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보도_
경제신문 일일브리핑(D-11)
‘유식하지만 무지한’ 정규재씨의 반(反) 대기업 자해한 유력 경제지의 논조를 오랫동안 이끌었던 언론인이 있다. 이른바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특급 경제논객’으로 불리는 인물,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방대한 지식을 자랑하는 인물. 그러나 그 유식에도 불구하고 ‘무지한’ -무식은 악덕으로 비난할 수 없으나 무지는 비난받을 악덕이라고 할 때의 무지- 인물이다. 그는 논설위원부터 시작해서 편집국 부국장, 이사대우 논설위원실장에 이어 논설고문을 맡고 있다. 그리고 프로필을 보면 2016년에는 삼성물산 등기임원 사외이사(감사위원)를 맡았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단독 인터뷰를 하면서 부쩍 유명해졌다.
그는 누구일까. 바로 한국경제신문 정규재 주필이다.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우리 사회의 경제지의 논리가 어떤 수준인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른바 ‘보수’ 진영의 경제관이 어떤 것인지를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그의 글은 지식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곧 지성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숭배하는 자유주의의 스승 하이에크가 인용해 유명해진 말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를 빌려 그를 표현해보자면 이렇다.
“무지로 가는 길은 유식으로 포장돼 있다”
논리적 비약과 왜곡으로 가득찬 글
한국경제 <정규재 칼럼/대기업이 너무 적은 것이 문제다!>(4/24 정규재 논설고문 https://goo.gl/HzflHO)는 이처럼 ‘유식하지만 무지한’ 시각을 읽을 수 있다. 이 칼럼은 정의당 심상정 후보의 ‘근로자의 기업 이익 균점권’에 대한 얘기로부터 시작한다. 필자는 이 제도는 “중세 천동설과 다를 바 없다”고 ‘판결’을 내리고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게 과학의 출발이다”고 ‘학생’을 가르칠 태세부터 갖춘다. 이어 “시장을 장사치들의 불의한 교환 과정으로 보면 불가피하게 시장 철폐를 정치의 목표로 할 수밖에 없다”고 꾸짖는다.
그는 근로자 이익 균점권이 1987년 헌법 개정 당시에도 논란이었지만 그 기원은 제헌헌법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제헌헌법 초안 작성자인 유진오가 이 용어를 헌법에 삽입하려 했던 것은 “기업은 국영기업을 기본으로 봤고, 무역도 민간무역을 원칙상 불허하는 국가독점 무역 체제를 상정했으며 민간무역은 곧 밀(密)무역인 줄 알았고 민간 대기업이라고는 본 적이 없었던 식민지 지식인의 한계였다”고 설명한다.
△ 한국에 대기업이 너무 적어서 경제 번영이 어려렵다는 정규재 칼럼(4/24)
그러나 그가 겨냥하는 것은 심상정 후보가 아니라 그가 쓴 대로 ‘대통령 당선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보이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다. 그는 문 후보의 공약과 민주당의 그동안 입법활동이 “대기업과 자본가를 적대시하는 전근대적 경제관이다”라고 비판하면서 “이런 경제관으로는 나라 경제의 앞날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금 문 후보가 내세우는 경제민주화는 제헌 헌법 당시의 소규모 식민지 경제를 재현하자는 시대착오적 정치투쟁에 불과하다”
그의 비판과 훈수는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대기업이 너무 많은 게 아니라 대기업이 너무 적다는 점이다”는 주장으로 이어져 마침내 “아, 한국에는 대기업이 너무 적다!”는 탄식으로 끝을 맺는다. 대기업이 너무 적기 때문에 “과도한 자영업, 골목에서 터지는 비명소리, 좋은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서민들의 고단한 삶”이 빚어진다면서, 또 “그런 사실을 모르고 중소기업·골목상권 보호와 대기업 규제를 떠들고 있어서 대졸 청년들이 번듯한 직장을 기대하기란 앞으로도 하늘의 별따기일 것이라면서 “국민소득 5만 달러로 가려면 그것에 걸맞은 경제지식이 필요하다”는 따끔한 가르침으로 끝난다.
극단적인 가정과 왜곡으로 범벅된 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논리의 비약이 서슴지 않고 행해진다. 이 글의 필자는 근로자 이익 균점권의 요구를 하는 것을 놓고 시장을 ‘장사치들의 불의한 교환 과정’이라고 보는 것으로, ‘시장 철폐’를 정치의 목표로 하는 것이라고 간단히 규정해버리는데, 심상정 후보나 정의당의 강령 어디에 시장은 장사치들의 불의한 교환 과정이므로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가.
