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모니터_
KBS '이승만 특집다큐'에 대한 모니터 보고서(2011.10.5)- 이승만의 과오는 모두 “불가피했거나, 몰랐거나, 오해”
28일부터 30일까지 KBS가 방송한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초대대통령 이승만’ 3부작은 우려했던 대로 독재자 이승만에 대한 미화․찬양으로 흘렀다.
KBS가 이른바 5부작의 ‘이승만 특집 다큐’를 제작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독립유공자 단체, 4.19관련 단체, 민간인학살희생자 단체 등 시민사회는 KBS에 제작 중단을 요구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이미 역사적 평가가 끝난 ‘독재자 이승만’에 대해 6억이 넘는 돈을 쏟아 부어 다큐를 제작한다는 자체가 ‘이승만 되살리기’ 의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앞서 6월에 방송된 친일파 백선엽 찬양 다큐, 뉴라이트 세력 등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승만 우상화’와 ‘역사 뒤집기’ 시도는 시민사회의 이 같은 우려를 증폭시켰다.
그러자 KBS는 “이승만의 공과를 모두 다룰 것”이라며 3부작 다큐의 제작과 방송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KBS가 내놓은 ‘이승만 다큐’의 실상은 시민사회의 우려대로 이승만에 대한 미화와 찬양이었다. KBS는 이승만의 ‘공’은 최대한 부각한 반면 ‘과’에 대해서는 모두 ‘불가피한 일’, ‘이승만은 몰랐던 일’, ‘오해에서 비롯된 일’로 해명하며 두둔했다. 이런 식으로 두둔할 수조차 없는 이승만의 과오들은 아예 침묵했다.
8.15해방 직후 이승만의 귀국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 과정을 담은 2부 ‘건국과 분단’ 역시 1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시기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주도함으로써 남북분단의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 단독정부 수립 이후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하고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해체해 우리사회에서 친일파가 뿌리내리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승만을 ‘친일파의 아버지’라고까지 부르고 있다. 그러나 KBS는 ‘반공주의자 이승만’이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냈다’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이승만을 ‘뛰어난 정치 감각’을 지닌 정치인으로 미화하는데 급급했다.
3부 ‘6.25와 4.19’에서도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장기집권을 위한 정적 살해 및 헌정유린, 민주주의 압살 등 이승만의 폭압정치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KBS는 이승만이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도움을 이끌어냈고 전후 한국의 경제와 교육 등의 기틀을 닦은 대통령으로 부각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 독립운동자금 유용 의혹
- 안중근․이봉창․윤봉길 의사의 항일의열투쟁 폄훼
KBS는 미국에서 한인들이 이승만에게 모아준 독립운동 자금의 사용처가 불분명해 유용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을 다루지 않았다. 또 이승만이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히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자 이를 “무법한 개인행동”이라고 폄훼했고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서도 ‘어리석은 짓들’이라고 폄훼하는 등 항일의열투쟁을 비난하고 조소했다는 사실도 언급하지 않았다.
KBS는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한인학교’를 세워 한글과 우리역사를 가르쳤다며 “독립에 근본이 됐다”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 ‘반일’ 내용을 전혀 가르치지 않았고 이승만이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천명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은 “우리는 어떤 반일적인 내용도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보편적인 인류애를 강조할 뿐이다. 이 지역(하와이) 일본인 신문들은 내가 반일감정을 일으킨다는 오해를 하지 말기를 바란다”<호놀룰루 스타블레틴 1915년 6월 17일, 이승만 영문 기고문 中>고 밝혔었다.
