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_회원 인터뷰|김태진 회원

민언련과 동아투위의 어른, 김태진 의장을 만나다
등록 2018.02.0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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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첫 <날자꾸나 민언련>의 표지 모델은 민언련에서 ‘의장님’이라고 부르는 김태진 선생이다. 의장님과의 만남은 늘 흥미롭다. 의장님은 만날 때마다 “이거 아니?”라며 슬그머니 어떤 역사적 사실을 말씀해주셨는데, 그게 신기할 정도로 당시 내 고민과 맞닿아 있었다. 선생님의 역사 이야기는 깨달음이 되기도 했고, 꾸짖음이 되기도 했고, 희망이 되기도 했다. 유난히 많은 변화를 모색해야 할 민언련의 2018년 1월, 나는 꼭 김태진 의장님을 뵙고 싶었다. 의장님은 오늘의 민언련에 어떤 역사를 말씀해주실까.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깨닫고 어떤 힘을 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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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언론의 폐해는
박정희 적폐의 잔재
 
오늘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주세요.

지금 우리 언론이 이렇게 망가진 데는 박정희의 영향이 커요. 1964년 박정희가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만들었어요. 이 법의 핵심은 언론에서 필화사건이 나면 발행인을 구속한다는 것이었어요. 이때까지만 해도 필화 사건이 나면 기자나 편집국장은 구속해도 발행인은 구속하지 못했거든요. 이 법의 의미는 이제 발행인이 편집권을 장악하고 기자들을 단속하라는 것이었죠. 전국에서 동아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대구매일 4개 신문이 끝까지 반대하며 투쟁을 이어갔죠.
 
그랬더니 박정희는 정부 부처에게 4개 신문을 구독하지 말고 공무원들에게도 일절 보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어요. 전국의 기자들은 “사주가 항복했지 우리가 항복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그 투쟁을 위해 기자협회도 창립했어요. 조지훈, 박두진 선생 등 당시 문화인들도 반대 성명서도 냈죠. 시민들의 반대도 거셌고, 국제신문편집자협회(IPI)까지 비판하는 저항이 계속되니까 박정희가 수세에 몰렸어요. 그러자 박정희는 중재를 통해서 이 법을 폐지하지는 않고 유보하기로 합의했지요.
 
그럼 결국 이 사건은 박정희가 일단 한번 언론인에게 졌던 사건이었네요?

졌다고 볼 수는 없어요. 너무 반발하니 잠시 잠재웠다고 봐야 해요. 이후 박정희는 더욱 노골적으로 언론을 장악했어요. 이보다 앞서 당시 한국일보도 영향력이 큰 신문이었는데, 왜 반대하는 4개 신문에 속하지 않았냐면 박정희가 이 법을 내놓기 전에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을 지금의 경제기획원 부총리로 임명을 했어요. 그게 인물을 보고 한 것이 아니라 한국일보 때문이라는 평이 많았어요.

조선일보는 사옥이 도로 변에 있었는데 도로 확장을 하면 건물이 헐리게 되어 있었죠. 박 대통령은 방 회장을 불러 차관을 100% 얻어줄 테니 그 자리에 호텔을 지으라고 했어요. 당시 이건 엄청난 특혜였거든요. 이런 당근을 줘서 조선일보를 사실상 매수한 거죠.

경향신문은 다른 방식을 썼죠. 경향신문 이준구 사장의 운영자금 가운데 일본 조총련 계 자금이 들어왔다며 반공법으로 구속했어요. 그리고 경향신문은 당시 다른 신문사보다 빚도 적었는데, 빚이 있다는 이유로 강제로 공매 처분했어요. 더 황당한 것은 공매입찰 한 곳이 기아산업이라는 회사였거든요. 그런데 이 회사가 자신들도 운영을 제대로 못 해서 산업은행에서 관리하던 기업체였어요. 그러다 보니 부실한 기업이 도대체 무슨 돈으로 신문사를 샀냐는 의문이 들었고, 기자들 사이에서 중앙정보부 자금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요즘 이명박 박근혜 때도 국정원 돈을 정권이 받았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을 보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렇게 경향신문의 주인이 기아산업으로 바뀌면서 중앙정보부에서 일일이 와서 보도에 간섭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럼 동아일보는 회유되지 않다가 동아투위 사태가 벌어진 건가요?
 
