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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모니터위원회] 2018년, 한국 언론은 소년들을 악마로 그렸다
등록 2019.01.1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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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고서는 민주언론시민연합 회원 모임인 ‘민언련 신문모니터위원회’의 공동 창작물입니다. ‘민언련 신문모니터위원회’는 매주 월요일 저녁에 만나 신문에 대해 토론하면서 한 달에 1개 정도의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읽고 미디어 비평을 함께 해 보고 싶으신 분, 좋은 사람들과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싶은 분들은 민언련(02-392-0181)로 연락주세요.

 

최근 청소년 범죄를 다룬 뉴스 댓글에는 ‘요새 애들 무섭다’라는 말이 정말 많습니다. 댓글을 보면 소년범에 대한 대중의 생각을 알 수 있는데요. ‘애라고 봐주지 말고’ 무겁게 처벌해야 한다든지, 요새 애들은 영악해서 소년법을 이용해 흉악 범죄를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다닌다는 의견이 많은 동의를 받아 댓글 최상단에 올라옵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수백 개의 소년법 개정 청원이 올라와있습니다.

최근 몇 해 동안 미성년 피의자가 저지른 강력범죄 사건들이 대두된 것은 사실입니다. ‘관악산 고등학생 집단폭행 사건’ 부터 ‘인천 중학생 추락사 사건’ 까지, 차마 입에 올리기도 처참한 청소년 범죄들이 이어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아이들을 법으로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힘을 얻는 것은 언뜻 보기에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청소년 범죄는 구조적인 개선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엄벌이라는 빠른 방법으로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책임만큼이나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는 어른의 문제가 더 큽니다. 무엇보다 아동 청소년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고 있는 우리 현실이 그들을 범죄자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사회 전반의 사회안전망을 재구축하고, 공교육의 맹점을 보완해야 하며, 아이들을 재범의 악순환에서 구제할 교화 시스템으로서 보호처분 제도와 소년원 시스템을 개혁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민언련 신문모니터위원회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2018년 한 해 동안 신문의 청소년 범죄 관련 보도를 모니터했습니다. 그 결과 신문은 같은 강력범죄라 해도 미성년자가 범인인 것에 대해서는 언론이 더 집중 조명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범죄 정황을 불필요할 만큼 적나라하게 묘사하거나, 범죄 속 작은 요소를 부각해 아이들의 비인간성을 강조하는 보도행태도 많았습니다. 이런 신문보도는 아이들의 미숙함을 악마성으로 느끼게 하고, 소년범들에게 ‘소년법을 악용해 처벌은 피하면서 악행을 저지르는 존재들’이라는 부정적 인식만 남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엇보다 사회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일탈로만 치부해버림으로써 사회에 어떤 메시지도 주지 못합니다.

 

‘무서운’ ‘잔혹한’ ‘잔인한’... 10대 앞에만 수식어가 붙는다

가해자 신상정보를 부각하는 범죄보도는 해당 계층에 대한 편견을 조장할 수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과거 언론은 ‘조선족’ ‘외국인 노동자’의 범죄사실을 부각시켜 외국인 혐오를 부추기고, 외국인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수원과 안양 지역까지 편견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던 전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10대 청소년의 범죄도 외국인노동자의 범죄만큼 항상 ‘10대’라는 꼬리표가 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범죄를 많이, 또 심각한 형태로 저지르는 연령대는 40대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사에서 ‘40대가 무섭다’는 표현을 들어본 적은 별로 없습니다. 그들의 연령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10대가 범죄를 저지르면 거의 대부분 ‘무서운 10대’ ‘잔인한 10대’ 등의 꼬리표를 붙입니다. 이것은 아이들은 순수해야 한다는, ‘아이다움’의 프레임 속에 청소년들을 가둔 무의식이 작용한 것 아닐까요? 무엇보다 10대의 범죄를 들먹이며 청소년 전체를 ‘무서운 10대’로 묘사하는 것은 10대를 위해서도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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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에 ‘무서운 10대’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기사 ⓒ민주언론시민연합

 

입맛에 맞는 통계만 골라서 ‘10대 때리기’

청소년 범죄의 심각성을 주장할 때 통계를 인용하는 것 역시 전형적 수법입니다. 이를테면 국민일보 <무서운 13세… 범죄 15% 늘었다>(2018/7/19 이사야 기자)에서는 경찰청이 청소년 범죄율을 집계해 2018년과 2017년 상반기를 비교했는데, 13세 범죄율이 1년 사이 15% 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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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치 통계로 ‘무서운 13세’라며 편견 조장한 국민일보 기사(7/19)

