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_회원 인터뷰|김태진 회원
민언련과 동아투위의 어른, 김태진 의장을 만나다지금 우리 언론이 이렇게 망가진 데는 박정희의 영향이 커요. 1964년 박정희가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만들었어요. 이 법의 핵심은 언론에서 필화사건이 나면 발행인을 구속한다는 것이었어요. 이때까지만 해도 필화 사건이 나면 기자나 편집국장은 구속해도 발행인은 구속하지 못했거든요. 이 법의 의미는 이제 발행인이 편집권을 장악하고 기자들을 단속하라는 것이었죠. 전국에서 동아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대구매일 4개 신문이 끝까지 반대하며 투쟁을 이어갔죠.
졌다고 볼 수는 없어요. 너무 반발하니 잠시 잠재웠다고 봐야 해요. 이후 박정희는 더욱 노골적으로 언론을 장악했어요. 이보다 앞서 당시 한국일보도 영향력이 큰 신문이었는데, 왜 반대하는 4개 신문에 속하지 않았냐면 박정희가 이 법을 내놓기 전에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을 지금의 경제기획원 부총리로 임명을 했어요. 그게 인물을 보고 한 것이 아니라 한국일보 때문이라는 평이 많았어요.
조선일보는 사옥이 도로 변에 있었는데 도로 확장을 하면 건물이 헐리게 되어 있었죠. 박 대통령은 방 회장을 불러 차관을 100% 얻어줄 테니 그 자리에 호텔을 지으라고 했어요. 당시 이건 엄청난 특혜였거든요. 이런 당근을 줘서 조선일보를 사실상 매수한 거죠.
경향신문은 다른 방식을 썼죠. 경향신문 이준구 사장의 운영자금 가운데 일본 조총련 계 자금이 들어왔다며 반공법으로 구속했어요. 그리고 경향신문은 당시 다른 신문사보다 빚도 적었는데, 빚이 있다는 이유로 강제로 공매 처분했어요. 더 황당한 것은 공매입찰 한 곳이 기아산업이라는 회사였거든요. 그런데 이 회사가 자신들도 운영을 제대로 못 해서 산업은행에서 관리하던 기업체였어요. 그러다 보니 부실한 기업이 도대체 무슨 돈으로 신문사를 샀냐는 의문이 들었고, 기자들 사이에서 중앙정보부 자금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요즘 이명박 박근혜 때도 국정원 돈을 정권이 받았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을 보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렇게 경향신문의 주인이 기아산업으로 바뀌면서 중앙정보부에서 일일이 와서 보도에 간섭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박 정권은 68년 신동아 12월호 차관에 관한 기사와 10월호 ‘북괴와 중‧소분쟁’이란 글을 반공법 위반으로 문제 삼자,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기사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반박했어요. 그러자 수사기관에서 12월 3일 발행인 김상만 부사장을 연행할 때 정식 영장을 가져왔더라고요. 우리는 그것이 언론윤리위원회법이 다시 작동된 것으로 생각했어요.
이후 언론윤리위원회법은 88년에 없어졌어요. 하지만 언론사 사주들은 편집권을 아직까지 장악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정치권력이 언론을 길들이게 하는 관행이 우리 언론에 그대로 남아있다고 봐야 해요. 신문은 물론이고, 공영방송 사태를 보더라도 사장이 보도를 좌지우지한 셈이잖아요. 그게 이전에 없던 개념인데 박정희로 인해 우리 사회에 마치 상식처럼 관례처럼 되어버린 거예요.
또 하나 말할 것이 있어요. 당시 박정희가 광고주들을 압박해서 동아일보에 백지광고 사태가 있었어요. 그때 방송은 100% 광고가 수입원이었지만, 신문은 수입이 광고료 50 대 구독료 50이었어요. 홍승면 논설주간이 1월 10일 외신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정권에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 동아일보 발행부수가 백만 부만 돌파하면 광고 없이도 가능하다. 이건 시간문제다”라고 선언했고, 이게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어요. 그러자 동아일보는 2월 28일 주주총회를 열어 홍승면 논설주간을 해임시켜버렸어요. 홍 주간이 우리들보다 먼저 해고 당하신거죠.
