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체제와 신군부 군사독재 시절 언론운동의 흐름 (1)
등록 2014.05.21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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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운동사]"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유신체제와 신군부 군사독재 시절 언론운동의 흐름 (1)



민주언론시민연합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



선언을 선언답게 만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선언은 무엇을 또는 누구를 겨누고자 하는지 뚜렷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하며 겨누어지는 대상의 뿌리부터 뒤흔들 수 있는 가장 날카롭고도 중요한 이야기를 반드시 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조건이 있다. 선언은 그것이 겨누고자 하는 대상에게 충분히 위험한 존재가 되어야 함과 더불어, 선언 자체도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 대상이 퍼붓는 모진 해코지 속에 선뜻 자리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재산이든 가정이든 목숨이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는 것이 아닌 허울뿐인 선언은 무대 위에서 배우가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신 독재 시절이 그랬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그 어떤 선언이든 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을 향해 옳은 목소리를 냈다간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누구나 알고 있었던 시절, 군홧발과 주먹질과 고문마저도 두려워하지 않고 떨쳐 일어선 사람들이 있었다. 


언론운동사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물결이 끝없이 이어져 강물이 되듯 어떤 현장이든 어느 선언이든 한 발 앞서 깃발을 든 이들은 늘 있었다. 강물처럼 흘러 온 그 정신은 선배에서 후배로 전해지며 언론운동사라는 크나큰 흐름을 만들었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동아일보에 들어간 게 1968년 12월이었는데 그때 막 ‘신동아’ 사건이 일어났어요. 차관을 너무 많이 들여왔다, 그렇게 들여온 차관이 정치 자금으로 새는 것 같다, 그런 내용을 신동아에 실었다고 박정희 정권이 기자들 다 끌고 가서 조사했죠. 신입으로 처음 갔을 때부터 난리가 아니었어요. 결국 기자들 몇 명이 잘렸고, 내가 생각했던 언론과 지금의 언론은 전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됐어요. 그 뒤로 3선 개헌이니 유신이니 연이어 터지며 언론 자유는 완전히 죽어 버렸죠. 정부 기관에서 나온 사람들이 기사 크기와 제목까지 일일이 간섭하던 시기였으니까요.” 


동아일보 해직기자이자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이기도 한 성유보의 이야기다.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갖가지 나쁜 짓거리들을 고스란히 이어 받아 똑같이 되풀이했다. 언론 탄압도 그 중 하나였다. 1971년에는 정권의 언론 통제를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독재 정권의 꽁무니만 핥는 기자들을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뒤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한국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에서 ‘외부 압력 배격’과 ‘기관원 상주 거부’를 선언한 ‘언론자유수호선언’이 잇달아 터져 나왔다. 


그러나 1972년 유신 체제로 접어들며 신문 편집권은 또 다시 정권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편집국에 도사리고 앉은 중앙정보부 요원이 기사부터 사진까지 하나하나 통제하며 기자들에게 재갈을 물렸다. 1973년에도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한국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서 보도 통제에 저항하는 성명서들이 줄줄이 나왔지만 이미 정권의 꼭두각시가 돼 버린 언론사들은 칼춤을 추며 기자들에게 징계를 내리기 바빴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은 1974년이 되자마자 긴급조치 1, 2호를 발표해 정권을 비판하는 모든 목소리들을 찍어 누르려 했다.


1974년 3월, 동아일보에서는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동아일보 사주나 경영진들은 왕조 시대 지배자들이나 다름없었어요. 그들과 맞서려면 개인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죠. 데스크에 가서 따진다 해도 잘리거나 다른 곳으로 발령 받거나 할 뿐이었어요. 그래서 노조를 만들었고, 아니나 다를까 회사에서는 노조 간부 10여 명을 다 잘라 버렸습니다. 우리도 박정희 시대를 오래 겪어 봤으니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맞섰죠. 잘릴 것을 대비해 비상대책위원회를 3차까지 만들었어요. 1차는 다 잘랐고, 2차는 반은 해직에 반은 무기정직을 시켰어요. 3차 대책위 때는 대체 왜 노조를 탄압하느냐고 회사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걸었는데 1975년에 조합원들이 다 쫓겨나면서 결국 미제 사건이 되었습니다.” (성유보)


이후 동아일보 노조는 1974년 10월 24일 오전 동아일보 기자들이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에서 주된 역할을 하게 된다. 자유언론실천선언에서 결의한 세 가지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2.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3.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체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 연행이 자행되는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동아일보가 먼저 깃발을 들자 같은 날 밤 조선일보 기자들도 선언문을 발표하며 자유언론 운동에 힘을 실었다.


