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ㅣ 『효창숲에 가면 그 나무가 있다』 김지석·함희숙·김수정 지음, 나남 펴냄
잃어버린 나를 찾게 해주는 동네 숲 관찰기
최재혁 회원
당신은 나무와 풀과 꽃과 대화를 나누어 본적이 있는가? 4월 27일 방영된 MBC 대표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가수 빅토리아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자주 식물과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사람들과도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 세상에서 식물과 대화를 나눈다니. 극한의 순수성 없이 가능한 대화일까 의심이 들 정도다.
2010년 이후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은 걸으면서도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걷는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자신의 눈은 스마트폰에 고정되어 있다. 전혀 주변을 둘러보지 않는 다. 자연이 우리에게 허락한 모습들을 보지 않는 것이다. 벚꽃 축제를 간다거나, 아침고요수목원을 간다거나, 고양 국제 꽃 박람회처럼 인간이 의도적으로 군집시켜 놓은 곳에 가서 꽃을 감상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 집 앞 놀이터가 있는 공원에서도, 5분 걸으면 보이는 뒷산에서도 우리는 수백 가지의 꽃과 풀과 나무를 관찰할 수 있다. 『효창숲에 가면 그 나무가 있다』는 우리 주변에도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있음을 알려주는 책이다. 효창공원 이라는, 용산구의 약 3만 7천 평을 점유하고 있는 큰 규모의 특정 공원을 상정해 놓았지만, 작은 공원에서도 책에 나오는 벚나무, 애기똥풀, 오리나무, 산수유 꽃 등을 볼 수 있다.
백화제방(百花齊放)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온갖 꽃이 일시에 핀다.’는 뜻이다. 장미, 백합 등 여러 화사한 꽃이 곳곳에 펴있는 장면을 상상하기 쉽지만, 이 책에서는 ‘백화제방’이라는 단어를 풀꽃에게 선사했다. 3월에도 5월에도 8월에도 봄꽃은 효창공원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 풀꽃을 소개한다.
효창 숲에 가면 그 나무도 있지만 그 ‘풀꽃’도 절기를 가리지 않고 손님을 반긴다. 효창공원의 봄에는 크지 않은 귀여운 풀꽃들이 많이 핀다. 이름부터 예쁜 ‘꽃다지’는 발목 아래로 자라는 작은 풀인데 털이 많은 작은 뿌리잎 가운데서 줄기가 올라와 작고 노란 꽃을 피운다. 또 다른 예쁜 이름을 가진 ‘꽃마리’는 연한 하늘색의 작은 꽃을 피운다. 이 밖에도 노오란 잎을 가진 ‘애기똥풀’과 ‘괭이밥’ 그리고 ‘씀바귀’도 있다.
자세히 탐색한 자에게만 선물로 보이는 풀꽃들. 입추에서 추분까지, 8월 초순부터 9월 초순까지는 풀꽃의 전성기다. ‘박주가리’는 작고 연한 자주색 꽃이 뭉쳐서 핀다. 키가 30센티미터도 안되는 ‘석잠풀’은 입술 모양의 연한 붉은색 꽃이 줄기 끝에 돌아가면서 달린다. 이 시기에 한창인 망초도 부드러우면서도 은은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 밖에도 송장풀, 도깨비바늘, 금불초, 쥐꼬리망초, 토끼풀, 깨풀, 뽕모시풀 등 각각의 개성 넘치는 풀꽃들을 소개해준다.
식물관련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 식물갤러리를 가보면, 비슷한 식물을 구별해 달라는 질문들이 많이 올라온다. 질문 글을 쓰기 전에 『효창숲에 가면 그 나무가 있다』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저자는 구별방법을 자세하게 알려준다.
신기하게도 동일한 시기에 꽃잎을 틔우는 식물들끼리 비슷한 용모를 가진 경우가 많다. 책의 첫 부분부터 나오는데 동요 <봄나들이>로 모두가 알고 있는 ‘개나리’와 봄맞이꽃인 ‘영춘(迎春)화’는 서로 모양새가 닮았다. 이 두 꽃은 입춘과 춘분 사이에 나는 꽃이다. 잎이 마주나는 것도 같지만 영춘화는 꽃잎이 6개로 갈라지고 개나리는 4개로 갈라진다. 줄기도 개나리가 좀 더 굵고 거칠다. 장미과 유실수인 ‘살구나무’와 ‘매실나무’도 분간하기 어렵다. 저자에 따르면 우선 8미터 이상인 큰키나무이면서 굵은 줄기가 사람 가슴 위까지 올라가는 나무가 살구나무다. 꽃이 피면 더 확연히 구분이 되는데 살구나무는 자주색 꽃받침이 뒤로 젖혀진다. 이것만 봐도 구분이 가능하다.
공저자 김수정 씨는 필자처럼 식물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대중들을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조금 더 친절함을 발휘했다면 어땠을까. 이 책의 앞에 효창공원 지도뿐만이 아니라 나무와 꽃의 일반적 모양을 하나씩 그려놓고 꽃자루, 암술과 수술, 수피 등 세부 용어들의 의미와 정확한 위치를 보여주었다면 좀 더 글을 읽어나가기가 쉬웠을 것이다. 이미 중학교 이전에 배웠을 내용이지만, 독자들이 그러한 용어들을 다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건 오산이다.
책 말미에 미니부록으로 컬리링 북을 하나 넣어놓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각 챕터 마지막에 있는 ‘더보기’는 책을 읽는데서 그치지 말고 실제로 가서 식물을 봤으면 하는 저자의 갈망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꽃잎을 뜯어 반지를 만들거나 은단풍 열매로 화관을 만들거나 떨어진 나뭇잎을 모아 색상환을 만드는 등의 아기자기한 실천방법들이 나온다. 하지만 단지 글 몇 줄로 호소력이 커지지는 않을 것이다. 색을 꼭 칠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컬러링북이 좋은 유인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차가 발달하면서 다리가 퇴화되고,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두뇌가 퇴화되고, 이렇게 기술은 인간을 점점 퇴화시킨다. 숲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를 마셔야 한다며 도시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더 이상 퇴화되지 않으려는 인간의 발버둥일지도 모르겠다. 교외를 가는 것도 좋지만, 이 책에서 나온 식물들은 이미 우리와 함께 있다. 오늘 하교 길에, 퇴근길에 10분간만이라도 시간을 내서 근처 공원을 가보자. 그리고 차분하게 ‘관찰’하자. 그들과 대화를 나누자. 그러면 그동안 놓쳐왔던 당신의 원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