미래>는 몽골의 공론조사를 그 사례로 설명했다. 지난 2017년 2월, 몽골은 헌법 개정 과정에서 “헌법 개정이 있을 시에 그 전에 반드시 공론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공론조사의 필요성과 절차를 명시한 법을 의회가 통과시켜 정당성을 확보한 것이다. 이처럼 숙의 민주주의와 공론화위원회는 일부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며 진행할 경우 우리 사회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으로 볼 수 있다.
‘숙의를 일상으로’…숙의 민주주의 취지 살린 <시민의회>
공론화위원회로 대표되는 숙의 민주주의는 일회성 이벤트가 될 경우 그 의미를 잃는다. 한겨레 <‘신고리 5‧6호기 공론화’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들>(2017/10/25)에서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은 숙의를 이벤트성 행사에서 일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 연구원은 “구성원과 늘 이야기하면서 ‘내 생각이 틀렸구나’ 정정할 수 있는 숙의가 생활공간에서 이뤄지도록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일반 시민으로 하여금 하나의 문제에 대해 더 풍부한 정보, 다양한 의견을 얻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는 의미였다.
같은 관점에서 <시민의회>는 숙의의 일상화를 이끌어냈다. <시민의회>는 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바탕으로 공론화위원회의 의사결정 과정을 프로그램에 차용했다. 대국민 의식조사를 통해 시민 1000명에게 의제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묻고, 조사 결과와 같은 비율로 200명의 시민 의원을 최종 선발했다. 이어 200명의 시민 의원은 방송 전 열흘 동안 자료집과 동영상 강의를 통해 주요 쟁점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시민과 함께 숙의 민주주의의 과정을 보여준 KBS <시민의회>(2회)
<시민의회>의 사전 준비 과정은 이벤트성 숙의 민주주의가 아닌 ‘일상적 숙의’의 장을 형성했다. 200명의 시민의원과 시청자는 사회적으로 찬반이 첨예하게 갈리는 사안에 대한 양측 논거를 들을 기회를 얻었다. <시민의회>는 시청자의 입장에서 더 풍부한 정보, 다양한 의견을 얻어 문제에 대한 지식이나 관여도를 높이고 합리적 의견 형성에 도움을 줬다. <시민의회>의 프로그램 구성과 취지, 진행방향은 ‘숙의의 일상화’와 맥락을 같이 했다.
당신이 <시민의회>를 봐야하는 이유
‘대접받지 못한 의제’가 논의의 장으로 나온다
<시민의회>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큰 논란거리에 묻혀 그만한 대접을 받지 못한 의제를 다뤘다. ‘소년범죄 처벌 강화’의 경우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이나 ‘인천 초등생 살인 사건’이 언론의 집중을 받으면서 이슈로 부상했다. 온라인상에 가해 학생들에 대한 비난이 들끓는 것은 물론 ‘청소년 보호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제기됐다. ‘낙태죄 폐지’도 마찬가지다. 낙태죄 폐지는 사회적 논란거리로 부상해 지난 2017년 11월 청와대 국민청원에 23만 명이 참여했고, 조국 민정수석이 국민청원에 대한 답변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의제 모두 정작 공개적인 장에서의 생산적이고 합리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시민의회>는 이들을 논의의 테이블로 끌어냈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의제를 선정했다는 면에서 <시민의회> 현명함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또한 <시민의회>가 선택한 ‘소년범죄 처벌 강화’와 ‘낙태죄 폐지’는 사회적 논의가 막 시작된 ‘생성기 의제’라고 할 수 있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정책적 문제라기보다는 장기적으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관련된 의제인 것이다. <시민의회>는 이에 대해 숙의 민주주의의 시각으로 접근해 시청자가 여러 의견을 충분히 들어보고 고민해 볼 여유를 제공했다. 덕분에 시청자는 찬반 양측의 의견을 듣고 사안에 대한 스스로의 시각을 형성할 기회를 얻었다. 시민의원들을 통해 사회의 전반적인 시각을 전달한다는 측면과 시청자에게 사회적 논란거리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을 유도했다는 점에서 두 의제는 아주 적절한 사안이었다.
<시민의회>는 “공영방송 KBS가 마련한 공론의 장”이다
<시민의회>는 프로그램 자체로서 큰 의미가 있다. 진행자 이광용 아나운서의 말처럼 “시민 여러분들이 직접 참여하는 토론을 통해 국민의 여론을 파악하고 시민의원단의 선택이 정책으로 이어지도록 촉구하기 위해 공영방송 KBS가 마련한 공론의 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수의 토론 프로그램이 주장 대 주장의 대립구도와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과 달리 <시민의회>는 서로의 견해가 다름을 존중함으로써 토론이 감정적으로 흐르는 것을 방지하고, 생산적인 의견교환이 이뤄졌다.