그렇죠. 정부 측에서 볼 때 다른 신문사는 사장에게 압력을 넣거나 회유가 통했는데 동아일보는 그게 안 됐죠. 기자와 간부들을 아무리 구속하고 압박해도 굴복하지 않았어요. 동아일보에는 발행인이 편집권에 간섭할 수 없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죠.

박 정권은 68년 신동아 12월호 차관에 관한 기사와 10월호 ‘북괴와 중‧소분쟁’이란 글을 반공법 위반으로 문제 삼자,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기사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반박했어요. 그러자 수사기관에서 12월 3일 발행인 김상만 부사장을 연행할 때 정식 영장을 가져왔더라고요. 우리는 그것이 언론윤리위원회법이 다시 작동된 것으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김상만이 연행된 뒤 굴복한 배경은 다른 데 있었어요. 동아일보가 일제 강점기 1920년에 창간할 때 한겨레신문처럼 국민들이 돈을 내서 만든 신문이거든요. 일본 총독부에 의해 40년에 폐간되었다가 45년에 복간하면서 김성수가 자기랑 형제들 이름만으로 주주가 이루어 졌다는 거였어요. 중앙정보부가 옛날 그 주주들 주식을 내놓으라고 협박한 거죠. 그러자 김상만이 신문사를 뺐길까봐 항복하고 천관우 주필과 홍승면 국장, 손세일 부장을 해임시켰어요. 박정희는 이런 식으로 주요 신문을 모두 장악한 거죠.

이후 언론윤리위원회법은 88년에 없어졌어요. 하지만 언론사 사주들은 편집권을 아직까지 장악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정치권력이 언론을 길들이게 하는 관행이 우리 언론에 그대로 남아있다고 봐야 해요. 신문은 물론이고, 공영방송 사태를 보더라도 사장이 보도를 좌지우지한 셈이잖아요. 그게 이전에 없던 개념인데 박정희로 인해 우리 사회에 마치 상식처럼 관례처럼 되어버린 거예요. 

또 하나 말할 것이 있어요. 당시 박정희가 광고주들을 압박해서 동아일보에 백지광고 사태가 있었어요. 그때 방송은 100% 광고가 수입원이었지만, 신문은 수입이 광고료 50 대 구독료 50이었어요. 홍승면 논설주간이 1월 10일 외신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정권에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 동아일보 발행부수가 백만 부만 돌파하면 광고 없이도 가능하다. 이건 시간문제다”라고 선언했고, 이게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어요. 그러자 동아일보는 2월 28일 주주총회를 열어 홍승면 논설주간을 해임시켜버렸어요. 홍 주간이 우리들보다 먼저 해고 당하신거죠.

아무튼 박 정권은 광고 탄압을 하면 금방 항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안됐잖아요. 내가 생각할 때, 박정희는 그때 신문사 수입원에서 광고 비율을 높여야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당시 신문은 8면이었는데 그 후에 박 정권은 신문 지면을 대폭 늘려줬어요. 지금 한국 언론은 거의 90%가 광고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광고주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언론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높은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는 이것도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박정희가 만든  언론 탄압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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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언론탄압하면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정수장학회인데요.
 
맞아요. 그것도 빼놓을 수 없죠. 박정희가 61년에 군사쿠데타 일으키면서 제일 먼저 손댄 게 언론이었어요. 박정희가 부산 지역에서 사령관을 했거든요. 그걸 하면서 언론의 4‧19혁명 당시 언론의 역할을 목격 했던 것이에요. 당시 마산 앞바다에 최루탄을 맞은 김주열 열사 시신이 떠올랐는데, 이걸 부산일보가 처음 보도했어요. 그리고 마산시위가 엄청 크게 있었는데, 문화방송 이동방송차가 이 현장을 중계를 했어요. 부산일보의 김주열 열사 사진 보도와 문화방송의 시위 중계방송은 부산이나 마산 쪽에 청취자들에게 큰 자극을 주면서 그게 4‧19로 번지는데 큰 힘을 줬어요.
 
