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의 장편 소설 《안녕 주정뱅이》에는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두 읽어 본 결론을 말하면 한 편도 버릴 것이 없다. 단편 묶음인지라 순서대로 읽지 않고 눈에 드는 제목을 찾아 먼저 읽고(세 번째에 편집된 <이모>를 먼저 읽고 그다음에 <봄밤>을 읽었다.) 손에서 놓지 못한 채 ‘어디 이번에는…’ 하고 바로 다음, 또 다음으로 넘어갔는데, 한 번도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작가의 등단작이자 공모전 수상작인 《푸르른 틈새》가 1996년 작품이니 20년 만에 권여선 작가의 소설을 읽는 셈인데, 그 사이에 이따금 발표했으나 읽지 않았던 그의 소설들이 어떤 궤적을 그리고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7편 중에 책의 제목과 같은 제목의 소설은 없다. 그래도 ‘주정뱅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는 건 모든 작품에 ‘술’이 조연으로, 이야기의 고리를 이어가는 중요한 매개로 빠짐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앞에 붙은 ‘안녕’은 떠나보내는 인사인지, 막 만나서 나누는 인사인지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제부터 술을 끊겠다’는 부류의 착실한 인생선언은 아니란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는 아니지만(<봄밤>에 나오는 두 인물, 수환과 영경은 각각 병이 깊어 요양원에서 생활해야 하는 지경이니 제외하고) 대부분 말짱하다. 그러니까 바로 옆 옆집에 살고 있을 것 같은 인물들인데, 조금씩 기구하고 그 기구함을 자신도 모르는 새에 치명적인 것으로 몰고 간다.
결혼하고, 이혼하고, 아들 양육권 때문에 전남편 쪽과 옥신각신하다 결국 빼앗기는 여자가 얼마나 많을 텐데, 그런 여자 중 하나인 영경은 어느새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그런 영경을 말없이 받아준 수환은 전 재산을 전 부인이 들고 잠적해 신용불량자가 되고도 별 말없이 열심히 살았는데, 열심히 산 결과로 중증 류머티즘에 걸려 죽어간다. 누가 무얼 잘못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두 사람은 이유를 묻지 않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사랑한다(<봄밤>). ‘이모’ 역시 어머니 모시고 동생들 거두며 성실하게 살았는데, 청춘을 뒷전으로 미루며 벌어놓은 목돈을 몇 번씩이나 남동생 빚 갚는 데 소진했고, 더불어 생기의 대부분도 소진되고 말았다(<이모>).
문정은 사진을 배워서 찍고 싶다고 그냥 말했을 뿐인데, 그런 그의 손에 쥐여주려던 카메라 때문에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인자가 되었으며, 또 누군가는 살의를 가진 채 살아가게 되었다. 사진을 찍어 보고 싶다고 했던 건 문정이었지만 정작 그는 전혀 모르는 채로 진행된 일들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악의는 없었는데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아무도 모른다(<카메라>). 그는 그녀가 떠난 것이 자신이 숨겨 온 ‘모자란 누나’ 때문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녀가 그를 떠난 건 모자란 누나와 무관하다고 할 순 없지만 그는 전혀 짐작하지 못한 다른 이유였다(<층>).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게…”라고 한 청년은 읊조린다. 아마도 이 책의 대부분의 인물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된 것이 내 탓은 아니라고. 나는 열심히 산 죄밖에 없노라고. 우리가 흔히 그러듯이.
인간은 사소한 부주의 때문에 불행해진다
그들이 겪는 불행한 일들의 시발은 대체로 ‘부주의’ 때문으로 보인다. 그 부주의함은 사실은 특정한 맥락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부주의하다고 할 수 없었는데도 그렇다.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신다든가, 화가 나고 불안해서 욕을 한다든가, 나에게 악의가 없으므로 상대도 그렇게 여길 거라고 믿는다든가 하는 것들. 평론가 신형철이 붙여놓은 해설의 첫머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으로 시작한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은 악덕과 악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하마르티아(hamartia/과실, 과오, 착오) 때문에 불행에 빠진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인데, 그 점에 비추어 보면 이 책의 인물들은 그에 걸맞은 비극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불행에는 신(우연)의 영역과 인간(필연)의 영역이 있으며 그 둘은 모종의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 역시 생생하게 보여준다.
호의를 가지고, 그저 따뜻하게 잡아주었으면 하고 내민 상대의 손바닥을 아무 말 없이 담뱃불로 지진 ‘이모’는, 자신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생생하게 살아남은 그 장면을 여러 번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그의 손바닥을 지진 마땅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한 이모는 자신의 손바닥에 담뱃불을 댄다. 어쩌면 삶이란 그렇게 이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살아볼 테니 따뜻하게 한 번 잡아나 달라고 내민 손바닥을 무심히 담뱃불로 지지는 것 같은 일들. 그러고 나서도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으니 어리둥절한 채로, 혹은 억울한 채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하고, 생살 타는 냄새를 뿌렸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문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게’ 무엇이었을까를 묻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다.
편안하게 잘 읽히면서도(어떤 문장들은 곱씹기 위해 몇 번을 되풀이 읽게도 되지만) 묘한 품위가 느껴진다는 점에서 이 책의 소설들은 숙련된 장인의 솜씨로 천을 짜고 실을 뽑아내 맵시 있게 바느질한 옷들처럼 보인다. 언제 어디서 꺼내 입어도 좋을 것이다.
글 김경실 이사
- [2017/05/22] 질문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