아무튼 박 정권은 광고 탄압을 하면 금방 항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안됐잖아요. 내가 생각할 때, 박정희는 그때 신문사 수입원에서 광고 비율을 높여야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당시 신문은 8면이었는데 그 후에 박 정권은 신문 지면을 대폭 늘려줬어요. 지금 한국 언론은 거의 90%가 광고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광고주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언론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높은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는 이것도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박정희가 만든 언론 탄압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사법파동은 지면이 한계가 있으니 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요. 71년에 한 검사가 향응접대를 이유로 판사 등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던 거예요. 그러자 전국의 판사 150여명이 집단 사표를 냈어요. 이건 검찰이 기소한 공안사건에 대해 판사가 무죄판결을 내린 것에 대한 보복 조치라고 봤기 때문이에요. 박정희가 나서서 수습하는 모양새를 보였지만 당시 끝까지 사법부 독립을 주장하던 홍성우 등 몇 명의 판사들은 결국 사표를 냈죠. 그런데 1년 후 유신을 선포하면서 판사를 대통령이 임명하게 되었고, 박정희는 사법파동 때 앞장섰던 48명 판사에게 임명장을 주지 않았어요. 지금은 대법원장이 판사를 임명하는 것으로 바로잡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사법부가 정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볼 수 없잖아요. 여기에도 박정희의 잔재가 있다고 봅니다.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신문학과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동아에 입사 할 때는 기자가 아니라 방송국 피디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동아방송은 63년 개국이 되었는데 64년에 앵무새 사건이 터지면서 방송국 간부 6명이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그러자 신문사 편집국장을 구속시키는데 부담이 클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전까지 방송국 소속이었던 뉴스부를 동아일보 편집국 소속으로 바꿨어요. 자유언론의 의미가 담긴 것이었죠.
동아방송의 뉴스쇼는 한 사람이 앵커를 한 게 아니라 돌아가면서 했어요. 정치부장도 하고 그때 당시 사회부장 했던 김중배 선배 이런 분들이 돌아가면서 했어요. 아무튼 내가 뉴스쇼 피디니까, 동아일보의 정치부장 사회부장 경제부장 편집부국장 등을 모시고 그분들과 방송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게 참 좋았죠.
가장 기억나는 것은 그중에서 박정희가 삼선개헌을 할 때 내가 뉴스 피디로서 국회 출입기자도 아니면서 국회를 출입하면서 당시에 삼선개헌을 반대하는 민주당 국회 연설을 녹음했어요. 그리고 그걸 사실상 중계방송처럼 내보냈어요. 그게 큰 화제가 되었죠. 그래서 그 후 정부는 국회나 법정에서 녹음이나 사진을 허가 없이는 녹음하거나 촬영 할 수 없다는 규제를 만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당시 뉴스 시사를 충실히 담아낸 프로그램이었다고 생각해요. 내가 당시 이병용 변호사께 시사 논평을 자주 부탁드렸거든요. 이 변호사가 여름휴가를 부산으로 갔다가, 이틀 만에 서울로 돌아와서는 “부산에서 뉴스쇼를 들을 수 없으니까 답답해서 올라왔다”고 전화하셨던 생각이 나요.
그리고 앞서 얘기한 사법파동을 <뉴스쇼>에서 여러 차례 보도했는데 당시 몇 분의 의견을 모아 보았어요. 공화당 초대총재였던 정구영 씨는 “오늘날 행정부만 무제한으로 비대해졌고 가장 약체화한 사법부라는 점에 만감이 교차 한다”고 말하고 “나의 사견으로는 이 사건이 반드시 판사를 구속해야만 할 사건이라고 보지 않으며 기소되어야만 할 것인 가에도 의문을 품는다.” 고 하셨죠. 또 전 서울 고검 검사장 최대현 씨는 “문제는 판사의 출장비는 변호사가 조달하는 것이 현재의 관례다. 이 관례를 고려하지 않고 이범렬 씨 같은 청렴한 사람에게 문제 삼는다는 것은 검찰의 적절한 행위라고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사법파동을 회상하면, 지금 사법부의 블랙리스트가 떠오르죠.