이를 잘 보여주듯 한 시민의원은 토론이 끝난 후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또 찬성 측과 반대 측이 공통으로 합의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고 했다.
강종구 시민의원 : 주제에 대해 명확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나와 반대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내 주장을 어떻게 얘기할까? 생각만 속 좁게 하고 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전문가 발제를 들으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정보도 얻고 (시민의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좋았고요. 낙태죄가 폐지되기를 바라는 분들, 현행 유지를 바라는 분들 모두 낙태는 안타까운 행위이고 그 안타까운 행위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같았던 것 같습니다.
△숙의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 KBS <시민의회>(2회)
‘공론장’은 개인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회적 문제를 논의하는 공적인 장이다. 각자의 주장만을 되풀이하는 것은 사회 갈등 해결의 실마리가 아닌 갈등 촉발을 보다 악화시켜왔다는 점에서 공영방송 KBS가 공론의 장을 만들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시민의회>에서는 여론조사식의 양분법적 선택이 아닌 찬성과 반대에 대한 논거 제시에 집중했다. 이로인해 시청자는 전문가 발제와 토론을 통해 자신과 반대되는 주장의 논거를 들어볼 수 있었다. 나아가 이 과정에서 ‘방관하는 시민’이 아닌 ‘참여하는 시민’이 길러진다는 성과도 있었다. 이는 <시민의회>가 한국 사회에 부족한 공론장 역할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 낼 것으로 기대되는 지점이었다.
물론 <시민의회>의 토론을 거친다고 시민들이 만장일치의 합의를 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숙의의 과정을 거친 시민은 자신이 다수가 아니어도 결과에 대한 만족을 이끌어낸다. <시민의회>의 토론과정이 만장일치의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더라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시민참여형조사 보고서’에서 “최종 결과가 본인 의견과 다를 때 존중정도”를 숙의 과정이후 최종조사한 결과 전체 93.2%의 시민참여단이 “존중하겠다”고 답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론의 장을 통해서 자신이 발언하고 또 다른 의견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는 점이 결론에 대한 수용성과 만족성을 높이는 것이다.
토론의 방향을 잡아주는 ‘전문가 발제’
<시민의회>에는 찬성 또는 반대 입장의 전문가들이 각각 3명씩 참석했다. 전문가들은 국회의원, 법조인, 해당 분야 전문가, 교수 등 다양한 직군으로 구성됐다. 발제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토론이 소모적으로 또는 지엽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방향을 잡았다. 또한 발제를 통해 시민의원들의 조별토론에 앞서 이슈의 주요 쟁점이 뭔지를 명확히 설명하고 실질적인 사례를 통해 자신의 논거를 뒷받침했다.
2회에서 다뤄진 ‘낙태죄 폐지’의 경우 반대 입장의 대표적 논거 중 하나는 ‘무분별한 낙태에 따른 출산율 하락’이다. 이에 대해 낙태죄 찬성을 대변한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낙태죄와 출산율이 관련 적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 : 1966년도에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권이 루마니아 인구 수를 늘이기 위해 낙태죄 처벌을 강화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중략) 실제 그 조항을 만들고 나서 4년 동안 인구가 조금 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인구가 늘어난 이후에 실제 아이들을 돌볼 수 없는 처지에 놓인 많은 여성이 아이들을 보육시설에 버린다든가 아이들이 영양결핍으로 유아 사망률이 늘어나는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4년 이후부터 점차 출산율이 감소하면서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이 진행되었고요.
이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은 시민의원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의 의미를 되새기기도 했다. 김천수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앞두고 ‘낙태죄 폐지’에 대한 시민들의 토론이 갖는 법적인 의미를 짚었다. 공적인 토론이 사법부 판단의 근거로 활용될 수 있는 사회적 통념, 즉 조리의 밑거름이 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김천수 교수 : 제가 전공하는 민법 1조를 보시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법률에 없으면 관습법에 의하고 관습법이 없으면 조리에 의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기준인 조리란 시대에 따라 공간에 따라 변하고 발전하는 공동체의 의식, 즉 사회 통념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통념을 시대에 따라 헌법재판소가 살펴서 그것을 반영하는 겁니다. 광장의 시민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것에 귀를 기울여 재판관들이 (중략) 우리 동시대인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를 결정해 반영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결정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낙태죄 논쟁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모인 <시민의회> 프로그램은 헌재 결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고 우리 사회의 논의를 보다 활성화하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1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표창원, 금민섭 의원이 서로 다른 입장의 전문가로 출연했다. 숙의 민주주의의 과정에서 정치적인 견해를 뛰어넘어 각기 다른 의견을 나누고 교환한다는 뜻에서 의미가 있는 출연이라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시민의회>의 전문가들은 해당 사안에 대한 시민의원들의 이해를 도왔고, <시민의회>가 가지는 의미를 시민의원들과 시청자에게 전달하면서 보다 수월한 토론 진행을 도왔다.