○ 민간인 학살 외면
- 제주 4․3항쟁, 여순사건 토벌 과정의 민간인 학살
- 보도연맹 사건 등 국군의 민간인 학살
제주4․3항쟁 당시 1만4천여 명이 학살됐는데 이중 80%가 토벌대에 의해 학살됐다. 희생자의 3분의 1은 열 살도 안 된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전혀 다뤄지지 않았고, 여순사건에 대해서는 ‘제주4․3사건 진압에 반발한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 반란사건’이라고 언급하며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내레이션이 전부였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도 다뤄지지 않았다. AP통신이 한국전쟁 초기 학살당한 민간인이 10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했을 정도로 이승만 정부가 남하하면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은 참혹했다. KBS는 이승만 정부 아래 저질러진 보도연맹 사건 등 민간인 학살 사건을 철저히 외면했다.
국민방위군은 1950년대 말 이승만 정권이 창설했다가 이듬해 5월 해산시킨 일종의 예비군으로 만17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자들로 편성됐다. 1951년 초 이른바 ‘1.4후퇴’에 의해 부산까지 약 15일간 도보로 후퇴하면서 처참하게 학대당해 아사․동사․병사자가 5만~10만 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들에게 주어져야 할 군수품과 보급품 예산(현금 23억, 쌀 5만2천섬)은 방위군 간부들이 횡령․착복했는데, 이들이 착복한 자금이 정치권, 특히 이승만 세력에 흘러들어간 정황증거가 포착되었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는 김윤근 등 방위군 고위간부 5명을 총살하는 것으로 사건을 급하게 무마했다. KBS는 이런 의혹에 대해 “그즈음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거액의 예산을 착복해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사건이 발생한다”고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 버렸다.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46시간 만에(6.27새벽2시) 이승만은 심야특별열차를 타고 남하 해 대전에서 ‘서울사수 거짓말 방송’을 했다. 당시 이승만은 자신이 서울에 남아 방송을 하는 것처럼 꾸몄고, 북한군에 패해 퇴각하는 상황이었는데도 “아군은 이미 의정부를 탈환했다”, “서울시민은 안심하라”고 국민을 속였다.
이에 대해 KBS는 “이승만이 대전에서 서울사수 방송을 한 다음날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다”며 “방송을 믿고 남아있던 시민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상황 이었다”고만 언급하고 넘어갔다.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비호를 받았다는 의혹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내용이다. 안두희는 종신형을 선고 받은 지 석 달 만에 15년으로 감형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포병장교로 복귀했다가 53년 완전 복권되는 ‘특혜’를 받았다.
그러나 KBS는 김구 선생 암살 사건에 대한 ‘이승만 배후설’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2부 말미에 김구 선생이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했고 그 배후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승만에게 김구의 죽음은 가장 큰 동지이자 경쟁자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는 자막을 내보내는데 그쳤다.
2. 교묘하게 왜곡하고 두둔한 이승만의 과오들
KBS는 이승만이 테오도르 루스벨트 면담 시 스스로를 ‘일진회 대표’라고 언급한 데 대해 “이 시기(1905년) 일진회는 친일단체가 아니었고 미국과 같이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 대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허동현 경희대 교수)이라는 인터뷰를 통해 이승만을 감쌌다. 하지만 일진회에 독립운동가들이 가담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미 1904년 후반부터 친일단체로서 본질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1905년에는 명확히 친일단체였다.
KBS는 이승만이 장일환·전명운 의사의 재판 통역을 거부한 것도 적극 감쌌다. 장일환·전명운 의사는 1908년 ‘한국인들이 일본의 지배를 원하고 있다’는 거짓 기사를 기고한 ‘스티븐슨’을 암살한 독립운동가다. 그런데 ‘독립운동’을 한다던 이승만은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의 재판 통역마저 거부한 것이다. 이승만의 이런 처신은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천명한 ‘의거’를 단순히 ‘살인’이라고 평가절하하고 ‘종교적’ 이유를 앞세워 그들을 외면했다”는 비판이 샀다.
그러나 방송은 이승만의 처신이 “사실은 미국 내 여론 때문이었다”면서 암살에 대한 미국사회의 여론이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를 구구하게 설명했다. 또 “미국 중심의 현실적 사고를 가졌던 이승만은 늘 자신의 선택한 것이 옳다고 믿었다”, “이러한 선택 때문에 이승만은 그의 정치 역정에서 종종 비판이나 오해를 받게 됐다”는 내레이션을 입혀, 이승만의 행보를 ‘현실적 사고’로, 이에 대한 비판을 ‘오해’인 양 다뤘다.