 

실제 경찰청 <2018년 상반기 청소년범죄 분석 및 하반기 대응강화 계획>(2018/7/18 여성청소년과)에 따르면, 2017년 상반기 범죄를 저지른 13세 소년이 1,958명인데 비해 2018년 상반기엔 2,246명으로 늘어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통계는 증감이, 아닌 경향을 봐야 하는 지표입니다. 법무부 <보호소년‧위탁소년 현황>(2018/1/30)에 따르면 소년원에 송치된 소년 수는 2012년 정점을 기록한 이후 등락을 거듭했습니다. 전체적 추세 속에서 2년만을 취사선택해 원하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쓰인 것입니다.

게다가 언론은 매년 범죄율 증가 소식만 보도합니다. 범죄율이 줄어들기도 한다는 사실은 시민들이 알 길이 없습니다. 국민일보에서 13세 범죄율이 15% 늘어난 사이 실제로 10세 범죄율은 12% 떨어졌습니다. 이럴 때 10세가 온순해졌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범죄율이 심화됐다는 보도만 매년 누적되다보니 아이들이 점점 흉폭해지는 것만 같은 착시효과가 대중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책임 있는 언론이라면 단편적 팩트를 의도에 맞게 편집할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을 짚었어야 합니다.

 

그 외에도 위 기사에는 취재를 빗겨간 사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범죄 수가 늘어난 것에 대해서, 시민 일반의 인권의식이 더 높아진 탓에 예전에는 그냥 넘어갔던 사건들도 이제는 시민들이 범죄로 인식하게 됐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또 학교폭력위원회 등 교내 분쟁조정장치가 무력화된 탓에 공권력에 분쟁 해결을 의뢰하는 경향이 늘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서술을 이 모든 가능성은 무시한 채 경찰청이 내놓은 보도자료 한 가지에 기반해 13세 학생들에게 ‘무서운 13세’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바람직한 보도 경향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청소년 범죄로 선정성 장사하기

범죄보도에서, 모방범죄를 막고 대중들의 죄의식을 낮추지 않기 위해 범죄 정황은 최대한 사실 위주로 건조하게 전달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타인과 또래집단의 행동을 더 잘 베끼는 10대들을 고려한다면 이 원칙은 더 엄격히 적용돼야 합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다음 서울신문 <함께 살던 친구 집단폭행·성적 학대…무서운 10대들>(2018/5/29 이하영·이근아 기자) 보도는 10대들의 범죄를 선정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했습니다. ‘무서운 10대들’이라는 표현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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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범죄정황 그대로 묘사한 서울신문 기사

 

기사에 묘사된 내용을 보면 ‘범죄는 이렇게 저지르는 것이다’라고 가르치는 것만 같습니다. “집단으로 또래 여학생을 모텔에 감금하고 폭행해” “피해자가 신고하지 못하게 하려고 폭행 중 알몸을 촬영해 협박까지 한 것”이라는 부분까지 굳이 기사에 적시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일부는 A양의 허벅지 등을 담뱃불로 지지고 주변의 각종 도구를 이용해 성적으로 괴롭히기도 했다”며 가해자의 잔혹성을 부각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이 모든 메시지가 청소년의 잔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설계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범죄를 상세하게 보도하는 것 자체가 모방범죄에 악용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불필요한 보도라는 것이죠.

 

‘학교 밖 청소년 = 비행청소년’ 이라는 낙인

다음 살펴볼 기사는 조선일보 <만물상/학교 떠난 아이에게 현금 20만원>(2018/10/19 한현우 논설위원)가 매일 오피니언란에 싣는 만물상 코너의 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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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밖 청소년’에 대한 편견 조장한 조선일보 칼럼(10/19)

 

