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운동사] 민언련 약사(略史)로 보는 언론운동사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민언련 약사를 시작하며
민주언론시민연합
“언론의 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하기 위한 자유야. 그럴 수밖에 없지.”
2014년 2월 6일 ‘민언련 약사 발간 자문회의’ 자리에서 신홍범 전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이 툭 던진 이 한 마디 말로 우리의 언론운동사는 갈음될 수 있다. 언론운동이란 간단히 말해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하기 위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지난 2월 6일 민언련 사무실에서는 '약사 발간 자문회의'가 진행되었다.
멀게는 이승만과 박정희부터 가깝게는 이명박과 박근혜까지 줄줄이 늘어서 있는 우리 현대사 속 독재자들은 돈 많고 힘 있는 무리들의 자유를 중요하게 여겼을 뿐 수많은 민중들의 자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탕 쥔 어린애처럼 권력을 절대 놓지 않으려 했던 그들은 당연히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하기 위한 자유’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고, 그러기 위해선 때로는 어르면서 때로는 으르대면서 언론을 어떻게든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한국 언론의 역사를 다룬 어느 책이라도 펼쳐 보라. 해방 이후 지금껏 갖가지 이름을 내건 언론사들이 나타났다 사라져 갔지만 그것들이 존재한 방식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의 편에 서서 세상이 더는 변하지 않기를 바라든가, 힘없는 이들의 편에 서서 세상이 조금이라도 달라지기를 바라든가.
신문이든 방송이든 세상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순간 중간은 없어진다. 언론은 겉으로 드러내든 드러내지 않든 누군가를 편들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신선처럼 하늘 꼭대기에 올라앉아 누구도 편들지 않고 점잖은 체만 할 것이라면 굳이 언론인 노릇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한국 언론의 역사는 언론의 자유를 위해 권력과 맞서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인 ‘언론운동사’와 언론의 자유를 끊임없이 망가뜨리며 제 낯짝에 침을 뱉은 못난 언론들의 ‘언론훼손사’로 나뉜다. 안타깝게도 언론운동사와 언론훼손사는 한국 언론사라는 한 몸뚱이의 두 얼굴이다.
적어도 겉으로는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듯한 지금은 어떨까? 흔히 ‘조중동’으로 묶이는 ‘수구언론’들은 여전히 능구렁이처럼 도사리고 있고 ‘한겨레’와 ‘경향’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진보언론’들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버티고 있다. 인터넷이 퍼진 이후로는 크고 작은 ‘대안언론’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싸워야 할 상대는 예나 지금이나 서슬 푸르게 살아있건만 자본과 상업성이라는 보호색으로 꾸민 그들은 여간해선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진보언론’조차 때로는 자본의 눈치를 보며 눈을 감고 입을 닫는다.
우리 바깥에 적들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존재하던 시절과 달리 어느새 적들은 우리 안에 침투해 또 다른 우리가 되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언론운동사와 언론훼손사가 뒤섞여 흘러가던 시대로 먼 훗날 기억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먼 훗날의 이야기는 그때 가서 생각하도록 하자. 이제부터 우리는 ‘언론훼손사’에 물들지 않고 그 무엇에도 타협하지 않은 채 자신의 삶을 던져 가면서까지 ‘언론운동사’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 볼 것이다. 물론 모진 시절을 꿋꿋하게 살아 낸 모든 이들을 두루 아우를 수는 없으니 민언련의 첫 단추였던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가 처음 깃발을 꽂은 순간을 기준으로 삼아, 그때 그곳에 모여 독재 정권의 언론 탄압에 맞선 이들의 이야기부터 하나씩 풀어 보려 한다.
그리고 그 전에, 언협이 생겨날 무렵 우리 언론을 둘러싸고 있었던 환경은 어떤 모양새였는지, 나아가 우리 언론은 해방 이후 어떤 역사를 거쳐 왔는지를 짤막하게나마 짚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리 언론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롯한 많은 신문들이 보여주었던 짓거리들을 지금껏 끊임없이 되풀이해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신문이든 어쩔 때는 권력자들에게 대들기도 했고 어쩔 때는 권력자들 앞에 넙죽 엎드리기도 했다. 지금은 정권의 사냥개나 다름이 없는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도 한때는 짱짱한 결기로 무장한 ‘조선 민중의 벗’이었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권력자들과 마찰을 빚는다. 민중들이 이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여기도록 만들려면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추악한 일들을 숨기거나 거짓으로 꾸며야 하기 때문이다. 용감한 언론인들은 숨김과 거짓에 맞서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자연히 떨쳐 일어서게 되고, 권력자들은 정해진 순서처럼 무슨 수를 써서든 ‘괘씸한’ 기자들을 모조리 내쫓아 버린다. ‘깨끗해진’ 언론사는 용기 있는 기자들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권력자들의 앞잡이가 되고 만다.