이승만의 이른바 ‘대통령 참칭’ 논란에 대해서도 KBS는 ‘오해’로 몰았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각국에 서한을 보내 안창호 선생 등으로부터 “대통령 행세를 하지 말라”는 질책을 받았다. 당시 이승만은 대통령 명칭을 바꾸지 않겠다며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알려지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은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떠들지 말라”는 적반하장격의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KBS는 영어로는 국무총리나 집정관총재도 미국식으로 번역하면 ‘프레지던트’가 된다면서, 이승만의 대통령 참칭 논란을 번역하는 과정에서의 ‘해프닝’ 쯤으로 취급해 버렸다.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추진은 한반도 남북의 분단을 영구히 하는 것으로 당시 대다수 국민들과 정치세력은 단정 수립에 반대했다. KBS는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를 추진하던 시기 38선 이북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을 두고 “임시법령 제정권을 가진 사실상 정부의 탄생”이라고 설명하며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수립 주장을 정당화했다. 또 이승만이 46년 6월 정읍 발언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처음 밝혔다며 “미소를 중심으로 양분된 국제정세상 이들이 합의하에 통일정부가 수립되기란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면서 “권력욕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고 반공반소에 대한 신념이 단정론에 투영됐다”(홍용표 한양대교수)고 이승만의 신념으로 띄웠다.
또 “이승만 박사가 없었다면 남한의 정부수립을 계속 추진하는 세력은 사라졌을 것”(양동안 한국한 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단정이)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발족시키고 자유민주주의를 헌법정신으로 했다”, “북한과 소련이 반대하던 상황에서 나라가 세워지고 살아남았다”(이인호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등 뉴라이트 진영의 왜곡된 주장을 담은 인터뷰를 실으며 단정 추진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해체시켜 버렸다. KBS는 이승만의 반민특위 해체에 대해 당시 중국이 공산화 됐고,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이 계속됐다면서 “이승만은 반민특위보다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과 체제전복을 위한 활동을 막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홍용표 한양대교수)고 두둔했다. 이어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친일파를 지지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반민특위 무력화에 나섰다는 반론을 덧붙이긴 했지만, 명백하게 잘못한 반민특위 해체를 ‘해석의 차이’로 몰아가는 것 자체가 이승만의 과오를 물타기 하는 효과를 낳았다.
KBS는 이승만이 친일파들을 청산하기는커녕 요직에 등용한 데 대해서도 “새로운 국가건설에 필요한 인력의 부족 때문”이라고 감쌌다. ‘장관들이 부처운영방법을 잘 모르고 있어 내각이 엉망’이라는 이승만의 일방적 주장을 전하며 친일파 등용을 ‘인재난에 허덕이던 이승만의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몰아간 것이다.
KBS는 민간인 학살 사건 가운데 유일하게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다뤘는데, 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체계적으로 훈련되지 않은 병력들이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저지른 사건”(양영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당시 국군이 ‘빨치산 소탕’을 위해 ‘빨치산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 자체를 없애버린다’는 상부의 방침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KBS가 언급한 것 같이 전쟁 중 벌어진 ‘우발적 범행’이 아니었다.
‘발췌개헌’은 이승만이 자신의 재선을 위해 직선제 개헌을 강행하며 벌어진 헌정유린 사건이었다. 1950년 5․30 선거에서 야당이 압승하면서 간선제였던 당시 대통령 선출방식으로는 이승만이 재선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정부는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그런데 당시 국회에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상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자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 정부안과 내각책임제 국회안을 발췌․혼합한 누더기 개헌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1952년 7월 경찰과 군인들이 국회를 둘러싼 강압적인 상황에서 국회의원들의 기립투표 방식으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KBS는 발췌개헌에 대해 “이승만의 당면 목표가 나라를 지켜내는 것이었고 통일을 시키는 것이었는데 이를 이루기 전에 임기가 끝나는 상황이었다”며 “이승만이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미국을 가장 잘 알고 국제정세를 알고 미국을 상대할 수 있는 건 본인이라고 여겼다. 실제로도 그랬다”(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며 이승만이 나라를 지키려는 신념으로 발췌개헌을 밀어붙였다는 주장을 폈다.