박정희는 이 상황을 지켜봤고, 5‧16쿠데타 이후 언론장악부터 생각한 거죠. 그래서 부산일보와 문화방송을 사실상 뺏어버렸어요. 게다가 언론사가 뭘 잘못해서 압류를 했다면 국가가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박정희 개인이 5‧16 재단을 만들어서 강도처럼 훔쳐갔죠. 현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 설립자인 김지태 씨의 유족이 정수장학회와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정부가 김지태 씨의 신체와 재산에 해악을 가할 것처럼 위협하는 위법행위를 한 것은 인정하고 김 씨의 증여 의사표시는 강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다면서도 증여 의사표시를 무효로 할 수는 없다고 판단을 내렸단 말이에요.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면 뒤집기 어렵기 때문에 상고를 포기했다고 하는데요. 나는 지금도 특별법을 개정해서라도 문화방송의 박근혜 주식은 몰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다보니 정말 우리 언론 속에 관행화되어있는 박정희 잔재를 바로알고 바로잡자는 운동을 진행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박정희의 잔재를 말한다면 빼놓을 수 없는 게 하나 더 있어요. 72년 이전에는 판사를 대법원장이 임명했거든요. 그런데 박정희가 71년 1차 사법파동 이후, 유신헌법을 만들면서 판사를 대통령이 임명하게 바꾸었어요. 게다가 판사가 파면 당했을 때는 변호사 자격증까지 박탈하기로 했어요. 그야말로 판사들이 권력이 지시하는 데로 하라는 겁박인거죠.

사법파동은 지면이 한계가 있으니 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요. 71년에 한 검사가 향응접대를 이유로 판사 등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던 거예요. 그러자 전국의 판사 150여명이 집단 사표를 냈어요. 이건 검찰이 기소한 공안사건에 대해 판사가 무죄판결을 내린 것에 대한 보복 조치라고 봤기 때문이에요. 박정희가 나서서 수습하는 모양새를 보였지만 당시 끝까지 사법부 독립을 주장하던 홍성우 등 몇 명의 판사들은 결국 사표를 냈죠. 그런데 1년 후 유신을 선포하면서 판사를 대통령이 임명하게 되었고, 박정희는 사법파동 때 앞장섰던 48명 판사에게 임명장을 주지 않았어요. 지금은 대법원장이 판사를 임명하는 것으로 바로잡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사법부가 정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볼 수 없잖아요. 여기에도 박정희의 잔재가 있다고 봅니다.
 
최초의 종합뉴스
동아방송 <뉴스쇼> 피디
 
선생님 개인의 이야기를 해봐요. 선생님은 언제 어떻게 언론사에 들어가게 된 건가요? 언제부터 기자의 꿈을 가지게 되셨나요?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신문학과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동아에 입사 할 때는 기자가 아니라 방송국 피디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동아방송은 63년 개국이 되었는데 64년에 앵무새 사건이 터지면서 방송국 간부 6명이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그러자 신문사 편집국장을 구속시키는데 부담이 클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전까지 방송국 소속이었던 뉴스부를 동아일보 편집국 소속으로 바꿨어요. 자유언론의 의미가 담긴 것이었죠.
 
그리고 67년 프로듀서 몇 사람이 뉴스부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동아일보 편집국 뉴스부 기자이면서 뉴스 피디를 했어요. 그 당시 뉴스는 아나운서가 전달했지만 기자가 마이크를 통해 직접 뉴스를 전한 것도 동아방송이 처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나라 최초의 뉴스 피디일거예요. 
 
지금까지 선생님은 동아투위이니 신문기자였다고 생각했어요. 선생님께서 피디셨다니, 그것도 뉴스 피디라니 정말 놀라워요. 라디오였던 거죠? 몇 시에 했어요? 몇 시간 방송이에요? 그러면 지금처럼 방송기자들이 따로 있었어요? 아니면 신문사 기자들이 출연한건가요?
 