일제 강점기 내내 (물론 그 이후에도) 그런 일들이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누구나 알다시피 일제가 물러난 뒤에도 일제가 남겨 놓은 더러운 것들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치워지지 않았다. 일제가 떠난 자리엔 미군정이 들어섰고 일제와 친하게 붙어먹던 이들이 미군정의 손에 이끌려 다시 언론사 윗자리에 앉았다. 미군정은 미국 정부의 방침에 거스르는 언론들을 무척 싫어한 나머지 일제가 조선 언론을 길들이기 위해 만든 악법(광무신문지법)까지 되살려 많은 신문들을 때려잡았다.
이윽고 미군정을 등에 업은 이승만이 한국 정부의 첫 대통령이 되었지만 사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반공’이라는 무시무시한 말 한마디면 누구라도 잡아들일 수 있게 된 점은 전과 달라졌다고 해야겠다.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이 언제까지고 왕 노릇을 하게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러는 와중에 언론 역시 마구 짓밟히기 일쑤였다. 경찰과 깡패들이 신문사로 쳐들어와 기자들을 두들겨 패고 난장판을 만드는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졌다. 그나마 이 당시만 해도 ‘조중동’은 아직 정권의 나팔수가 되기 전이었고 적잖은 언론인들이 자유당 정권에 맞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박정희가 나타나면서 한국 사회는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리고 여느 권력자들처럼 박정희도 언론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당근과 채찍을 고루 써먹었다. 저임금 도시노동자들의 목숨 값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인 박정희 정권은 언론사들에 뒷돈을 주거나 이런저런 혜택을 안겨 주었고 그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받아먹은 언론사들은 점점 몸집이 불어나면서 아예 대기업처럼 변해 버렸다. 이른바 ‘권언유착’(권력과 언론의 짝짜꿍)이 대놓고 저질러진 것이다. 게다가 박정희 독재 정권은 이승만 선배가 남긴 ‘반공’이라는 무기를 잊지 않고 수많은 ‘간첩’들과 ‘용공세력’들을 만들어 내며 언론인들의 숨통을 조였다. 조금이라도 정권의 입맛에 안 맞는 기사를 쓴 기자는 어디론가 끌려가 ‘배후’에 누가 있는지 대라는 협박을 받아야 했다.
당근은 먹고 싶지만 채찍은 무서운 언론인들이 독재 정권의 발밑에서 설설 기는 동안 이 넋 빠진 짓거리들을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뜻 있는 기자들은 동지들을 모아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 한국 언론운동사에 기록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와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는 박정희 정권 시절 가장 드높이 세워진 언론운동의 깃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동아일보에서 130여 명, 조선일보에서 30여 명이 해임이나 파면, 무기정직이라는 중징계를 당했다. 동아투위와 조선투위는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계속해서 활동하며 언협이 만들어질 당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언협. 이제 그 이름을 말할 때가 되었다. 광주의 피를 먹고 자란 전두환 독재 정권에 정당성이란 애초부터 없었다. 정당성 없는 정권이 어떻게든 민중들을 지배하기 위해 언론부터 휘어잡으려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일제도 그랬고 이승만과 박정희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전두환이라고 해서 독재자의 통과의례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광주 학살극을 끝낸 전두환 정권은 곧 ‘언론사 통폐합’과 함께 ‘언론인 강제 해직’을 밀어붙였고 그 와중에 1,000명 가까이 되는 언론인들이 길바닥으로 내몰렸다. 그 이후 한결 ‘깨끗해진’ 언론사들은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그대로 받아 적는 선전꾼으로 전락한다.
언협은 그렇게 군사독재 정권과 언론이 ‘짝짜꿍’을 넘어 ‘한 몸’이 되어 가던 1984년에 만들어졌다. 이제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