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운동사]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민주언론운동협의회와 <말>지 (1)
“우리는 오늘 언론을 박탈당한 캄캄한 암흑시대를 살고 있다. 말할 권리, 알 권리, 알릴 권리가 인간의 천부적인 기본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에 의한 표현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의 말살로 우리는 ‘말’을 잃어버린, 침묵을 강요당한 언론부재시대를 살고 있다. 말하고 알고자 하는 인간의 요구가 있는 곳에 자유로운 표현의 권리와 수단이 보장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민중은 오늘 그 같은 기본적 권리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표현수단이어야 할 기존 언론기관으로부터도 거꾸로 지배당하고 박해당하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언론 소외를 겪고 있다.”
마치 어제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대로 말하고 있는 듯한 이 글은 자그마치 30년 전에 씌어졌다. 1984년 12월 19일 서울 장충동 베네딕도 수도회 ‘피정의 집’에서는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의 창립총회가 열렸고 위에 옮겨 온 글은 언협 ‘창립선언문’의 첫머리 부분이다. 민언련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언협의 탄생, 해직언론인들의 꿈이 영글다
언협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단체가 아니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 정권이 언론의 자유를 새까맣게 말려 죽이던 시절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언론 자유를 외치며 들고일어난 기자들이 있었고, 1980년 천여 명이 넘는 언론인들을 거리로 내몬 ‘언론인 대학살’이 있은 뒤에도 언론 자유는 언젠가 반드시 이뤄 내야 하는 꿈으로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언협은 해직언론인들이 오랫동안 숨죽인 채로 간직해 온 꿈을 자양분 삼아 땅 위로 솟아 오른 빛나는 새싹이었다.
유신 독재보다도 더 모진 신군부의 독재를 견뎌 오던 민주화 운동 일꾼들은 1982년 무렵부터 다시 조금씩 활동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운동 단체들이 생겨났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힘들을 한 줄기로 모아 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등 굵직한 단체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특히 민민협과 국민회의가 한 몸이 된 민통련은 1985년 창립되어 이후 80년대 민주화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협은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민주교육실천협의회(민교협),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한출협)와 함께 ‘문화 6단체’로서 민통련에 가입한 단체이기도 했다.
“1984년 봄에 동아투위와 조선투위가 무슨 공동 행사를 한 끝에 뒤풀이 자리에서, 지금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80년해직이 따로따로 있는데 그렇게 분산되지 말고 우리도 언론 단체를 하나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 뒤로 몇 번 모여 논의를 하면서 언협의 틀을 잡았죠. ‘민주언론운동’은 당연한 얘기였고. 거기다가 각 단체들이 공동으로 만든다는 뜻의 ‘협의회’를 붙여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만들었어요. 송건호 선생님을 의장으로 모시되 공동대표를 각 단체에서 한 명씩 뽑았어요. 김인한 동아투위 위원장, 최장학 조선투위 위원장, 김태홍 80년해직 회장, 김승균 인문사회과학서적 출판인모임 대표, 이렇게 네 명이 초대 공동대표였죠.” (성유보 전 언협 사무국장)
“처음에 동아투위, 조선투위, 80년해직 세 단체에서 협의를 하다가 아무래도 출판 쪽이 언론과 가장 가까우니까, 게다가 당시는 사회과학 서적 판금조치나 압수조치가 빈번했거든요. 그래서 출판계와도 함께 해보자 하는 얘기가 됐어요.
언협을 설립하기까지 두 가지 고민이 있었어요. 첫 번째는 동아투위, 조선투위, 80년해직 모두 해직언론인들이 만든 단체여서 신입회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거예요. 즉 폐쇄돼 있는 단체였죠. 젊은 일꾼들이 새롭게 들어올 수 있도록 열어 놓지 않으면 더 많은 시민들과 연대할 수가 없었어요. 두 번째는, 각 단체들이 힘을 합치면 더 큰 힘을 모아 새로운 언론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언론운동을 해 온 세 단체에 출판운동 하는 사람들까지 합쳐 언협을 만든 거죠.” (신홍범 전 언협 실행위원)
언협은 12월 10일 서울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발기인대회를 열고 12월 19일 창립총회를 열면서 역사적인 첫 발짝을 떼었다. 반민주, 반민중, 반민족적인 정권과 끈질기게 싸워 온 해직언론인들의 뜻이 마침내 영그는 순간이었다.
