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이 거세다. 한국 안에서 폭발의 계기가 된 건, 울산지청 서지현 검사가 JTBC <뉴스룸>에 나와, 8년 전 성폭력을 폭로하면서부터다. 인문학잡지 《황해문화》 작년 호에 실린 최영미 시인의 시가 조명되면서, 고은 시인의 전력이 드러나기도 했다. 최근엔, 자칭타칭 연극계의 '대부' 이윤택 씨의 성폭력 추문이 이어지고 있다. 이 글이 인쇄되어 나갈 때면 또 누가 누구를 폭로하여 세상이 시끌시끌할지 모를 일이다.
미투 운동은 용어로 보아, 미국발 여성운동으로 보인다. 허나, 한국 안에서는 몇 해 전부터 '○○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은 물론 지난한 성폭력 폭로 및 제도 개선 움직임이 있었다. 한국 사회 깊숙이, 다방면에 걸쳐, 성폭력이 뿌리내려 있음을 반증한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으로도 운동이 번져가고 있다고 하니, 인류 보편의 문제가 조금은 달라질지 지켜볼 일이다.
소크라테스가 신탁을 빌어, '너 자신을 알라'고 강조한 건 익숙하다. 자기 인식에의 주문이다. 그런데, 그가 '너 자신을 돌보라'고 했다는 말은, 아직은 생소해 보인다. 자기 돌봄/자기 배려에의 주문이다. 푸코는 <담론과 진실>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잊힌 주문을 되살리자고 제안한다. 소크라테스의 잊힌 주문이 중요한 까닭은, 바로 그 지점에서 해방의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담론과 진실』은 푸코가 1982년 5월 18일 그르노블대학교에서 행한 강연 <파레시아>와 1984년 10월, 11월에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서 진행한 강연 <담론과 진실>을 미공개된 푸코의 원고와 함께 싣고 있다. 푸코가 1984년에 세상을 뜬 걸 감안하면, 죽기 직전까지 다듬고 또 다듬어 세상에 내고 싶어 했던 목소리가 담긴 셈이다. 그는 이 책에서 '파레시아'를 총체적으로 다룬다. 파레시아란, '진실을 말하는 용기', '위험을 감수하는 말하기', '비판적 태도'를 뜻한다. 파레시아는 타자의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이는 자기 돌봄/자기 배려로 이어져 지배 체제에 균열을 내면서, 자유의 공간을 열어 놓는다.
미투 운동은 푸코가 말한 파레시아 실천과 똑 닮아 있다. 무엇보다, 진실을 말하는 용기다. 진실이란 자신과 맺는 관계에서 나온다. 어떤 권위나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자기 내면 깊숙이 울리는 어떤 목소리 또는 영혼의 울림이 바로 진실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다이몬의 명령이라고 했다. 미투의 진실은 자기 경험에서부터 나오는 영혼의 외침이다. 어떤 권위자도 그에게 폭로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미투의 권위는 폭로자 자신에게서 나오고, 이는 존재를 부정할 만큼의 용기에 바탕을 둔다. 그 이유는 파레시아의 두 번째 특징과 관련 있다.
파레시아는 독백 또는 골방에 갇힌 자기 고백이 아니다. 대중과 함께 이야기하며, 거기엔 권력을 거스른다는 특징이 있다. 권력을 거스른다는 건, 어마어마한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미투 운동의 실천가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명예 훼손 또는 무고로의 피소를 감수한다. 제2, 제3의 피해도 감당해야 한다. 미투 운동가와 파레시아스트(파레시아 실천가)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목소리를 내는 까닭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삶을 지탱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의 성숙도는 이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들려지느냐에 달려 있다.
미투 운동과 파레시아 실천의 닮은꼴은, 세상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푸코는 디오게네스를 소크라테스를 잇는 파레시아스트로 그린다. 알렉산드로 왕에 대한 디오게네스의 태도는 유명하다. 디오게네스는 자신의 목숨을 곧 앗아갈 수도 있는 왕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는 한줌의 햇볕이 삶에 절실했고 그것을 표현했다. '나의 햇빛을 가리지 말라.' 권력과 거리를 두며 자기 삶의 원천을 탐구하는 태도가 비판적 태도다. 미투 운동의 실천가 들은 말한다. '돼지들아, 꺼져 버려.'
미투 운동가들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명성의 추구가 아니라 진실에의 추구로 완성된다. 옮긴이의 해제에 있는 다음 문장을 소개하며, 파레시아라는 도구상자로 미투 운동의 의미를 찾아가는 독서 여정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
"아름다운 삶은 파레시아에 기초한 삶이 된다. 아름다운 삶, 그것은 진솔한 삶이고, 진실 속에 거주하는 삶, 진실을 위해 사는 삶이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자기 자신을 설명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정리할 수 있고, 또 실존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명성이 실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의지가 실존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푸코는 소크라테스를 통해 진실을 말하는 원리와 아름다운 삶이라는 이상이 자기 돌봄 내에서 서로 교차하게 된 시기를 재발견하려고 시도한다."(379쪽)
글 신호승 동그라미대화센터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