‘당신의 눈높이’에서 시작하는 <시민의회>
<시민의회>는 시청자의 눈높이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진행자 박지현, 이광용 아나운서는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의제와 관련된 기본적인 개념과 용어부터 정리했다. 두 아나운서는 “1953년 형법 제정 이후 낙태는 죄로 규정돼 처벌받게 되어있습니다”, “낙태죄 처벌의 주요 대상을 살펴보면 부녀와 의료인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낙태죄로 기소되는 경우가 의료인이나 여성인 겁니다”라며 문제의식을 출발점을 언급했다.
이어 찬반 양측의 논거에 사용되는 주요 용어들을 설명했다. <시민의회>는 낙태죄 폐지에서 주로 언급되는 법률 용어들과 핵심적인 법 조항과 개념을 논의에 앞서 짚으면서 시청자의 이해를 도왔다. 동시에 기본적인 용어에 대한 설명으로 합의되지 않은 용어에 대한 오해가 토론 도중 불거져 소모적인 논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줄였다. 기본적인 정보에 대한 습득을 통해 시청자가 보다 토론에 몰입할 수 있는 합리적인 구성이라고 볼 수 있었다.
박지현, 이광용 아니운서 : 먼저 낙태죄 찬성 측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들을 알아보겠습니다. 세 가지만 기억해두시면 됩니다. 자기 결정권, 재생산권, 건강권입니다. (중략) 낙태죄에서 거론되는 임신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란 임신을 계속할지 중단할 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합니다. 재생산권이란 출산에 관한 모든 행위, 성행위에서부터 출산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여성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권리입니다. 이 권리에 임신을 유지할 것인지 여부에 대한 결정도 포함되는 것이죠. 세 번째 건강권은 생명, 건강을 지키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낙태죄 폐지 반대 주장에서 주로 언급되는 생명권이란 무엇일까요. 생명권은 생명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보호받을 권리로서 헌법상 명확히 명시돼 있지는 않지만 사회 구성원의 생각이나 여러 판례를 통해 볼 때 최고의 가치로 인정되는 권리입니다.
△용어 설명으로 시작해 시청자의 이해를 도운 KBS <시민의회>(2회)
이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은 발제와 소통을 통해 시민의원들의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시민의회>가 선택한 의제는 법적인 논의가 필요한만큼 시민의원들에게는 보다 전문적인 시각이 필요했다. 1회에서 등장한 이미영 시민의원과 이웅혁 교수의 대화는 이런 과정을 잘 보여줬다.
이미영 시민의원 : 재범 확률이 높다고 하는데요. 초범이거나 혹은 재범, 3범 그 이상도 현행법상 처벌할 수 있는 기준은 똑같은지, 가중처벌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 촉법소년의 경우에는 형사처벌의 대상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아예 처벌은 안되는 것이고요. 촉법소년은 대부분이 사실상의 훈방에 그치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이 2범, 3범이라고 해서 달라질 상황이 아닌 거죠. 그래서 가중처벌을 촉법소년은 받지 않는다고 할 수 있죠.
애초에 처벌이 불가능한 촉법소년에게 가중처벌이 가능한지를 묻는 시민의원의 질문에는 법률 용어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바탕으로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는 보다 시청자의 시각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또한 토론의 과정에서 생기는 기초적인 궁금증에 기반한 내용이기도 했다. <시민의회>가 이와 같은 내용을 보여준 것은 정보전달의 과정을 시청자의 시각에서 시작해 보다 쉽게 의제에 접근 할 수 있는 하나의 장치로 작용했다.
시민을 주체로 생활 터전을 비춘 <시민의회>
<시민의회>가 각 시민의원들에게 자료집을 전달하는 장면을 통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를 보여줬다. 시민의원들은 성별, 지역 등을 균형적으로 고려해 선정된 만큼 카메라에 담긴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경북의 대학생, 충북의 직장인을 비롯해 김해의 방앗간 주인, 전남 목포의 가정주부에까지 지역과 생활 배경이 다양했다. 이처럼 카메라가 정책결정권자가 아닌 의사결정 주체인 시민의 생활 터전을 향하고 있다는 점은 “공공갈등을 해결하는 보통 사람들의 특별한 선택”이라는 소탈하고 정직한 기획 취지가 돋보이는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시민의원들이 자료집을 전달받는 장면에서 주변 인물과 나눈 대화들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었다. 강복임 시민의원은 자료집을 전달받으며 “무조건 처벌만 강화하면 나중에 아이들이 처벌을 받은 후에 더 갈 데가 없고 악화만 될 것 같아요”라고 본인의 생각을 밝혔다. 그러자 주변의 이웃은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곳을 만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교도소 갔다 오면 갈 데가 없는거야”라며 자신만의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단순한 장면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시민의회>의 시도가 200명 시민의원의 숙의에서 끝나지 않고 시민의원의 지인, 멀리는 시청자에까지 문제의식이 확산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장면으로 볼 수도 있었다. 이처럼 공론장이 확대되는 모습은 <시민의회>의 기획 취지를 잘 반영한 장면이기도 했다.