학교 밖 청소년들에게 현금성 복지를 제공할 것이 아니라 실효성 있는 정책을 세워서 관리해야 한다는, 취지 면에선 나름의 일리가 있는 주장을 펼칩니다. 하지만 외설적인 묘사와 삽화로 청소년에 대한 편견을 강화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로 문제 소지가 있습니다. “같은 또래를 모텔로 데리고 다니며 성매매를 시켰다. 음란물도 만들었다. 성매매하고 받은 돈을 숨겼다며 변기 물을 마시게도 했다”는 서술이나, 삽화 속 칼을 들거나 몸에 상처가 있거나 심지어 성매매를 알선하는 범죄자의 모습으로 청소년을 그려낸 것은 마찬가지로 청소년 일반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주입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해당 칼럼은 정규 교육과정을 떠난 ‘학교 밖 청소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더 조심했어야 합니다. 청소년들이 학교를 떠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경쟁과 입시만을 강조하는 한국식 교육에 싫증을 느꼈거나, 교우관계에 문제를 겪었거나, 다른 진로를 찾았거나 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위 칼럼에 묘사된 학교 밖 청소년들은 비행을 저지르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로 묘사됐습니다.

학교 밖 청소년들 사이에 일탈 청소년, 가출 청소년이 보통 또래보다 많은 비율로 포함돼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나머지 청소년들마저 학교 밖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편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우선 의문이 듭니다. 또 아이들을 흉악범으로 묘사하기 전에 모든 아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이 제공되고 있었는지 되돌아보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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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딩’ 주목해 가해자 악마성 부각한 조선일보 기사 (11/19)

 

불필요한 디테일에 주목해 소년범들을 악마로 묘사하다

2018년 11월 13일에 발생한 ‘인천 중학생 추락사건’ 때, 갑자기 가해자의 ‘패딩 외투’가 주목받았습니다. 피해자 중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해자 학생 중 한 명이 피해자의 것인 패딩 외투를 입고 있었다는 겁니다. 거의 모든 언론에서 이 패딩에 주목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조선일보 <피해자 패딩 입고 법원에 버젓이…>(2018/11/19 권선미 기자)는 기사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가해자 학생이 뻔뻔하게도 죽은 피해자의 옷을 입고 법원에 출석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게다가 패딩 입은 피의자 사진 아래 삽입한 “정가는 30만원대이나 인터넷에서 10만원대에 판매된다”는 해당 패딩의 판매정보는 그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가해자가 저지른 범죄는 비판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피해자의 패딩을 빼앗아 입었다는 정황이 드러난 만큼 그 죄질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가해자의 비인간성만을 부각시킨 보도는 구조적 변화의 필요성을 지운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소년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게 교육 시스템과 다문화 가정에 대한 차별 등을 재점검해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도록 할 책임을 지웁니다. 하지만 ‘패딩 점퍼’같은 자극적 요소의 파급력 아래 구조적 문제를 짚는 보도가 나오는 일은 적을뿐더러 나오더라도 대중의 주목을 받기 어렵게 됩니다. 결국 우리 사회는 가해자 소년들을 처벌하는 것 이상의 조치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것만으로 저 가해자들을 배태한 한국 사회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2017년 3월 있었던 ‘인천 초등생 살인사건’의 항소심을 보도한 기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악마화 작업’은 존재했습니다. 조선일보 <인천 초등생 살해 공범, 감형에도 무덤덤>(2018/5/1 신수지 기자) 기사에서는 피고인 박씨가 “선고 시작부터 끝까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재판장만 바라봤다”, “지난 20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무기징역을 구형한 검사를 향해 ‘개XX’라고 욕을 하며 흐느끼던 때와는 대조적이었다” 혹은 “주범 김양 역시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며 피고인들이 죄를 전혀 뉘우치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치기 어린 두 아이의 반항을 굳이 전해 듣고 분노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기자는 그저 판결 결과만을 건조하게 전함으로써 법원이 제대로 된 판결을 내리고 있는지 감시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대다수 언론은 ‘패딩’이나 ‘무덤덤’처럼 불필요한 정보들까지 제공하며 대중의 분노를 펌프질할 뿐, 소년범죄 재발을 막을 구조적 대안을 제시하는 보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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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판결 받고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다’며 소년범 질책한 조선일보 기사(5/1)

 

소년범죄 관련 통념들 사실일까?