1984년 12월 19일 서울 장충동 피정의집에서 열린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창립총회
“당시는 신군부 독재 정권이 노골적으로 탄압하던 시기여서 창립총회 장소 빌리기도 어려웠어요. 그런데 그즈음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민주화 운동 단체들을 많이 도와줬어요. 유인물도 찍어 주고. 책도 내 주고. 그 수도회에서 하는 장충동 피정의 집에 조그마한 강당 하나가 있었는데 거기서 창립총회를 했죠. 그 장소를 빌려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총회를 하려면 현수막도 내걸어야 하는데 요즘처럼 쉽게 만들 수가 없었죠.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창립총회’라고 써 달라고 누구한테 부탁했다가 신고라도 하면 다 잡혀 들어가는 형편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모조지에 연필로 글씨를 쓰고 먹물을 칠해 그걸 잘라서 테이프로 이어 붙였어요.” (신홍범)
창립총회에는 언협 발기인들과 회원들 말고도 문익환 목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김근태 민청련 의장 등 많은 이들이 참석해 새롭게 시작되는 언론운동에 힘을 실어 주었다. 총회를 통해 의장과 공동대표, 사무국장, 감사를 임명했고 네 개 단체에서 두 명씩 실행위원을 뽑았다.
창립총회 임원 명단
의장 : 송건호
공동대표 : 김인한 최장학 김태홍 김승균
사무국장 : 성유보
감사 : 이경일 나병식
창립총회 실행위원 명단
동아투위 : 윤활식 이부영
조선투위 : 신홍범 성한표
80년해직 : 노향기 박우정
출판 : 김도연 이호웅
창립총회 자료집 표지와 언협 규약
민주․민족․민중 언론을 향한 디딤돌, <말>지의 탄생
실행위원회는 첫 회의에서 세 가지 사항을 결정한다. 첫째, 제도언론에 맞서는 독립된 언론매체를 창간한다. 둘째, 민주화 운동 세력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한다. 셋째, 문화예술단체들과 함께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나선다. 이 가운데 언협이 가져가야 했던 가장 중요한 사업은 역시 매체 창간이었다.
“언협이 만들어지고 나서, 언론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당연히 논의 주제가 됐어요. 해직언론인들과 문화인들이 연합한 단체였으니 우리만의 독립된 매체를 제대로 만들어 보자고 이야기했죠. 매체를 만들되 노동, 농민, 여성, 국제 등 부문별로 종합하는 저널이 되게 하자. 그러면 이름을 뭘로 지을 것인가?” (박우정 전 <말>지 편집장)
“실행위원회가 2월 초쯤에 매체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논의했어요. 송건호 의장은 ‘민주언론’을 제안했고 다른 실행위원들은 ‘민주통신’을 추천했어요. ‘말’은 신홍범 위원이 생각해 낸 이름이었죠. 장 폴 사르트르의 작품 중에 <말>이 있기도 했고, 이름에 ‘민주’가 들어가면 전두환 정권이 혹독하게 탄압할 것이 뻔하니 중립적인 ‘말’이 더 좋겠다는 주장도 있었어요.” (성유보)
언협의 매체 <말>지는 1985년 6월 15일 처음 세상에 나왔다. 송건호 의장이 쓰고 <말>지 창간호에 실린 ‘창간사’의 첫머리를 보면 왜 매체의 이름이 ‘말’이 되었는지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말다운 말의 회복’. 진실을 알고자 하는 다수의 민중들에게 이 명제는 절실한 염원이다. 오늘의 우리 말은 우리 말 본래의 건강성을 오염시키는 무리들에 의하여 있어야 할 자리를 올바로 찾지 못한 채 심각히 표류하고 있다. 거짓과 허위, 유언비어가 마치 이 시대를 대변하는 언어인 양 또 하나의 폭력으로 군림하고 있음은 우리가 처해 있는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1985년 6월 15일 발행된 <말>지 창간호 표지.
같은 해 5월 23일부터 26일에 걸쳐 있었던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진을 표지로 썼다.
당시 언협 사무실은 서울 마포경찰서 맞은편 골목에 있었는데 3층짜리 건물의 2층을 자실과 반씩 나누어 썼다. 자실 총무를 맡고 있던 김정환 시인은 그 인연으로 <말>지 창간호에 ‘축시’를 써 주기도 했다.
가야한다 우리들 두 귀에 죽창과 여린 팔다리뿐이더라도
가야한다 우리들 두 눈에 찢기고 찢긴 망막의 피눈물뿐이더라도
쓰러져 시야가 갈수록 흐려지는 피투성이 희망뿐이더라도
가야한다 우리들의 눈은 다시 태양이 되고 싶다 우리들의
귀는 다시 수풀이 되고 싶다 우리들의 입은 다시 벼이삭 벌판이
되고 싶다 가야한다 우리는 허리 다친 반병신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므로 바로 지금, 이곳에서
바로 지금, 이곳에서
가야한다 <말>이여 민주언론이여 우리들의 성한 온몸이여
- 김정환 시인의 <말> 창간 축시 ‘바로 지금 이곳에서’ 일부
언협의 젊은 간사로 최민희와 우찬제가 들어왔다. 언협 간사는 적지 않은 일들을 해 나가야 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말>지에 기사를 쓰는 일이었다. 사무국 간사로는 김원옥, <말>지 편집 및 디자인에는 당시 민중미술운동을 하던 장진영 화백과, 자실에서 간사를 했던 이화영이 있었다. 우찬제가 개인 사정으로 떠난 뒤에는 정봉주, 정수웅, 배시병 등이 들어왔다. <말>지 초대 편집장은 민청련 회원이자 ‘공동체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던 김도연이었는데 최민희와 김도연이 주로 간사들을 추천했다.