동아방송에서 종합뉴스 형태로 기자들이 참여하는 <뉴스쇼>라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시작한 라디오 뉴스 프로였고, 아침 8시에 시작해서 30분 정도 했죠. 큰 사건이 터지면 다음 프로그램을 줄이고 더 길게 편성하기도 했어요. 동아방송 청취 가능한 지역이 천안 정도까지였지만 청취율은 전국 1~2위를 했습니다. 아나운서가 전하는 종합뉴스도 동아방송이 처음 시작했어요. 뉴스쇼에 참여하는 기자는 뉴스부 기자가 중심이었지만 동아일보 기자들이 모두 참여했지요.
 
지금 말씀을 들어보면 <손석희의 시선집중>, <김어준의 뉴스공장> 같은 영향력을 가졌을 것 같아요. 게다가 지금은 다른 통로로 뉴스를 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전무후무했다는 거잖아요. 대표적 진행자가 있었나요?

동아방송의 뉴스쇼는 한 사람이 앵커를 한 게 아니라 돌아가면서 했어요. 정치부장도 하고 그때 당시 사회부장 했던 김중배 선배 이런 분들이 돌아가면서 했어요. 아무튼 내가 뉴스쇼 피디니까, 동아일보의 정치부장 사회부장 경제부장 편집부국장 등을 모시고 그분들과 방송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게 참 좋았죠.

가장 기억나는 것은 그중에서 박정희가 삼선개헌을 할 때 내가 뉴스 피디로서 국회 출입기자도 아니면서 국회를 출입하면서 당시에 삼선개헌을 반대하는 민주당 국회 연설을 녹음했어요. 그리고 그걸 사실상 중계방송처럼 내보냈어요. 그게 큰 화제가 되었죠. 그래서 그 후 정부는 국회나 법정에서 녹음이나 사진을 허가 없이는 녹음하거나 촬영 할 수 없다는 규제를 만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당시 뉴스 시사를 충실히 담아낸 프로그램이었다고 생각해요. 내가 당시 이병용 변호사께 시사 논평을 자주 부탁드렸거든요. 이 변호사가 여름휴가를 부산으로 갔다가, 이틀 만에 서울로 돌아와서는 “부산에서 뉴스쇼를 들을 수 없으니까 답답해서 올라왔다”고 전화하셨던 생각이 나요.
 
가장 기억나는 보도는 무엇이었나요?
 
김대중 납치사건 보도죠. 외신을 통해 일본에서 DJ가 누군가에게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뉴스쇼 시간에 단독 보도했어요. DJ가 생환되어 자택으로 돌아온 날 밤 11시에도 단독 보도를 했고요. 그날 밤 김대중 선생이 기자회견을 했었는데요. 김대중 선생이  납치되어서 배에 실렸을 때 팔 다리를 묶고 무거운 것을 몸에 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어요. 이제 수장되는구나 생각하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데 배 위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크게 들리면서 그 소리가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배위를 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죠. 그 시간이 길었다고 느꼈는데 묶여있던 자리가 바뀌고 묶음이 풀렸다고 말씀하셨죠. 나는 김대중 선생의 육성 녹음을 밤새 편집해서 다음날 아침 8시 뉴스쇼 시간에 45분 동안 전했어요. 후일 일본 측 함정과 비행기가 DJ가 탄 배를 추격하고 미국 측이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죠.

그리고 앞서 얘기한 사법파동을 <뉴스쇼>에서 여러 차례 보도했는데 당시 몇 분의 의견을 모아 보았어요. 공화당 초대총재였던 정구영 씨는 “오늘날 행정부만 무제한으로 비대해졌고 가장 약체화한 사법부라는 점에 만감이 교차 한다”고 말하고 “나의 사견으로는 이 사건이 반드시  판사를 구속해야만 할 사건이라고 보지 않으며 기소되어야만 할 것인 가에도 의문을 품는다.” 고 하셨죠. 또 전 서울 고검 검사장 최대현 씨는 “문제는 판사의 출장비는 변호사가 조달하는 것이 현재의 관례다. 이 관례를 고려하지 않고 이범렬 씨 같은 청렴한 사람에게 문제 삼는다는  것은 검찰의 적절한 행위라고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사법파동을 회상하면, 지금 사법부의 블랙리스트가 떠오르죠.
 