“그날 조선일보에서도 ‘언론 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했어요. 우리가 발표한 선언문부터 보도하라고 요구했지만 사측은 박정희 정권이 두려워 거부했고 결국 그날 밤 조선일보 기자들 전체가 철야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나오자 회사도 어쩔 수 없었는지 다음날 조선일보 서울 시내판에 3단짜리 기사로 보도할 수 있었죠. 그때 동아일보랑 조선일보 말고도 전국 35개 언론사에서 자유언론 선언 운동에 참여했어요.” (신홍범)


그러나 언론 자유를 외친 기자들에겐 가혹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1974년 12월 16일자 조선일보에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이 쓴 글이 실렸어요. 유신 체제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글이었죠. 그래서 당시 외신부에 있던 백기범 기자와 제가 편집국장에게 가서 항의했더니 국장이란 사람이 편집권을 침해하지 말라면서 저희들의 말을 무시해 버렸어요. 이후 백기범 기자와 제게 징계가 내려졌고 그 징계를 거듭 거부하니 급기야 사측에선 파면 결정을 내렸어요. 편집국 기자들 백여 명이 ‘이건 자유언론 선언 운동에 대한 억압이니 파면을 철회하라’며 철야농성을 벌이자 김윤환 편집부국장이 회사 대표로 나와 석 달 안에 저희를 복직시키겠다고 약속했죠. 하지만 석 달 뒤에도 파면은 철회되지 않았고 보도 통제 또한 계속되었어요. 그래서 1975년 3월 6일에 사측을 규탄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서 무기한 신문 제작 거부 농성에 들어갔고 결국 나중에는 기자들 33명이 모조리 파면 당했습니다. 조선일보 기자의 1/3 정도 되는 숫자였어요.” (신홍범)



1975년 3월 11일 회사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고 있는 조선일보 기자들



1975년 3월 6일 조선일보 기자들이 농성에 들어가기 전에 발표한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기자 본연의 사명을 다할 것을 다짐하면서 언론 자유의 쟁취를 위한 역사적인 대열에 전 사우들이 함께 참여할 것을 촉구한다.

2. 백기범, 신홍범 두 기자의 부당 해임을 즉각 철회하라.

3. 10·24 선언 이후 기자들의 자유언론 실천 노력을 외면하고 백·신 두 기자의 복직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 편집국장을 비롯한 편집국장단은 인책 사퇴하라.


동아일보 기자들 역시 비슷한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1974년 연말, 광고주들이 더는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않겠다며 갑자기 하나 둘 발을 빼기 시작했고 동아일보의 살림은 순식간에 어려워졌다. ‘광고 탄압’을 과연 누가 지시했는지는 아직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동아일보 기자들을 눈엣가시로 여긴 박정희 정권 시절이었음을 생각하면 정권이 압력을 가해 광고주들이 갑작스레 광고를 거두어들였다고 봐야 한다.


“광고 탄압이 이어지던 1975년 2월 말 주주총회 때 이동욱이라고, 중앙정보부에 있던 사람이 주필로 왔어요. 그 이후로 사내 유인물 제작과 집회가 죄다 금지됐죠. 노조 활동을 하지 말라는 소리였어요. 그리고 광고가 없어 적자가 너무 심하니 인원 감축을 하겠다며 부서별로 하나 둘씩 자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3월 12일부터 기자들 150여 명이 제작 거부 농성에 들어갔다가 17일에 사측이 동원한 깡패들의 손에 회사 밖으로 쫓겨났죠. 다 합쳐 168명이 동아일보에서 내쳐졌어요.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송건호 선생님도 대량 해직 사태에 책임을 지겠다며 사표를 쓰셨습니다.” (성유보)



1975년 3월 17일 새벽 폭력으로 쫓겨나기 직전 편집국에서 “자유언론만세”를 외치는 동아일보 언론인들



광고 탄압이 이어지던 시기 동아일보의 광고란은 시민들이 보내오는 ‘의견 광고’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 중 몇 가지를 보자.


자유의 횃불을 밝히는 기름 한 방울의 성의를 표한다 (1975.1.8 경남 창녕군 아미사 하도암)


동아의 고통은 바로 우리 자신의 아픔입니다. 힘을 내어 용감히 싸워주십시오. 돼지저금통을 깨어 푼돈이나마 성금으로 보내드립니다. (1975.1.10 서울 유엔빌리지에 사는 한 애독자)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여백을 삽니다 (1975.1.18 밥집 아줌마)


예수가 현대에 살아 있다면 그의 직업은 목수가 아니라 신문기자일 거야 (1975.1.25 백양로에서)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1975.1.31 어느 경북대 교수)


재벌의 아내였다면 좀 더 큰 지면을 살 것인데... (1975.2.8 전남여고 7회 4인)


같이 죽고 같이 살자 좋다 좋아 (1975.2.15 한국을 사랑하는 카나다인 9명)


그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시오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입니다 (1075.2.28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광주대교구 사제 일동)


화학 조미료와 아이스크림을 멀리하고 동아일보를 가까이 합시다 (1975.3.7 최희숙)


동아! 너의 붓이 곡예를 하지 않는 한 우리는 너의 고난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미주리대학 유학생 10인들)


동아일보 기자들이 점거 농성을 하는 동안 편집국 간부들은 한국일보나 조선일보, 서울신문 같은 곳에 가서 신문을 만들었다. 사측이 동원한 깡패들은 망치를 들고 나타나 창문과 문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며 기자들을 회사 바깥으로 내동댕이쳤다. 유신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들과 재야인사들이 현장으로 달려왔지만 쫓겨난 기자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