 

팩트체크 1. ‘요새 애들 예전보다 더 무섭다’? → 완전한(100%) 거짓

통계만으로 요새 아이들이 이전보다 더 흉폭하거나 잔혹해졌다고 결론 짓기는 어렵습니다. 국가통계포털 자료에 따르면 2015년까지 소년범죄는 증감을 반복했습니다. 어떤 일정한 경향성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아래 법무부 통계를 보면 이는 확연히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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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소년원에 새로 송치된 보호소년 통계(2008-2017)

 

2018년 법무연수원에서 발간한 <2017 범죄백서> 역시 소년범죄 동향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입니다. 29페이지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전체 소년범은 2007년 81,800명에서 2008년 126,213명으로 증가하였고, 2008년을 정점으로 감소 추세로 전환하여 꾸준히 감소세를 보이다가 2016년에는 전년 대비 7.0% 증가한 76,000명을 기록하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꾸준한 증가 추세가 관찰된다든지 하는 일종의 경향성이 존재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통계 외에도 증거는 있습니다. 조선일보 김명환 기자의 ‘시간여행’ 코너는 과거 기사를 토대로 옛날 한국의 생활상을 재조명하는 시리즈입니다. 그중 조선일보 <김명환의 시간여행/10대 칼부림 늘자 ‘칼 안 팔기·안 갖기 운동’... “칼로 연필도 깎지 말자” 주장도>(2018/9/5 김명환 기자)에 따르면 1960년도에는 10대 소년들이 칼부림 사고를 내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정부 차원에서 ‘칼 안 가지고 다니기’ 운동을 주도할 정도였다고 하니, 청소년들이 난폭했던 것은 비단 오늘날만의 일은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외려 인터넷과 언론이 발달해 청소년범죄 사례가 빠르고 선정적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전보다 흉포해졌다는 착시효과가 발생되고 있는 것입니다.

 

팩트체크 2. ‘미성년자들이 소년법으로 처벌을 피한다’? → 절반(50%)의 진실

미성년자들도 14세 이상이라면 처벌을 받습니다. 저지른 범죄가 금고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경우 형사재판에 넘겨져 실형을 선고받게 돼 있습니다. 법원 양형위원회 <양형기준>(2018)에 따르면, 범죄 감경사유에 ‘미성년자’가 적시된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소년범이 성인과 같은 기준으로 처벌받는 것은 아닙니다. <소년법> 제 59조와 60조에 따르면 18세 미만 소년에게 사형과 무기징역은 15년의 유기형으로 바꿔서 적용되며, 그 외 범죄에 있어서는 만 19세 미만 소년에게 최대 10년까지만 형을 선고할 수 있게 돼 있습니다. 하지만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제 4조에 따르면 특정강력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의 형량을 20년까지 늘릴 수 있게 돼 있습니다. 아무리 미성년자라도 흉악범죄를 저지르면 최대 20년까지는 형량을 채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천 초등생 살인사건의 용의자 김양(범행 당시 17세)도 항소심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죄질에 따라서는 20년 형량도 부족하다는 여론도 있는 만큼, 처벌이 약한가는 각자의 해석에 맡겨야 할 영역입니다.

 

물론 만 10세 이상부터 14세 미만의 형사미성년자는 소년법 제 4조에 따라 형사처분 대상이 되지 않고 보호처분을 받습니다. 보호처분에서 가장 강한 처벌인 ‘10호 처분’은 소년원 수감 2년에 해당합니다. 이마저도 만 12세 이상부터 14세까지만 적용 가능합니다. 지난 12월 13일 발표된 법무부안에 따르면 형사미성년자 연령은 13세로 하향될 예정입니다. 만 10세 미만의 범죄는 어떠한 경우에도 처벌받지 않습니다.

 

팩트체크 3. ‘엄하게 벌주면 범죄율 낮아진다’? → 대개(75%) 거짓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15년 형량은 안 무섭고 25년 형량은 청소년들에게 무섭게 다가가기 때문에 강력범죄를 억제할 수 있다’는 발상은 근거가 미약합니다.

국회 입법조사처 문건인 <소년법 개정 논의의 쟁점>(2017/9/25 조서연 작성자)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소년범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며 형사이송제도(juvenile transfer)를 확대하였으나, 형사 이송 후 엄격한 처벌을 받은 소년들의 재범률이 높고 재범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았다는 연구 결과가 제시되는 등 오히려 제재 강화의 부정적 결과 자료가 제시되고 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엄벌이 재범 방지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외려 빠른 재범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는 겁니다.

실제로 엄벌주의 기조를 사법체계의 근간으로 삼는 미국에서도 범죄가 억제된 바 없으며, 형사책임처벌 연령이 한국보다 현저히 낮은 영국과 호주(10세), 스코틀랜드(8세) 등에서도 여전히 소년범죄는 심각한 사회문제입니다. 아이들이 느슨한 현행법을 악용해 범죄를 저지른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기우에 불과합니다.