KBS의 ‘사사오입 개헌’에 대한 두둔은 더 가관이었다. KBS는 ‘사사오입 개헌’을 ‘3선개헌’이라고 표현했다.(삼선개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1969년 개헌을 가리키는 용어다.) 더욱이 KBS는 ‘사사오입 개헌’이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잔임 기간 중 재임한다”는 “이기붕을 위한 조항”이 문제가 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사사오입 개헌’의 가장 큰 문제는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 규정을 철폐하는 것으로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안이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KBS는 이런 핵심적인 문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또 사사오입 개헌을 추진한 것도 “문교장관 등이 이승만에게 불려가 ‘수학자들의 얘기에 따르면 사사오입하면 개헌된 걸로 친다’”(이철승 전 국회의원)고 하자 이승만이 그 말에 따라 사사오입 개헌을 추진했다며 근본책임이 ‘수학자들’에게 있는 듯 다뤘다.
KBS는 이승만의 최대 정적이었던 진보당 당수 조봉암에 대한 사법살인도 두둔했다. 이승만 정권은 집요한 공작으로 조봉암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사형에 처했다. 당시 조봉암을 수사했던 수사관은 1999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경무대로부터 조봉암을 잡아넣지 않으면 이승만 대통령의 재당선이 불가능하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잡아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진보당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KBS는 조봉암이 “평화통일”을 주창했는데 ‘그 때의 풍토가 무조건 무력통일을 주장해야지 평화통일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렸다’며 “원칙주의적인 비현실노선을 걷다가 참변 당한 것”(김수한 전 국회의장)이라는 인터뷰를 실으며 조봉암이 시대상황에 맞지 않는 이상론적인 주장을 펴서 사형을 당한 것처럼 몰았다. 이승만에 대한 비판은 미국이 조봉암의 처형을 막으려 했다며 “이 사건으로 우방도 민심도 잃었다”, “이승만 정부의 실책”이라는 정도의 언급에 그쳤다.
KBS는 4․19혁명으로 하야한 독재자 이승만의 최후까지도 두둔하고 감싸는데 앞장섰다. 3․15 부정선거에 항거했던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졌지만 이승만은 당시 자유당 강경파에 둘러싸여 상황을 잘 몰랐다며 “강경파가 에워싸서 사람만나고 보고받는 것을 독점”(이만섭 전 국회의장)했다는 주장을 실었다. 또 이승만이 4월 12일에야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됐지만 각료들은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이승만은 ‘선거에 문제 있다면 하야 하겠다’고 밝혔으며, 4월 19일 시위대를 향한 발포가 있은 뒤 병원을 찾아가 “울먹이며 부상자들을 위로”했다고 옹호했다.
심지어는 “이승만이 일찍이 하야했기 때문에 4․19가 성공”했다며 “이 박사가 끝까지 우겼다면 대한민국의 대혼란이 계속됐을 수 있다”(윤하정 전 외무부 장관)는 주장까지 덧붙였다.
