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내 마음 속의 소나무 한 그루(2016.8.)
등록 2016.07.28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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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내 마음 속의 소나무 한 그루

 

 

 

 

 

 

 

 

 

 

 

 

 

장해랑 이사,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교수

 


지난 주말 학교에서 예비언론인들을 위한 캠프를 열었다. 방학마다 열리는 캠프에는 미래 이 나라의 언론을 짊어지고 갈 동량들이 모여, 1박 2일 동안 언론의 현실과 정도를 배우고 기자와 피디로 살아갈 자세와 정신을 가다듬는다.


첫날 강의가 끝나는 밤 11시에 사귐의 시간이 이어졌다. 자기소개, 상식을 겨루는 스피드게임, 팀별 여흥이 끝나고 술잔이 일 순배 돌았을 때, 참가자들이 고민을 토로했다. 기약 없는 언론고시에 대한 불안과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관한 것이었다. 언론고시생들의 방황은 당연하지만 올해의 느낌은 더 절박했다. 당연했다. 언론사들이 어려워지면서 신입사원 채용을 줄이거나 아예 뽑지 않으면서 고시는 더 힘들어졌고, 현재 언론의 행태를 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작년에 졸업한 P가 떠올랐다. 졸업반이었던 그는 목표로 했던 방송사 입사에 실패하고 울면서 전화했다. 그와 술잔을 기울이며 현업에서 좌절했을 때 겨울 설악산에서 독야청청 푸르던 소나무를 만나고 다시 기운을 차렸다는 경험을 들려주었다. P는 설악산 소나무를 찾아 생전 처음 혼자 여행을 떠났다.


P가 목숨 걸었던 방송사는 KBS였다. 그의 꿈, 공영방송사 KBS는 지금 세월호 사고가 터졌을 때 청와대와의 통화 녹취록으로 또 한 번 망신창이가 되었다. 세월호만이 아니다. KBS를 보면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 세상의 아픔, 부조리,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만의 리그, 지금 공영방송은 민주주의와 세상소통을 방해하고 저해하는 족쇄며 걸림돌이다. 무서운 것은 우리 사회가 이 땅에 공영방송이 과연 필요한가라고 질문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공영방송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본질적으로 의심받는 상황에 처했다.


방학하고 반 년 만에 P를 다시 만났다. 여전히 KBS 시험 준비 중인 그는 씩씩했다. P는 겨울 설악산을 오르며 소나무를 찍어 보내며 묻곤 했지만 내가 말한 소나무를 찾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에게 말했다. 내 소나무는 중요하지 않다, 네가 만난 그 나무가 너의 소나무다.


캠프 참가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다 마지막 강의시간에 방송작문 과제로 받은 학생 글 셋을 복사해 나누어 주었다. 과제 제목은 ‘방송(신문)이란 무엇인가, 피디(기자)란 누구인가’였다. 장차 이 땅의 언론을 책임질 학생들에게 언론의 역할과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철학적 고민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낸 과제였다.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토론했던 그 주제와 느낌을 예비언론인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다.
‘36.5와 37사이’는 우리 몸의 체온에 관한 글이다. 우리 체온은 몸속 심부온도를 일컫는데, 체온이 아래로 내려가면 손발이 차가워지고 심하면 동상으로 몸을 잘라낸다. 생존을 위해서다. 반대로 체온이 상승하면 열병으로 집단사망이 일어난다. 이 글을 쓴 학생은 언론은 사회의 현재 온도를 재는 체온계로, 사회의 건강성을 알려주는 신호라 은유했다. 1998년의 IMF, 현재 진행되는 구조조정은 사회온도가 내려간 상황이고, 세월호는 사회온도가 상승했던 사고라고 학생은 진단한다. 뜨거운 것에 뜨겁지 못하고 차거운 것에 차갑지 못한 체온계는 수은 덩어리일 뿐이며, 언론은 권력에 차고 약자에 뜨거운 체온계여야 한다고 말한다.


나머지 두 카피는 ‘피디란 누구인가’에 대한 글이었다. 글 제목은 ‘21세기의 일리야 레핀’과 ‘현장을 뛰는 지장보살’이다. 일리야 레핀은 근대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다. 그의 대표작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19세기 후반 러시아 혁명기의 한 가족 상황을 리얼하게 그려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혁명가 주인이 초췌하고 누더기 모습으로 10년 만에 식구들 앞에 나타난다. 안내한 하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내는 놀라 일어서고 아들은 반가워하는데 얼굴 모르는 딸은 낯선 이에 두려움을 나타낸다. 지장보살은 다른 보살처럼 화려한 복장도 관도 쓰지 않고 소박한 가사를 입는다. 그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지옥에 산다.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중생의 고통을 함께하는 보살이다. ‘21세기의 일리야 레핀’은 사실주의 그림처럼 오늘 세상의 일을 리얼하게 기록하겠다고 각오를 밝힌다. ‘현장을 뛰는 지장보살’은 피디의 ‘현장성’과 ‘약자배려’라는 지장보살의 정신을 실천하겠다고 자신을 가다듬는다.


세상이 엉망이어서 한 치 희망조차 안 보일 때 일수록 건강한 개인이 필요하다. 일리야 레핀이 되고, 지장보살이 되어 이 땅의 언론을 다시 살리겠다는 심지 굳은 젊은이들이 언론계에 필요하다. 마음이 흔들릴 때 지표가 되고, 서로 의지가 되게 우리 마음속에 소나무 한그루 심자. 예비언론인에게 소나무 한 그루씩 심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