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광주순례] 1980년 5월의 광주를 기억하는 방법, 민언련 회원으로 가입하세요!(2016.6.)
등록 2016.05.30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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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후기ㅣ 2016 광주순례]
1980년 5월의 광주를 기억하는 방법, 민언련 회원으로 가입하세요!

 

 

 

“소식지에 광주에 다녀온 이야기를 좀 써주세요.”
“네? 전 신입회원인데 글을 써도 돼요?”
“물론입니다!”

 

발랄한 민언련 활동가분의 원고 청탁 전화를 받았다. 회원으로 가입한 지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다. 조금 망설였지만, 언제 신입회원으로 이런 원고를 쓸 날이 있겠냐 싶어 덥석 쓰겠다고 했다. 물론 전화를 끊고 바로 후회했다. ‘민언련 회원이 몇 명인데, 거기에 쓸 글을 쓰겠다고 했을까. 그것도 그냥 시민단체도 아니고, ‘언론’시민단체인데… 망했다.

 

그렇다. 난 민언련 신입회원이다. 그리고 회원으로 가입하기 2일 전인 5월 14일 토요일, 민언련 광주 기행 버스에 올랐다. 작년 6월부터 같이 살게 된 짝꿍은 민언련을 참 좋아한다. 소식지가 집에 오는 날이면 가방도 벗지 않고, 소식지부터 펼쳐 보는 사람이다. 옛날이야기를 할라 하면 민언련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어느날 퇴근길에 짝꿍이 ‘민언련에서 광주에 같이 가자는데…’라며 슬쩍 말을 흘렸다. 가자는 것인지, 말자는 것인지 아리송했지만 ‘같이 갈까?’하고 물어보니, 바로 좋다고 한다. 생글생글 웃으며 좋아하던 짝꿍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물론 출발하기 전날, ‘완전 소중한 토요일 늦잠’을 포기해야 한다 생각하니 후회가 밀려왔지만. 짝꿍과 함께 사는 동안 민언련이 친숙한 곳이 되었나 보다. 출발하는 날 아침, 버스에 올라 이야기로만 듣던 분들을 실제로 뵈었을 때의 그 감동(?)이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데도, 낯설지 않은 마음으로 광주길에 오를 수 있었다.

 

 

난 ‘1980년 5월 18일’을 잘 모른다. 그저 텍스트로, 영화로, 다큐멘터리로 본 게 다다. 광주도 몇 번 다녀왔지만 좀처럼 내 ‘현실’로 와 닿지 않았다. 내 현실은 우리집 거실을 꿰차고 앉아 계신 ‘은행’님께 매달 꼬박꼬박 용돈을 드려야 한다는 것, 빨리 아이를 낳아야 한다며 성화인 울엄마랑 싸우는 것, 술 먹고 다음날이면 얼굴이 까매지는 짝꿍의 건강을 걱정하며 잔소리하는 것, 앞으로는 100살까지 산다는데 대체 어떻게 100살까지 먹고 살아야 하는지 걱정하는 것들이다.

 

 

광주에서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 센터장님의 강연을 들었다. 5월에 가족을 잃은 그분들의 저릿저릿한 사연과 30년 세월을 딛고 다른 사람을 보듬는 치유자가 된 이야기를 담담히 전해 주셨다. 생각해보니 내 시선은 ‘1980년 5월 18일’에 머물러 있었다. 그 시간과 공간만을 현실로 인지하고 접점을 찾으려 했으니, 2016년 5월을 사는 내게 현실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분들은 그 이후 30년을 견디고, 끌어안고, 보듬고, 울고, 노래하며 살아 오셨다. 1980년에서 시간이 정지한 게 아니다. 그분들이 가족을 가슴에 묻고 매일을 살아온 삶이 지금, 2016년 5월의 나와 만났다. 그리고, 그 삶은 아직도 진행 중인 2014년 4월 16일의 비극과 마주 닿아 있었다. 난 5월의 슬픔과 4월의 비극을 겪은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내가 그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로 내 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저 난 내 삶에만 갇히고 싶은 욕망을 다른 사람을 통해 발견하고, 도움을 받아 내가 살아가는 현실임을 인식할 뿐이다.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민언련 회원으로 가입하겠다’고 했다. 짝꿍 덕분에 알게 된 민언련과 가까워지고 싶다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2016년 5월을 내 경험으로 만들고 싶었던 게 더 큰 이유였다. 광주를 계기로 민언련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으니, 5월이 되면 광주가 생각나고, 민언련 회원으로 가입했던 2016년의 오늘이 기억나지 않을까. 작고 소소한 일이지만,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고 싶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