3. 객관성·균형 상실한 ‘이승만 띄우기’
당시 이승만은 국내외에서 일고 있던 다른 독립운동 노선들과는 달리 오직 ‘친미외교’에 의존했다. 미국에게 요청해 한국의 독립을 부탁하자는 주장으로 당시 이승만의 이런 ‘친미외교’ 방식에 대해서는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KBS는 이승만의 노선에 대해서 “한반도를 노리고 있는 러시아나 일본이 아닌 미국을 파트너로 택한 선택은 탁월했다”는 교수의 평가를 붙여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또 이승만의 친미외교노선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냉정한 평가 없이 ‘이승만이 국내와 해외에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거나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됐다’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을 붙이기도 했다.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의 노선과 활동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시기 함께 활동했던 여운형, 안재형, 김규식 등의 다른 독립운동 노선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KBS는 이런 비교 평가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일하게 언급한 김구에 대해 ‘이승만보다 정치 감각은 없었던 인물’로만 그렸다. 일례로 이승만과 김구의 반탁운동을 비교하면서 김구는 반탁운동에 나서면서 섣부르게 미국을 자극해 실패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이승만은 반탁운동을 했지만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2주가량 문밖출입을 하지 않았다며 하지 사령관과의 “정면대결을 피했던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김구의 반탁은 통일정부 수립을 전제로 한 것이고,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도 불사하는 반탁이라는 점에서 질적 차이가 확연하지만 KBS 이런 차이도 제대로 짚어주지 않은 채 이승만의 ‘정치 감각’이 뛰어났다는 식으로 부각했다.
또 KBS는 이승만에게 “무엇보다 뛰어난 선동능력이 있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성이 있었다”며 이를 바탕으로 이승만을 배제하려고 했던 당시 미군정의 의도를 극복해 나갔다고 추켜세웠다.
한국전쟁 당시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2만7천여 명의 반공포로 석방을 강행했다. 당시 제네바 협정은 포로들의 본국 송환을 원칙으로 했는데 이승만은 이런 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고, 미국과 소련은 휴전협정 조인을 앞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미국에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 반공포로를 석방하며 미소 양국의 휴전협정을 방해했다.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에 대해 국가와 국민들의 안전을 볼모로 벌인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하지만 KBS는 반공포로 석방을 “이승만의 승부수”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포로의 인권을 앞세운 이승만의 조치는 무조건 본국 송환을 앞세우던 제네바 협약을 제고하는 계기가 됐다”, “북진통일을 향한 그의 의지와 신념을 전 세계에 알렸다”고 추켜세웠다.
KBS는 이승만이 휴전협정 당시 미국으로부터 2억 달러의 부흥원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을 했다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해 “북한의 재침을 방지하는 전쟁 억지력 역할을 했다”(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한미상호방위협정을 체결해서 안보를 튼튼하게 한 대한민국의 공산침략을 막아낸 호국을 이뤄낸 대통령”(이기수, 고려대 전 총장)이라고 띄웠다. 하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기반을 만든 협정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는 미군에 대한 한국의 전국토 무상공여 원칙과 일방적 주병권을 규정하고 있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불평등 조항이지만 KBS에서는 이런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문제를 일절 다루지 않았다.
KBS는 휴전 직후 이승만이 미국의 각종 경제 원조를 적극 요청해 한국의 산업발전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다뤘다. 우리경제의 대미의존도 심화와 같은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음은 물론, 이승만의 ‘외교력’을 일방적으로 띄우면서 낯 뜨거운 찬사를 보냈다.
KBS는 이승만이 미국과의 외교에서 “늘 당당했다”며 ‘북진통일론’으로 미국을 압박해 7억 달러의 군사․경제원조를 받아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협상과정에서 ‘미국 관료들이 이승만을 논리적으로 당해내지 못했다’며 “미국으로 하여금 자기를 일대 강국의 대표를 만나 협상하는 것 같은 감정을 갖도록 만든 것”(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이라고 극찬했다.
KBS는 이승만이 전력난 해소를 위해 원자력 개발에도 뛰어들었다고 전했다. 이승만이 우수한 과학인재를 모아 국비유학을 보냈고 이들이 귀국해 첫 원자로 기공식이 열렸다며 “한국 원자력 역사에 초석을 놓았다”, “우리나라 원자력이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는 근간이 되었다”(정연호 한국원자력 연구원장)며 적극적으로 띄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