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_책 이야기 | 『악의남용』

멘탈리티의 충돌
등록 2017.11.08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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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에서 일어난 엘에이 총기 난사 사건 직후, 트럼프가 티브이에 나와 한 말이 이 책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즉각 행위자를 ‘순수한 악 (pure evil)’이라고 규정했고, 여기에 단호히 맞서겠다고 선언했다. 일부 이슬람 세력은 자신들이 배후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이렇다 할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리처드 J. 번스타인은 자신의 책 <악의 남용 (The abuse of evil)>에서 바로 이 ‘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악’과 관련한 그의 주장은, 책에서 펼치고 있는 화려한 논증에 비하면 단순하다고 볼 수 있다. 악의 존재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상대를 악마화하면서 어떤 회의나 질문도 허용하지 않는 멘탈리티가 문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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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견 종교 간 충돌로 보이는 세계적 차원의 갈등과 전쟁은 깊은 층위로 거슬러가 보면 멘탈리티의 충돌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가 말하는 멘탈리티란, “우리가 세계 안에서 접근하고 이해하며 행위하는 방식을 조건 짓는 하나의 일반적인 지향 - 마음의 성향 또는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의 지적, 실천적, 정서적 삶을 만들어 가고 또 그것들에 의해 만들어진다.”(35쪽)

 

책의 출간 목적에 대해 저자는 “자신의 확신과 진지한 신념의 깊이를 단언하는 것만으로 객관적인 확실성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는”(29쪽) 멘탈리티를 비판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비판의 준거는 실용주의적 가류주의(pragmatic fallibilism)다.

가류주의란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의견이나 주장이 틀릴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구하는 멘탈리티다. 저자는 일찍부터 서구 근대 문명을 떠받치고 있는 철학을 비판해 왔다. 특히 ‘확실성’이라는 토대에 자신의 사유를 쌓아 올리고자 하는 데카르트야말로 근대적 인식의 출발로 본다. 확실하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고 불안한 현대인의 정서를 ‘데카르트적 불안’이라고 명명한다. 번스타인은 일갈한다. 

 

“역사는 폐기된 수많은 확실성들로 가득하다.”(97쪽)

누군가 ‘이론은 연장통’이라고 했다고 강남순이 말하는 걸 들은 기억이 난다. 인간에게 연장의 존재 이유는 세상에 개입할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망치는 못을 박거나 뺄 때, 톱은 나무를 자를 수 있기에 존재 이유가 있다. 가류주의라는 새로운 연장으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 생각으로는, 나의 내면과 행동 습관은 물론 공동체의 관행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이분법을 해체하면서 동시에 자유롭고 유연한 멘탈리티 문화를 일궈가는 연장이 되지 않을까 싶다. 번스타인은 묻는다.

 

“우리는 적에게 ‘악’하다는 이름을 갖다 붙이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정확히 누가 우리의 적인가?”(24쪽)

 

트럼프가 총기 난사 사건 행위자나 김정은을 악이라 이름 붙이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상대를 ‘악’이라고 꼬리표 붙이는 행위는 복잡한 층위의 실체를 단순화시킴으로써 질문을 봉쇄하고 자유로운 사유 운동을 정지시킨다. 이는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한, ‘생각하지 않는’ 인간 양산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바로 전체주의의 토대다.

 

최근 한국 사회 곳곳의 화두로 등장하고 있는 ‘적폐’ 청산의 목소리가, 상대를 ‘적폐’로 꼬리표 붙임으로써 복잡한 현실을 선/악의 구도로 단순화시키는 방향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번스타인의 질문을 원용한다면, 상대를 ‘적폐’라고 이름 붙이면서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오해하지 말 것은, 악이나 소위 ‘적폐’에 대해 회의하고 질문하고 대화한다고 해서 그들과 대항하지 않거나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상대를 악마화하여 어떤 질문도 허용하지 않는 멘탈리티의 소유자가 그들에게 질문하는 자를 조롱하기 위해 수행하는 이미지 조작이라는 게 번스타인의 주장이다. 

번스타인의 이야기는 신학자 월터 윙크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월터 윙크는 책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에서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악에 저항하여 반대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악들(evils)을 만들어 내지 않고, 또 우리들 자신이 악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

 

월터 윙크가 위에 소개한 책 서문에, ‘오늘의 세계에서 가장 긴급한 질문들 가운데 하나’라고 소개한 질문이다. 이 질문은 셋으로 이뤄져 있다. 1) 악에 저항하여 반대하기 2) 동시에 새로운 악을 만들어 내지 않기 3) 우리들 자신이 악이 되지 않기. 이중 세 번째, 즉 우리 스스로가 악이 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나머지 둘로 나아가는 바탕이 될 것이다.

 

연꽃은 진흙에 뿌리를 내려 그 화려하고 단아한 꽃을 피워낸다. 악이 판치는 세상에 뿌리내리면서 동시에 우아하고 고매한 삶의 향기를 어떻게 피워낼 수 있을까?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고통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행복하고 기쁜 삶을 일궈낼 수 있을까? 적폐가 판치는 세상에서, 거기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적폐를 양산해 내지 않고, 우리 자신이 적폐가 되지 않을 수 있는가? 긴급하고 중요한 질문이다.

 

 

신호승 동그라미대화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