신군부 독재 정권 시절 당연히 <말>지는 ‘불법’ 매체였다. 경찰과 기관원들이 마포 언협 사무실을 허락도 없이 들락거리는 형편이었으니 <말>지를 사무실에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언협 간사들은 김태진과 성한표 등 해직언론인들의 자택이나 여관들을 옮겨 다니며 밤을 새워 가면서 <말>지를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장진영 화백과 둘이서 <말>지의 기본 편집 틀을 잡았어요. 외국 잡지들을 많이 참고했죠. 노동, 농민, 국제, 여성 등 부문별로 나누어 편집했는데 당시 한국에서 나오는 잡지 중엔 그런 잡지가 하나도 없었어요. 장진영 화백은 창간호까지만 했고 2호부터는 제가 맡아서 편집을 했어요.
그때는 사식(寫植)으로 작업했어요. 기자들이 원고를 써 오면 제가 교정 교열을 보고, 글자 크기나 자간, 행간 등을 원고에 다 표시해서 ‘사식집’에 갖다 줘요. 그러면 사식집 직원들이 활자들 박힌 유리판에서 카메라로 활자를 당겨 와 글자를 박고 인화지를 만들죠. 그 인화지를 다시 우리가 받아 하나하나 오려서 방안대지에 붙이는 거예요. 대지는 마분지 같은 하얀 종이인데 눈금이 박혀 있어서 수치에 따라 정확히 붙일 수가 있었어요. 색깔까지 지정한 대지가 나오면 그걸 인쇄소에 넘기고, 인쇄소에서는 우리가 만든 대지를 다시 필름으로 편집해 만들었어요. 그 필름으로 만든 동판이 나오면 종이에 바로 인쇄하는데 그걸 옵셋인쇄라고 불렀죠.
을지로 쪽에 운동 단체들의 유인물을 찍어 주는 인쇄소들이 몇 있었어요. 거기서 웃돈 얹어 주고 밤에 몰래 급하게 작업했어요. 밤에 인쇄소 근처에 트럭 세워놓고서 인쇄하고 제본하고, <말>지가 나오면 트럭에 실어 새벽에 배포하러 가고, 배포 도와주던 사람이 자기 차를 가져와서 직접 가져가기도 했어요.” (이화영 전 <말>지 편집인)
“편집이 다 되면 그 다음엔 인쇄소를 정하는 게 문제였어요. <말>지 창간호 만들 때는 우리가 전에 거래한 곳도 없었고, 아무래도 처음이니 인쇄소에 무작정 믿고 맡길 수도 없었죠. 그래서 처음부터 아예 대지를 두 개씩 만들어 갖고 있었어요. 만일 압수당하면 나머지 하나로 만들면 되니까. 1985년 5월 하순쯤에 영등포경찰서 옆 인쇄소에서 <말>지 창간호 인쇄를 했는데 인쇄료도 다 지불하고 차에 실어서 나오니까 문 앞에서 경찰들이 우릴 딱 잡더라고요. 누가 밀고한 거예요. 창간호 3천부가 그냥 날아갔어요. 그래서 숨겨 놓은 다른 한 부로 다시 인쇄해서 6월에 창간호를 냈어요.” (성유보)
즉 <말>지를 만드는 일은 신군부 독재정권의 손발이었던 경찰들과 기관원들과의 치열한 숨바꼭질이었던 것이다. 편집 작업실뿐만 아니라 언협 사무실도 경찰의 눈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을 때는 절대로 본명을 이야기하면 안 되었고 <말>지 기사에도 기자의 이름을 넣을 수 없었다. 심지어 언협 간사들은 저마다 가명을 썼다.