 

소년범죄를 다룰 때 언론은

 

‘아이다움’을 강요 말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봐야

먼저 청소년을 어떤 선입견도 없이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청소년들이 무서워진다’는 두려움은 사실 ‘아이들은 본래 착하고 순수해야 한다’는 프레임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편견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가 설정한 기준을 벗어난 아이들에 대해 더 가혹한 잣대가 작동합니다. 이미 2015년도에 불거진 바 있는 한 초등학생 시인의 ‘학원가기 싫은 날(잔혹동시) 논란’이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남자에게 남자다움을, 여자에게 여자다움을 강요하는 것이 구시대적이듯 아이들 역시 아이다워야 한다는 것은 편견입니다.

다만 성인에 비해 살아온 시간이 짧은 청소년 특성상, 인격을 형성하는 데 본인 선택보다 주변 환경이 더 결정적 요인이었을 수밖에 없습니다. 청소년들이 흉포해졌다면 그것은 아이들을 둘러싼 가정과 사회의 모습이 폭력적으로 변했음을 의미합니다. 탈선한 청소년 개개인을 엄벌하는 것보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모습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른들이 멋대로 설정한 ‘상상 속 청소년’의 모습을 벗어던지기 위해서는 기자들이 실제 청소년의 모습을 접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청소년 범죄 기사를 쓸 때 실제 10대들의 목소리를 반영시키는 과정이 우리 언론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경향신문 <‘피해자 보호 최우선, 처벌 연령 낮추는 방안도’ 의견 모아>(2018/9/5 노도현 기자)은 당사자의 목소리를 실은 좋은 예시입니다. 청소년과 학부모들로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 숙의를 거친 뒤, 토론을 통해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공론화 속 숙의과정을 통해 시민들 개개인이 잘못 알고 있던 사실들을 바로잡고, 감정적 대응보다 이성적 토론으로 결론을 도출한다면 범죄 피해자와 한국 사회에 보다 도움이 되는 대안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피해자 구제가 제대로 이루어지는지 감시할 것

소년범을 어느 수준에서 처벌할 것인지와 별개로, 범죄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은 중요합니다. 소년범죄에 의해 누군가 가족이나 생계부양자를 잃었다면 사회에 의해 심리적, 물질적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학교폭력·성폭력 등의 사건이라면 범죄 이후 가해자와 피해자가 철저히 격리됐는지, 또래집단에 의한 보복 폭행이나 따돌림은 없는지 살피는 후속조치가 뒤따라야 합니다. 진정 피해자 인권을 앞세워 가해자 엄벌을 주장하는 언론이라면, 피해자 보호가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초점을 맞춰 보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범죄 죄질이 얼마나 나빴고 가해자가 충분한 형량을 받았는지에만 집중하면서, ‘이 모든 것이 피해자 인권을 위하기 때문’이라 주장한다면 그것은 위선에 불과합니다.

엄벌이 곧 피해자를 위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명백한 한계가 있습니다. 범죄자를 강하게 처벌하면 한순간 인과응보가 성립된 것처럼 보이고, 여러 사람에게 청량감을 주는 효과는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 피해자의 삶이 나아지는 데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국가가 피해자 구제에 제대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데는 언론의 역할이 필수적입니다.

 

실효성 있는 재발방지책을 제시할 수 있어야

범죄에는 사회병리학적 원인이 존재합니다. 특히 청소년 범죄는 개인의 선택에 의한 잘못이라기보다 환경에 의한 사고로 보는 시각이 더 합당합니다. 일례로 ‘호통 판사’로 유명한 천종호 판사는 저서 <호통판사 천종호의 변명>에서 교화시스템이 고장 나 있음을 지적합니다. 소년재판에 배당된 판사 수가 현저히 적어 소년범 한명 당 3분밖에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고, 짧은 시간 내에 아이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자 호통을 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3분짜리 재판을 ‘컵라면 재판’에 빗댄 천 판사의 이야기는 소년범죄자들을 위한 한국 사법체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는 점을 고발합니다. 이것 말고도 청소년 범죄 발생과 예방 실패 원인에는 사회구조적 요소가 존재합니다. 소년범죄를 말할 때 언론은 그것이 왜 일어나며,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지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범죄 발생 후 소년범죄 가해자들의 삶을 취재한 언론이 있습니다. 중앙SUNDAY <SUNDAY탐사/집단폭행한 소녀 2명 새 꿈 찾는 데도 ‘골든 타임’ 있었다>(2018/5/19 임장혁·박민제·이유정 기자)입니다. 중앙SUNDAY는 5월 19일자 지면의 전반부 5면을 할애해 소년범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또 살아가게 되는지 취재했습니다. ‘대전 여중생 폭행사건’ 발생 2년 후 가해자와 피해자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추적했습니다. 천종호 판사의 기록을 참고해 보통의 소년범들이 어떤 배경을 갖고 살아왔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위한 법적 구제 장치 그리고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도 드러나 있었습니다. 어떻게 소년범들의 재범을 막을 수 있을지도 고민했습니다.