그에게는 다른 많은 대선 후보들처럼 재벌개혁과 불공정 관행의 시정을 주장하는, 그러나 한편에서는 너무 친대기업적이라는 지적까지 받는 문재인 후보가 ‘대기업과 자본가를 적대시한다’고 비치는 듯하다. 그는 한국에서 250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대기업은 전체 기업의 0.2%밖에 되지 않으며 여기서 일하는 종업원 수는 전체 근로자의 19.9%로, 이는 일본의 0.6%, 25.8%, 독일의 2.1%, 52.9%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고 해 대기업이 아직 더 많이 생겨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의 이 말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는 것이지만 그의 눈에는 한국의 많은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없는 많은 이유들은 보이지 않는 것인가. 한국에서 전체 기업의 81.1%가 9명 이하의 영세업체이며 이들 업체에서 허덕이며 일하는 근로자 수가 전체의 24.2%로 일본의 14%, 독일의 6.7%에 비해 크게 높은 이유들은 보이지 않는 것인가.
그에게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편견이 보인다. 아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외면하려는 태도는 차라리 ‘집념’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당하기 전인 지난 1월 단독 인터뷰했을 때 삼성과 관련한 뇌물죄 혐의, 미르‧K스포츠 재단 관련 의혹 등 핵심 질문은 쏙 빠졌던 것과 같은 편향된 집념이다.
매우 친 대기업적인 정책을 펼친 이명박 정부 당시 총리를 지냈던 경제학자 정운찬 씨조차 동반성장위원장을 맡으면서 냈던 책 <미래를 위한 선택 동반성장>에서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배은망덕한 큰아들의 모습이 우리나라 대기업들과 닮았다”고 개탄했던 것과 같은 시각에 대해서는 이해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라도 ‘시장’을 해치는 불공정, 불합리를 교정해야 한다는 것, ‘시장 안의 반(反)시장’을 개선해야 제대로 된 시장이 형성된다는 것에 대한 이해, 혹은 이해하려는 의지는 찾을 수가 없다. 그 자신이 위의 글에서 말한 것처럼 ‘지적 게으름’인 것인가, 아니면 지적 오만인 것인가.
그는 가장 친 대기업적 논리의 전도사로 불린다. 그러나 실은 그는 오히려 대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해치는 반 대기업자로 보인다. 대기업 개혁에 대한 어떠한 요구도 거부하는 그는 결국은 박근혜와 수구 기득권 세력이 자기성찰과 개혁을 거부해 스스로 자멸했던 것처럼 대기업의 눈을 가려 결국 대기업을 해치는 자해범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기업 대변하려 하지만 오히려 해칠 것
정규재 씨는 지난달 30일 이 신문의 주필 겸 논설실장에서 논설고문으로 발령을 받았다. 논설고문은 명예직으로 실무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정 고문은 그 전전날 ‘정규재TV’를 통해 주필 사퇴 의사를 밝히며 “외부 정치권에서 회사 안팎으로 적지 않은 압력이 있었던 것 같다. 정치권에서 굉장히 나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 같다”며 외압설을 제기했다.
정씨가 오랫동안 신문제작을 이끌었던 한국경제는 유난히도 공격적인-공격적인 것을 넘어 호전적인- 친 대기업 논조를 전개해 왔다. 정씨가 2선으로 물러난 지금 한경의 논지에 어떤 변화가 올 것인지, 아직은 좀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다만 이 신문이 위의 정 고문 칼럼과 같은 날 내보낸 <사설/안 되는 게 없는 대한민국'으로 바꾸자는 경총의 고언>(4/24 https://goo.gl/1JMKaT)을 보면 그 변화가 당장에는 그리 크게 보이지 않는다.
이 사설은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되는 게 없는 나라’가 아니라 ‘안 되는 게 없는 대한민국’을 건설하자”는 경영계 정책건의서를 각 당 대선후보에게 전달한 것을 소재로 삼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2006년 처음 2만 달러에 진입한 이후 11년간 3만 달러 벽에 막혀 있는 것은 사회 전반에 반기업 정서가 퍼져 있는 데다 정부와 정치권이 투자 입지 고용 등 각 분야에서 규제 정책을 쏟아내고 있는 탓이다”고 규정한다.
그리고는 ‘일부 대기업의 과도한 임금 수준’ ‘고율의 최저임금 인상’ ‘낮은 노동생산성’ 등이 기업의 일자리 창출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어느 부문보다 노동시장의 구조 개혁이 절실하다”고 노동개혁을 주장한다.
이 사설은 전 세계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일자리 경쟁을 벌이고 있다면서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공정하고 유연한 노동시장’ 구축이 절실하다고 ‘반기업주의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대선후보들’에게 주문하며 끝을 맺는다.
개혁해야 할 것은 오로지-혹은 주로- 노동계이며, 기업의 일자리는 노동자의 자제와 저임금 감수가 있어야 창출될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끊임없이 내놓는 이 신문의 ‘공정하고 유연한 시각’은 언제나 볼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