△숙의를 통한 문제의식의 공유를 보여준 KBS <시민의회>(1회)
<시민의회>가 시청자에게 더 다가갈 수 있는 방법
‘토론 없는 토론쇼’…전체 방송의 10%뿐인 ‘<시민의회>의 하이라이트’
<시민의회>는 프로그램 제목에서 스스로를 ‘토론쇼’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제 프로그램에서 토론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았다. <시민의회>는 시민의원들의 토론 과정을 분임토의를 통해 보여줬다. 진행자 이광용 아나운서가 “시민의회의 하이라이트인 분임토의가 시작됩니다”라는 설명과 함께 200명의 시민의원을 몇 개의 조로 나눠 조별로 토론을 진행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방송 시간 2시간 10분 중 분임토의 분량은 약 15분(2회 기준)에 불과했다.
숙의 민주주의의 취지를 고려하면 시민이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의회>가 시민들의 분임토의를 짧게 편집된 영상으로만 다룬 것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었다. 시민의원들이 숙의의 과정을 통해 어떤 의견을 나누고 또 스스로의 의견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거나 혹은 타인의 의견에 대해 고찰하는 과정이 프로그램에서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다 많은 토론 과정을 프로그램에 녹여냈다면 숙의 민주주의의 필요성과 장점을 더 적절하게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시민의원들이 전문가들의 발제를 흡수하는 것뿐만 아니라 숙의를 통해 스스로의 입장을 선택한 점이 강조되려면 토론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이처럼 ‘토론쇼’를 자청한 <시민의회>가 스스로 “하이라이트”라고 표현한 토론의 과정을 부족하게 담아낸 부분은 편집 방식에 있어서 아쉬움을 남겼다.
‘소통의 장’을 위한 홈페이지가 필요하다
시청자가 <시민의회>의 숙의 과정에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점도 아쉬운 요소였다. 현재 <시민의회>는 자체적인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지 않다. 이로인해 시민의원들이 숙의 과정에서 제공받은 자료 등은 시청자가 별도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이런 문제점을 잘 보여주듯 <시민의회>의 다시보기 페이지에서 한 시청자는 시민의원들의 사전교육에 이용되는 자료집이 홈페이지에 공유되었으면 한다는 의견을 남겼다.
△시청자 의견에서 자료공유에 대한 아쉬움이 나온 KBS <시민의회> 누리집 갈무리
실제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는 홈페이지를 통해 숙의 과정에 사용된 자료집을 공유했다. 이뿐만 아니라 공론화위원회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 교환을 할 수 있는 공론화 제언방을 운영했다. 그 결과 시민들은 원전 건설 재개와 중단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남기는 등의 참여가 가능했다. <시민의회> 역시 홈페이지를 통해 자료집 등의 정보를 공유하고 게시판을 운영한다면 프로그램의 파급력을 증진하고 시청자 의견을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
아쉬운 결론 활용과 적은 편성 횟수
<시민의회>는 프로그램 말미에 시민의원들이 내린 결론을 정책 입법 과정에 활용하거나,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에 제공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실제 <시민의회>의 토론 결과가 어디에, 어떤 식으로 활용되고 있는지는 시청자가 뚜렷하게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프로그램의 방송 횟수가 2회에 불과해 결과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조금 더 적극적인 결론의 활용은 프로그램의 의미를 더할 수 있다. 또한 <시민의회>가 도출한 결과가 그 자체로 일종의 작은 공론화 결과라고 할 수 있기에 단순한 여론조사보다 큰 의미가 있다. <시민의회>의 의제들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인만큼 자사의 관련 보도에서 수치를 인용하는 등의 활용방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
동시에 3개월에 1회씩 프로그램을 구성한 부분 역시 아쉬운 부분이었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의제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시민의회>와 같은 프로그램은 단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단기간에 많은 의제를 공론화 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의 편성기간 보다 더 짧은 주기로 방송될 경우 더 많은 의제를 숙의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KBS의 적극적인 편성시도를 통해 더욱 많은 공공갈등이 의제화 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시민의회>의 기획 의도이기도 한 시민참여를 통한 갈등 해결이 더욱 다양한 사안에서 이뤄질 수 있길 바란다.
* 모니터 기간과 대상 : 2018년 9월 16일부터 12월 15일까지 KBS <토론쇼 시민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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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임동준 활동가(02-392-0181) 정리 민언련 방송모니터위원회 이슬아‧정유진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