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체제와 신군부 군사독재 시절 언론운동의 흐름 (2)
등록 2014.06.02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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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운동사]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유신체제와 신군부 군사독재 시절 언론운동의 흐름 (2)



                                               민주언론시민연합



1975년 3월에 차례로 쫓겨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들은 각각 조선투위와 동아투위를 조직해서 자유언론 선언 운동의 뜻을 끝까지 지켜내고자 했다. 그리고 조선투위와 동아투위는 유신 독재 시절을 꿋꿋이 견디고 있던 수많은 언론인들에게 진정한 언론이 걸어가야 하는 길을 일러주는 이정표 역할을 했다. 1979년 경향신문 해직기자이자 전 월간 <말> 편집장 박우정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975년의 동아투위와 조선투위는 기자들에게는 언론자유운동의 원형(原型) 같은 사건입니다. 후배 기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쳤어요. 제가 1975년 말에 경향신문에 들어갔는데, 동아투위와 조선투위에 동조하지 않고 그대로 언론계에 남아 있는 선배들은 대부분 부채의식이나 자괴감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떤 선배들은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이야기 꺼내는 것도 터부시하고는 했죠. 그 이야기를 하면 자신의 약점과 치부가 드러나니까요. 저도 선배 한 명이 1975년 동아와 조선의 상황을 이야기해 줘서 알게 됐어요.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건 같은 건 알고 있었지만 동아 기자들이 회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웠고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자세히 몰랐습니다. 참언론이란 무엇일까, 언론의 자유란 또 무엇일까 하는 것들을 책을 통해서 알게 되기보다는 동아와 조선의 선배들이 벌인 자유언론 투쟁 이야기들을 전해 들으면서 더 생생하고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죠.” 


조선투위와 동아투위는 ‘부당해고 철회’와 ‘전원 복직’을 외치며 집회를 열거나 유인물과 소식지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꾸준히 활동을 이어 갔다. 그리고 당시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한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들과 함께 연대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특히 1978년 10월 24일 동아투위는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을 맞아 지난 1년간 언론사들을 통해 보도되지 않거나 왜곡 보도된 사건들을 묶어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 사건일지>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9호를 내세우며 동아투위 위원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1975년 5월 13일 유신 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선포한 긴급조치 9호



“한국의 모든 신문들은 동아와 조선 해직 사건 이후로 본격적으로 제도 언론에 포섭됐습니다. 언론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죠. 게다가 기자들에게 주는 월급도 대폭 올랐어요. 기자들의 가난한 상황이 정권에 대한 반대 운동을 촉발하니 기자들 잘 대접해줘야 한다고 정부에서 압력을 넣은 게 틀림없습니다. 그 당시 기자들은 언론인이 아니라 정권의 홍보 수단에 지나지 않았고 정권은 그런 기자들을 당근과 채찍으로 길들였어요. 해직됐다가 복직한 기자들도 얼마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독재 정권에 맞서 언론자유 운동을 벌인 사례는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신홍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뒤 한 6개월 동안은 날마다 회사 앞에서 침묵시위를 했어요. 동화면세점 뒤에 있는 여관방 하나를 잡아 동아투위 사무실로 썼죠. 밤에 만든 유인물을 다음날 아침에 나가 동아일보사 앞에서 뿌리고, 시위 끝나고 나면 각자 유인물 한 움큼씩 들고 대학교든 종교단체든 담당 구역으로 가서 또 뿌리고, 밤엔 또 새 유인물 만들고, 그걸 6개월쯤 했어요. 그러다가 도저히 생활이 안 돼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되 10월 24일과 3월 17일엔 공식 행사를 하는 것으로 했죠.” (성유보) 


1970년대 중반 이후 잇따른 정책 실패와 경제 위기로 휘청거리던 박정희 정권이 1979년 마침내 거꾸러지기까지 보도 통제는 계속되었고 언론 자유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말고도 다양한 언론사들에서 양심을 지키려는 기자들의 크고 작은 싸움이 일어났다. 