영화 <1987> 보셨어요? 영화에서 동아일보 기자가 박종철 씨 고문을 폭로하잖아요. 영화 속에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의 분위기가 묘사되는데요. 선생님들 내쫒은 신문사지만 그래도 87년에 동아일보가 저렇게 기자정신이 살아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던데요. 어떻게 보셨어요?
 
<1987> 봤어요. 감옥에 갇혀 있던 동아투위 이부영 씨가 박종철 씨를 고문으로 살해한 내용을 취재해서 의식 있는 교도관을 통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죠. 그리고 우리가 쫓겨나오기 전 동아일보는 언론인 지망생, 타사 언론인들이 가장 가고 싶은 언론사였죠. 예전 동아일보는 수습기자를 뽑지 않고 다른 회사에서 유능한 사람들을 경력기자로 채용하곤 했어요. 최근에 작고하신 장행훈 선생이 동아일보 1기 공채 기자거든요. 그 이전엔 모두 경력기자로 들어온 거죠.
 
무엇보다 아까 말한 것처럼 동아일보에는 발행인이 편집에 간섭을 하지 않는 전통이 있었기에 천관우, 송건호, 홍승면 선배가 동아에 오셨던 거죠. 이렇게 당시 동아는 다른 신문사보다 영향력 크고 존경받는 선배 기자들이 많은 신문사였어요. 우리가 쫓겨나긴 했지만, 그래도 안에 자유언론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도 꽤 있었어요. 그래서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도 굉장히 혼나고 해고당했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87년까지 그래도 이런 정신과 전통이 살아있었던 것 아닐까 싶어요. 
 
다섯수레 사장‧동아투위 위원장‧청암재단 상임이사
그리고 민언련 의장
 
선생님은 지금 출판인으로 더 유명하신데요. 출판사는 언제 시작하셨어요? 원래 출판에 뜻이 있으셨나요? 다섯수레 이야기, 출판하시면서 느끼는 점도 이야기해주세요.

<다섯수레>는 88년에 시작했어요. 그 전에도 뜻은 있었는데, 박정희 정권이 출판을 허가제로 바꾸는 바람에 출판사를 차릴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6‧29선언 이후 허가제가 풀려서 88년에 등록을 할 수가 있었지요. <다섯수레>는 어린이 책을 하긴 하는데, 동화책은 좀 적은 편이고, 역사책이나 과학책을 많이 하고 있어요. 인문서적도 좀 있긴 있는데 많진 않고, 앞으론 인문서적도 더 해보려고 해요.

요즘 출판이 너무 어려워요. 그 배경엔 또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영향도 있어요. 정부가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책을 안 읽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치고 있었던 거예요. 이명박 정부는 영어를 필수과목으로 하면서 일제고사를 봐서 경쟁을 시키고, 애들이 전부 학원으로 몰려갔죠.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밤 9시 10시니깐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다 뺐어버렸죠. 게다가 공부를 하더라도 관련 책을 읽고 토론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교과서를 외우는 암기식 교육을 하고 있잖아요. 그건 사고 능력을 좁히는 거예요. 이러면 한국의 문화가 앞으로 점점 어려워지지 않겠어요. 애초에 우리의 교육제도가 바뀌어야 해요.
 
선생님의 가장 큰 정체성은 동아투위입니다. 동아투위 이야기는 앞에서 많이 하셨으니 생략하고,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동아사태’에 대한 결정을 이행하기 위한 합당한 조치를 취하라는 청원을 올라왔던데요. 동아투위는 어떻게 해결되어야 한다고 보시나요?

명확하게 말하면 복직을 시켜야 해요. 하루만 근무하더라도 명예를 위해서 복직되어야 해요. 배상은 동아일보도 해야 하지만 정부도 해야 하고요. 그거 받아서 우리가 무슨 부를 바라는 게 아니에요. 정의는 이긴다는 역사를 만들어놓아야 해요. 정의로운 사람이 피해를 본 것이고, 특히 정부가 거기 개입한 것이니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언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했습니다. 언론이 바로서기 위해서는 우리 문제가 해결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청암언론문화재단 상임이사이시고, 송건호 선생님과의 각별한 추억도 많으실 것 같은데요. 