 

대안, 기자들은 직접 취재하라

소년범죄를 다룬 기사들을 살펴보면서, 좋은 보도와 나쁜 보도를 가르는 기준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기자와 당사자들과의 거리’였습니다. 어떤 언론들은 ‘소년범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악마적 환상을 만들기에 급급했습니다. 소년범죄 그리고 청소년 일반이 흉폭해지고 있다는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 그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황증거들을 그러모은 겁니다. 입맛에 맞게 편집된 단편적 통계자료 그리고 경찰 브리핑에서 말하는 선정적인 범죄 정황에만 기대 기사를 썼습니다. 하지만 한 발짝이라도 더 진실에 가깝고자 하는 기자들은 당사자와 그 부모들을 만나 취재했습니다. 청소년 일반의 의견도 귀담아 들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기자가 직접 소년원에 살아보고 쓴 한겨레 <소년원에서 보낸 일주일/ ‘닭장’ 같은 소년원... ‘옴’ 걸린 피부 벅벅 긁는 아이들>(2018/12/10 박준용 기자) 기사는 의미 있습니다. 12월 10일부터 사흘간 연재된 이 기획기사는 한 평에 한 명꼴로 수용되는 열악한 교정시설의 현실부터, 보호자 없는 아이들부터 소년원에 보내지는 부조리까지를 기자가 직접 체험하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뒤 기사에 담았습니다. 소년원에 수감된 아이들 대부분이 시민들의 상상과는 달리 잔혹범죄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겪어보고 쓴 기사는 시민들의 편견과 환상을 깨뜨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먹고살기 힘들 때 혹은 사회에 구조적 문제가 있을 때 사람들은 탓할 희생양을 찾습니다. 나쁜 언론은 이 수요를 이용해 종종 소수자들에게 낙인을 찍습니다. 모든 불만과 분노를 해당 집단에 집중시킵니다. 하지만 분노한다고 해서, 소수자 집단을 배척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애초에 그 집단의 잘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의 ‘헛발질’이 계속되는 사이 구조적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정치·경제적으로 기득권을 차지한 계층의 이익은 공고해질 뿐입니다.

소수자를 향한 낙인을 거둬들일 역할도 언론에게 있습니다. 기자들이 청소년 목소리를 대변할수록, 또 직접 교류를 통해 아이들을 향한 대중들의 오해를 불식시킬수록 시민들은 이성적이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대중들이 모든 분노를 아이들에게만 쏟아내지 않도록, 언론과기자들이 각성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아이들의 잘못은 애초에 우리 사회의 잘못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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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직접 소년원 생활을 해보고 소년범들의 현실을 전한 한겨레(12/10)

 

보고서를 맺으며, 천종호 판사의 책 <호통판사 천종호의 변명> 중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특히, 요즘 보이는 비행소년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는 희생양 만들기의 전 단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찌보면 이 아이들이 우리 사회의 희생양이 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누구도 비행소년들의 처지를 대변하거나 지지해 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계속되면 훗날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자칫 잘못하면 세대 간의 단절이라는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비행소년을 상대로 시작한 일이 청소년 참정권 문제 등을 둘러싸고 전체 청소년과의 대결 구도에 이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소년비행 소식을 접할 때마다 감정을 앞세워 마녀사냥을 벌이기보다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 전체가 노력해야 한다. 저출산으로 인해 국가가 위기로 치닫고 있는데 한 명의 아이라도 더 건져 내어 올바른 시민으로 키워야 하지 않겠는가?

 

* 모니터 기간과 대상 : 2018년 1월 1일 ~ 12월 31일. 경향신문, 국민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 각 신문사 인터넷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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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작성 민주언론시민연합 신문모니터위원회 박철헌 회원

문의 엄재희 활동가(02-392-0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