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이 쓰고 인물과사상사에서 펴낸 책,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 책을 사두고 읽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 대선 전인 8월 19일에 나온 책이다. 당선이 확정된 날은 11월 8일이다. 이 책을 보고 미 대선을 주시했더라면 클린턴 승리 가능성 80%~90% 보도는 결코 믿지 않았을 것 같다. 이 책은 “트럼프 개인의 혐오할 만한 행태보다는 그런 행태에도 그가 인기를 누리는 이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떤 이들은 ‘히틀러’, ‘나치’,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구사하면서 트럼프를 히틀러와 동일시한다. 하지만 저자 강준만은 ‘트럼프로 인해 그 누구보다 잃을 게 더 많은 이들이 그런 반대와 저항’을 한다고 일침을 놓는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언론과 지식인들에게서 인종차별주의자, 무식하고 무지한 자, 멍청이, 또라이, 인간성이 결여된 사람들 등으로 취급받는 것에 분노하고, 그래서 트럼프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 트럼프에 대한 지지의 강도를 높여간다.”
미국인들도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정치 혐오증이 극에 달했다.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가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이들이 미국 민주당이 자신들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노동운동가 앤디 스턴은 민주당 정치인들이 “볼보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비싼 커피를 홀짝이고, 고급 포도주를 마시고, 동북부에 살고, 하버드나 예일대를 나온 리버럴”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당 힐러리는 지난 4월, 경선에서 승리한 뒤 “소득불평등을 개선하겠다”고 연설했지만 당시 힐러리가 입었던 재킷은 이탈리아 명품으로 1만2,495달러, 한국 돈으로 1400만 원짜리였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이 힐러리가 소득불평등을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까? 물론 트럼프도 평소 7천 달러짜리 이탈리아 명품 정장을 입는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는 민주당 힐러리가 공격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힐러리는 또 국제금융시장을 주도하는 대표적 기업인 골드만삭스에서 강연하고 무려 60만 달러, 한국 돈으로 6억7천여만 원의 강연료를 받았다. 그러니 힐러리가 월스트리트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펼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트럼프는 “가난한 사람들의 표에 의존하는 민주당은 그들을 계속 가난하게 놔두면 계속 표를 얻게 된다. 슬픈 역설이다” 하고 조롱한다.
미국의 정치인들은 한국의 새누리당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늘 아름답고 고상한 말, 당위적인 미사여구만 남발한다. 강준만은 그걸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표현한다. 그런 사실상, 또는 제도화된 사기 행각에 질릴 대로 질린 유권자들 앞에 전혀 다른 트럼프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그런 감언이설을 하는 정치인들을 비판한다. 때로는 욕설과 조롱을 하고, 당당하고 뻔뻔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트럼프는 사람들이 ‘정치적 올바름’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지만 감히 그걸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다며, 자신이 그들의 대변인 노릇을 하겠다고 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말하는 것’. 지지자들은 바로 그 점에 열광했다.
트럼프는 불사신이 됐다. 미국의 모든 언론이 집요하게 공격을 해도 살아남았다. 《도널드 트럼프》의 저자 강준만은 트럼프가 온갖 비난에도 끄떡없는 불사신이 된 데엔 미디어 혁명과 더불어 그 혁명에 대처하지 못한 언론의 문제가 있다고 설명한다. 기존 저널리즘의 기본 작동 방식과 메커니즘에 근본적 결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정치도 사업 하듯이 한다. 그것은 언론을 이용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언론을 활용하는 데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자신의 막말을 중계하게 해 홍보 효과를 누린다. 트럼프는 언론의 속성을 꿰뚫어보면서 그걸 이용하고 기성 언론을 조롱하고 무시하고 경멸한다. 트럼프는 이렇게 말한다.
“언론은 항상 좋은 기삿거리에 굶주려 있고, 소재가 좋을수록 대서특필하게 된다는 속성을 나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 당신이 조금 색다르거나 용기가 뛰어나거나 무언가 대담하고 논쟁거리가 되는 일을 하면 신문은 당신의 기사를 쓰게 된다. 따라서 나는 일을 조금 색다르게 처리했으며, 논쟁이 빚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내가 관여한 거래는 다소 허황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성격 덕분에 나는 아주 젊어서부터 꽤 사업 수완을 보였다. 신문이 나를 주목하게 되어 내 기사를 쓰지 못해 안달을 하게 됐다.”
<허핑턴포스트> 창립자 아리아나 허핑턴은 “트럼프는 언론이 만들어낸 셈”이라고 실토한다. 2015년 2월 25일 퓰리처상을 수상한 칼럼니스트 코니 슐츠도 ‘우리, 저널리스트들이 괴물 트럼프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반성했다. 그는 “우리는 그의 혐오스런 표현을 오락으로 다루었다. 극우에 영합한 공화당이 그를 등장시켰고 우리는 날개를 달아주었다”고 자책했다.
미국인들은 기성 언론을 불신한다. 미국인 3명 가운데 2명꼴로 언론을 부정적으로 볼 정도로 유권자들의 불만은 높고 신뢰는 낮다. 이런 가운데 ‘미디어 혁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미디어 환경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트럼프 현상’을 만들었다. 트럼프는 SNS에 능하다. 온라인에 자신이 구축한 뉴스룸으로 트위터에 700만, 인스타그램에 100만 명이 넘는 팔로어가 있다. 트럼프는 기성 언론에 논쟁거리를 던져 대서특필하게 만들었고, 트위터를 이용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이제 트럼프가 사업가이건 나치건 파시스트건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트럼프 현상’을 반면교사로 삼는 일도 중요하지만 당장 우리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야 한다. 그 가운데 주한미군 문제가 불거져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한국의 안보는 한국이 지켜라’ 하면서 ‘주한미군의 주둔 비용인 방위분담금을 한국이 더 분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니면 철수하겠다는 건데 이 나라 부패한 지배층은 벌써부터 겁을 먹는다. 지난 22일 방위사업청 장명진 청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차기 행정부가 한국에 방위비 분담 증액을 요구하면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백기 투항’했다.
미국의 수구 언론 폭스뉴스에도 대차게 맞서는 트럼프처럼 한국의 조선일보에 맞서는 정치인은 없을까?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는 트럼프에 “철수하라”고 맞설 만한 그런 대통령감이 한국엔 없을까?
글 안건모 회원·e-시민과언론 기획위원
- [2017/05/22] 질문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