나는 송건호 선생님이 경향신문에 계실 때부터 아는 사이었어요. 그리고 송건호 선생님이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계실 때 뉴스 해설이라든가, 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프로그램을 내가 했었는데 그때 송건호 선배를 많이 귀찮게 했죠. 그런 것 때문에 내가 청암언론문화재단 상임이사가 된 것 같아요. 아무튼 나는 동아에서 송건호 선생님처럼 존경하는 선배님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다는 것이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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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껴두고 아껴뒀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민언련에는 처음 만들어질 때 같이 하셨죠? 그리고 의장님께서는 해직언론인의 단체인 언협을 시민단체인 민언련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민언련 의장을 맡아주셨는데요. 당시 이야기 좀 해주세요.

처음 창립할 때부터 함께 했죠.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감투 맡는 걸 싫어했어요. 나는 언협의 가장 큰 일이 『말』지였다고 생각해요. 『말』지가 6·29선언이 있기까지 밑거름이 되었죠. 사실 동아투위는 해직 이튿날부터 유인물을 만들었어요. 매일 유인물을 프린트해서 각 대학이나 사회단체에 유인물들을 뿌렸었는데, 그게 영향력이 굉장히 컸죠. 이런 경험을 하면서 우리들한테는 매체가 필요하다 그런 이야길 많이 했죠. 그래서 언협이 『말』지도 만들고, 결국 그게 한겨레신문의 시발점이었다고 볼 수 있죠.

내가 언협 의장이 된 것은 그때 내가 동아투위 위원장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당시 민언련에 『말』지를 둘러싼 말썽이 생겼어요. 최민희 전 의원이 민언련 사무국장이었는데요. 동아투위가 앞으로 나갈 길을 토의하는 모임을 하고 있는데 최민희 국장이 찾아와서 선배들이 중심을 잡아주셔야 한다고 하소연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동투위원장이 맡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내가 민언련 의장을 맡은 것이죠.

내가 민언련 의장을 하면서 해놓은 건 언협을 지금의 사단법인 민언련으로 바꾼 것이에요. 나와 최민희 국장은 민언련이 처음에 해직기자 출신으로 이루어졌었지만, 이제 사회로 번져 나가려면 많은 시민이 참여해서 한국의 언론이 올바른 정론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야 민언련 생명이 이어지고 민언련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으니까요. 그러려면 시민의 후원을 많이 받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기부금 세금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단법인이 되어야겠다고 본거죠. 당시 내가 문화관광부에 쫓아다니며 열심히 설득했어요. 민언련에 보다 많은 시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범위를 확대시키는 시기였죠.
 
지금 민언련에 아쉬운 점이나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민언련이 늘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진짜에요. 지금도 한국의 언론이 너무 엉망이라서 힘들 텐데. 엉망인 걸 그래도 정리를 해 주는 게 민언련이잖아요. 진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언론인이 되려고 하는 청년들에게 언론인은 무엇이다 한마디로 말씀해주세요.
 
조선 말엽에 한국에 신문이 나왔을 때, 국민들이 기자를 엄청 믿었어요. 기자들이 어디를 갈 때 인력거에 신문사 깃발을 달고 다녔어요. 이게 위엄을 나타내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때 통신 수단이 없었잖아요. 그러니 기자들은 제보를 받고 싶었고, 국민은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죠. 그때는 가두재판이란 게 있었다는데요. 동네에서 송사가 있을 때 거리에서 기자에게 갑과 을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 기자가 판단을 내려주고, 사람들은 거기에 승복을 했다는 거죠. 언론인은 예전에 그 정도로 국민에게 신뢰받고 존경받던 존재였어요.
 
언론인이 그런 존재였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하고, 실제 그런 역할을 해주길 바랍니다.
 
김언경 사무처장·사진 이병국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