“1978년에 조선일보에서 박정희 정권의 농업 정책은 실패라는 기사를 1면으로 보도한 적이 있어요. 그 시절 조선일보는 전혀 반정부 언론이 아니었는데도 1면으로 다룬 걸 보면 그만큼 농정 문제가 심각했다는 얘기거든요. 그리고 정권 말기이기도 했고 흔들리는 유신 체제에 위기를 느껴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박정희가 그 기사를 읽고 노발대발했대요. 그래서 청와대에서 문화방송 사장한테 전화를 걸어 바로 반박 기사 내보내라고 했고 (당시는 경향신문과 문화방송이 통합돼 있었어요.) 농림부 출입기자가 기사 작성을 거부하니까 차장이 기사를 직접 썼죠. 가뜩이나 어용 신문이다 뭐다 해서 경향신문 기자들은 출입처에서 수모를 당하고는 했는데 그 기사가 1면으로 나가면서 아예 얼굴도 못 들 지경이 됐어요. 통합 1기에서 5기에 이르는 기자들이 (경향신문과 문화방송이 통합된 이후 입사한 기자들은 통합 기수로 불렀어요. 통합 1기가 1974년에 입사한 기자들이고요.) 항의문을 작성했고 다음날 편집국장 앞에서 그걸 낭독한 다음 회의실에서 농성을 벌였습니다. 결국 편집국장이 앞으론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해명했고 저희는 농성을 풀었죠. 그게 경향신문 내부에서 일어난 최초의 집단행동이었어요.” (박우정)


경향신문 기자들은 1979년 또 다시 일어서게 된다.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YH무역 노동자 한 명이 공권력이 휘두른 폭력에 목숨을 잃으면서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뉴욕타임즈와 ‘미국 정부가 박정희 강압 통치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회견을 했고 법원에서는 김영삼 총재에게 직무정지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그 사실을 보도하면서 경향신문은 다른 신문들과 달리 ‘김영삼 총재’가 아닌 ‘김영삼 씨’라 표기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YH무역 노동자들을 경찰이 강제 연행하는 모습



“김영삼 씨 호칭 문제도 있었지만 경향신문에는 그때 다른 문제들도 많았어요. 그래서 통합 1기부터 5기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다시 집단행동에 들어갔고 그 일 때문에 편집국에서 기자 3명이 쫓겨났습니다. 저도 그 중 한 명이었고요.” (박우정)


1980년, 잠시 숨통이 트이는가 싶었던 언론 자유는 5월 광주라는 끔찍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유신 체제가 무너지고 나서 다시 언론 현장으로 돌아갈 꿈에 부풀어 있던 해직기자들은 이번엔 신군부라는 한층 더 흉악한 무리들과 맞서야 했다. 


“신군부는 79년 12.12 쿠데타 때부터 이미 언론 검열을 했어요. 모든 신문과 방송은 계엄사령부에서 운영하던 검열반의 검열을 받은 뒤에야 보도를 내보낼 수 있었죠. 그래서 당시 한국기자협회 차원에서 검열 거부 운동을 벌이기로 했었는데 그게 5.18 직전이었어요. 5.18이 터지고 나서는 도저히 검열 거부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됐고요. 그래서 경향신문 편집부 기자들은 검열 받은 부분을 공백으로 처리해서 신문을 내자고 결의했어요. 얼마나 심하게 검열이 자행되고 있는지 독자들에게 알려야 한다.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 그런 뜻이 있었죠. 그래서 군데군데 공백인 채로 하루 신문이 나갔는데 그 때문에 계엄사령부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결국 편집국 간부까지 동원해서 더는 그런 식으로 신문을 만들지 못하게 했고, 공백 부분을 다른 내용으로 채워 신문을 만들게 했어요.” (박우정)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