그리고 민언련 의장
<다섯수레>는 88년에 시작했어요. 그 전에도 뜻은 있었는데, 박정희 정권이 출판을 허가제로 바꾸는 바람에 출판사를 차릴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6‧29선언 이후 허가제가 풀려서 88년에 등록을 할 수가 있었지요. <다섯수레>는 어린이 책을 하긴 하는데, 동화책은 좀 적은 편이고, 역사책이나 과학책을 많이 하고 있어요. 인문서적도 좀 있긴 있는데 많진 않고, 앞으론 인문서적도 더 해보려고 해요.
요즘 출판이 너무 어려워요. 그 배경엔 또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영향도 있어요. 정부가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책을 안 읽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치고 있었던 거예요. 이명박 정부는 영어를 필수과목으로 하면서 일제고사를 봐서 경쟁을 시키고, 애들이 전부 학원으로 몰려갔죠.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밤 9시 10시니깐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다 뺐어버렸죠. 게다가 공부를 하더라도 관련 책을 읽고 토론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교과서를 외우는 암기식 교육을 하고 있잖아요. 그건 사고 능력을 좁히는 거예요. 이러면 한국의 문화가 앞으로 점점 어려워지지 않겠어요. 애초에 우리의 교육제도가 바뀌어야 해요.
명확하게 말하면 복직을 시켜야 해요. 하루만 근무하더라도 명예를 위해서 복직되어야 해요. 배상은 동아일보도 해야 하지만 정부도 해야 하고요. 그거 받아서 우리가 무슨 부를 바라는 게 아니에요. 정의는 이긴다는 역사를 만들어놓아야 해요. 정의로운 사람이 피해를 본 것이고, 특히 정부가 거기 개입한 것이니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언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했습니다. 언론이 바로서기 위해서는 우리 문제가 해결 되어야 합니다.
나는 송건호 선생님이 경향신문에 계실 때부터 아는 사이었어요. 그리고 송건호 선생님이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계실 때 뉴스 해설이라든가, 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프로그램을 내가 했었는데 그때 송건호 선배를 많이 귀찮게 했죠. 그런 것 때문에 내가 청암언론문화재단 상임이사가 된 것 같아요. 아무튼 나는 동아에서 송건호 선생님처럼 존경하는 선배님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다는 것이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이제 아껴두고 아껴뒀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민언련에는 처음 만들어질 때 같이 하셨죠? 그리고 의장님께서는 해직언론인의 단체인 언협을 시민단체인 민언련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민언련 의장을 맡아주셨는데요. 당시 이야기 좀 해주세요.
처음 창립할 때부터 함께 했죠.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감투 맡는 걸 싫어했어요. 나는 언협의 가장 큰 일이 『말』지였다고 생각해요. 『말』지가 6·29선언이 있기까지 밑거름이 되었죠. 사실 동아투위는 해직 이튿날부터 유인물을 만들었어요. 매일 유인물을 프린트해서 각 대학이나 사회단체에 유인물들을 뿌렸었는데, 그게 영향력이 굉장히 컸죠. 이런 경험을 하면서 우리들한테는 매체가 필요하다 그런 이야길 많이 했죠. 그래서 언협이 『말』지도 만들고, 결국 그게 한겨레신문의 시발점이었다고 볼 수 있죠.
내가 언협 의장이 된 것은 그때 내가 동아투위 위원장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당시 민언련에 『말』지를 둘러싼 말썽이 생겼어요. 최민희 전 의원이 민언련 사무국장이었는데요. 동아투위가 앞으로 나갈 길을 토의하는 모임을 하고 있는데 최민희 국장이 찾아와서 선배들이 중심을 잡아주셔야 한다고 하소연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동투위원장이 맡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내가 민언련 의장을 맡은 것이죠.
내가 민언련 의장을 하면서 해놓은 건 언협을 지금의 사단법인 민언련으로 바꾼 것이에요. 나와 최민희 국장은 민언련이 처음에 해직기자 출신으로 이루어졌었지만, 이제 사회로 번져 나가려면 많은 시민이 참여해서 한국의 언론이 올바른 정론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야 민언련 생명이 이어지고 민언련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으니까요. 그러려면 시민의 후원을 많이 받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기부금 세금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단법인이 되어야겠다고 본거죠. 당시 내가 문화관광부에 쫓아다니며 열심히 설득했어요. 민언련에 보다 많은 시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범위를 확대시키는 시기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