“창간호 작업 막바지였어요. 창간호에 들어갈 자료들을 가방 속에 잔뜩 넣고 조선일보사 근처를 지나다가 사복경찰들의 불심검문에 걸린 거예요. 그때 만일 가방 속 자료들이 경찰들에게 걸렸다면 제가 잡혀가는 건 물론이고 창간호도 못 나왔을 텐데, 다행히 사복경찰이 제 가방을 뒤지기 전에 먼저 신분증을 보자고 했어요. 당신이 누군데 내 신분증을 보냐고 물으니 동대문서 경찰이라고 했죠. 여긴 중부경찰서 관할인데 왜 당신이 여기서 이러느냐고 따지니까 옆에 있던 경찰이 귀찮았는지 그냥 보내 주라고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우찬제 전 <말>지 기자)
“강남에 있던 성한표 선생님 댁에서 작업 끝낸 대지를 신문지에 싸서 쇼핑백 속에 넣어 가지고 나왔어요. 기자들이랑 마포 사무실로 지하철 타고 가는데 어느 순간 보니 쇼핑백이 없는 거예요. 지하철 타기 전에 들렀던 분식집에 두고 나온 거였죠. 경찰이 쇼핑백을 열어 보면 큰일 나는 상황이 됐어요. 만일 잃어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하니 저는 사무실로 곧장 갔고, 다른 기자들은 분식집으로 돌아갔어요. 다행히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 채로 분식집 한구석에 그냥 있었죠. 정말 하늘이 노래진 순간이었어요. 한번은 대지를 차에 싣고 가다가 차가 도로 한가운데에 멈춰 서서 식은땀만 흘리고 있는데, 교통경찰이 와서 걸릴 뻔한 적도 있었고요.” (이화영)
“어느 날 사무실에서 원고를 펼쳐서 보고 있는데 키가 크고 어깨가 큰 40대 남자가 불쑥 사무실로 들어왔다. 형사라고 하기엔 너무 돌쇠 같이 생긴 남자여서 우리는 그자가 형사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다만 해직언론인 선배 중에 저렇게 생긴 사람도 있나 하는 생각이 스쳐 갔을 뿐이다.
더욱 더 그러했던 것이 마침 구두를 벗고 사무실 소파에 눕듯이 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 원고를 넘기고 있던 성유보 사무국장이 오랜 지기라도 만난 듯 반갑게 그 사람을 맞이했기 때문에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원고를 읽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남자가 돌아가고 나서 성 사무국장이 이렇게 말했다.
‘여긴 안 되겠는데. 옮겨야겠어.’
우리는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형사예요?’
‘마포서 우리 담당이야.’
‘......’
우리는 잠시 입을 벌리고 앉아 있었다.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게, 빼앗길 원고를 그대로 든 채 성 사무국장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 언협 소식지 <시민과 언론> 1998년 1․2월호에 실린 최민희(전 언협 간사)의 ‘언협야사’ 일부
대학을 다니며 학생운동을 하던 언협 간사들은 선언문이나 성명서는 쓸 줄 알았지만 기사를 제대로 쓰지는 못했다. 그런 간사들에게 기사 쓰는 법을 가르쳐 준 이들은 김도연 편집장과 함께 <말>지의 ‘데스크’ 역할을 했던 해직언론인들이었다. 조선투위 백기범을 비롯해 경향신문 해직 출신인 홍수원, 박우정, 박성득, 표완수 등이 ‘속성 기자교육’에 힘쓰며 언협의 젊은 간사들을 제대로 된 기자로 만들었다. 해직언론인들은 <말>지의 기사를 직접 쓰기도 했다.
“<말>지는 당시 운동 단체에서 나오던 매체들 중 가장 세련된 잡지였어요. 다른 단체에서 나오는 것들은 기사라기 보다는 선언문이나 성명서에 가까워서 일반 독자들이 읽기엔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죠. 그런데 언협에서 나온 <말>지는 기존 언론들과 똑같은 기사체로 제작했어요. 물론 담긴 내용은 전혀 달랐지만 기사체로 작성해서 내니 일반 독자들이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었어요. 제도권 언론에는 절대로 실리지 않는 소식들이 기사체로 보도되니까 여러모로 굉장히 반응이 좋았죠.” (박우정)
1985년 6월 15일, 교보문고에 <말>지 창간호 30부가 깔렸지만 하루 만에 다 팔려 나갔다. 다시 50부 주문이 들어와 또 교보문고에 보냈지만 마찬가지로 하루 만에 다 팔렸다.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에서 교보문고에 더는 <말>지를 갖다 놓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 왔다. 언협이 출판등록을 하지 못한 탓에 김도연 편집장의 공동체출판사 명의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말>지 창간호는 그렇게 초판이 매진되고 재판에 재판을 거듭해 결국 8천부를 찍었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부수였다.
“새로운 언론기관은 기존 언론기관이 개인 또는 소수의 언론기업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소유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참다운 민주언론을 갈망하는 모든 민중들이 출자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표현기관을 창설하는, 그리하여 민중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움직이는 그런 민중의 표현 기관이 될 것이다.”
- <말>지 창간호 제언 ‘새로운 언론기관의 창설을 제안한다’ 일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