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의 날ㅣ 연극 <보도지침>을 만나다] 보도지침 사건은 영웅이 아닌 연대가 만들었다(2016.6.)
등록 2016.05.3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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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 날ㅣ 연극 <보도지침>을 만나다]

보도지침 사건은 영웅이 아닌 연대가 만들었다

 

 

배나은 활동가

 

 

2016년 5월 20일 민언련은 <회원의 날> 행사로 연극 ‘보도지침’을 공동 관람했습니다. 사실 5월은 5·18 광주순례가 있기에 웬만하면 또 다른 회원행사를 잡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연극 공동관람을 추진한 것은 민언련이 도저히 함께 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행사였기 때문이라고도 들었습니다. ‘회원의 날’행사 후기를 쓰라는 지시를 받은 뒤, “열심히 공부해서 써보겠습니다”라고 쉽게 장담했다. 하지만 1986년에 태어난 저에게 1986년 <보도지침>사건은 옛날이야기로만 느껴졌습니다.

 

 

 

하나. 1986년 <보도지침> 사건
1986년 9월 6일 민언련의 전신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약칭 언협)는 기관지인 월간 「말」지 특집호를 통해 국가권력과 제도 언론이 어떻게 정보를 왜곡·조작해왔는가를 보여주는 「보도지침 사례집」을 발표했습니다. 한국일보 기자 김주언이 편집국에서 발견하여 보도지침철에 있던 584건의 내용을 항목에 따라 분류하고 해설을 붙여 펴낸 것입니다. ‘보도지침’이란 전두환 정권이 일찍이 언론인 강제해직과 언론 강제통폐합 및 언론기본법 제정 등을 통해 언론통제 수단을 완비하고도 이에 더하여 문화공보부 내에 홍보조정실을 두어 ‘협조’의 명분 아래 보도통제를 강제하기 위한 대언론 협조요청 사항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제도언론을 비판하고 민중언론을 지향하며 1984년 12월 19일 창립한 언협이 『말』지를 통해 폭로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1986년 12월 9일과 15일에 언협 김태홍 사무국장·신홍범 실행위원·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 구속되었으며, 1987년 1월 27일 서울지검은 이들을 외교상의 기밀 누설, 국가 모독죄, 국가보안법 위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죄목으로 기소하였습니다. 뒤이어 이 사건과 관련하여 언협 박우정 실행위원이 그해 3월 6일자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3월 9일 정상모 사무국장이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즉심에 넘겨져 구류 7일을 선고받았습니다. 보도지침 폭로 사실에 대해서는 형법상의 외교상 기밀누설죄가 적용되었고, 국가보안법은 단순히 일부 서적을 소지한 사실에 적용되었습니다.


사건발생 9년 후인 1995년 12월 5일에 이르러서야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계는 옥중의 김태홍, 신홍범, 김주언에게 가톨릭자유언론상을 수여했고 김수환 추기경은 강론을 통해 보도지침 폭로는 정당하다고 선언했습니다. 국제앰네스티와 외국 언론단체들도 이들의 석방운동을 벌였습니다.

 

 

둘, 30년 후 만난 보도지침의 두 주역
연극이 시작되기 두 시간 전, 극장이 있던 건물 2층 식당에서는 보도지침 사건의 실제 주역이신 신홍범 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실행위원과 김주언 한국일보 전 기자의 경향신문 인터뷰가 진행됐습니다. 인터뷰는 경향신문 이명희 기자의 질문 사이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의 질문이 추가되는 방식으로 이어졌습니다. 또 다른 주역이신 김태홍 사무국장은 작고하셨습니다. 일주일 전 다녀온 광주순례 당시 참배도 했었는데, 아 ‘그 분이 바로 <보도지침> 당시 옥고를 치르신 분이었구나’ 생각하니 새삼 찡했습니다. 실제 보도지침 주역의 인터뷰를 ‘구경’하러 온 저는 긴장과 설렘으로 ‘두근두근’하며 그 질문과 답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나도 드라마틱한 사건은 아닌데…” 첫 질문은 보도지침 연극에 대한 생각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신홍범과 김주언 선생은 모두 ‘보도지침 자체는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 전 이미 보도지침 연극을 관람하셨던 김주언 선생님은 “보도지침 자체가 극적요소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법정 드라마라는 형식을 빌면서 (극적인 요소가) 생긴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홍범 선생님 역시 “연극을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드라마틱한 요소가 없는 이런 내용을 어찌 연극으로 만들 수 있었는지 궁금하고 또 고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가는 와중 저는 속으로 ‘목숨을 걸고 정권의 언론통제 도구를 세상에 공개한 사건이 드라마틱하지 않다면, 대체 이 세상에 드라마틱한 것이 무엇이 있겠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린 개인적 영웅이 아니야” 보도지침 폭로라는 하나의 사건이 결코 몇 사람의 영웅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점 역시 인터뷰의 시작부터 끝까지 몇 번이나 반복됐습니다. 연극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상 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뿐 아니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민변 등의 재야단체와 학생단체들. 그리고 신분을 숨기고 보도지침 폭로 과정에 힘을 보탠 이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후 꾸준히 이어진 이들 단체와 국제단체 등의 지지 성명과 각종 연대 활동은 피의자 신분이 된 ‘폭로자’들이 끝까지 버텨낼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김주언 선생님은 이를 “보도지침은 개인 몇 사람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닌, 언론 민주와 및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국내외 연대의 결과물”이라 표현하셨습니다.

 

“언론 독립운동 필요한 시점” 보도지침 폭로가 이뤄진 지 30년이 된 현시점의 언론에 대한 평가도 이어졌습니다. 신홍범 선생은 이번 총선 시기, 적극적 선거운동에 나선 보수신문들의 행태를 지적하며 자본과 정치권력, 그리고 언론의 이해가 일치하고 있음을 꼬집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레기로 불리는 것이 싫다면, 그저 월급만 타려면 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김주언 선생도 과거에는 언론이 스스로 권력이 되어 정치 자본을 거느렸지만 이제는 하수인이자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며 우려를 표했습니다. 보도지침을 언론사들과 언론인들이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시민단체나 독자, 시청자의 역할이 중요하고, 언론 스스로는 인터넷 검색이 아닌 발로 뛰는 기사를 내는 한편, 덩치만 키워 광고나 협찬 의존도가 높아지는 상황으로 걸어 들어가는 대신, 작지만 강한 언론을 지향해야 한다는 공통 의견이 제시됐습니다. 이른바 “언론 독립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도망을 잘 못 쳐서 잡혔지” 인터뷰 과정에서는 무척 재미있는 질문도 나왔습니다. 왜 많고 많은 사람 중 신홍범 선생님이 감옥에 갔냐는 김언경 사무처장의 질문에, 신홍범 선생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의 협의에 참여한 것과 폭로 기자회견에서 낭독한  성명문을 작성한 것을 이유로 꼽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남들보다 도망을 잘 못 다닌 탓”에 잡혔다고도 하셨지요. 그 말에 웃기도 했지만 가슴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진실을 말한 이들이 왜 ‘범죄자’라도 된 양 도망 다녔어야 했던 것일까요. 그 유명한 ‘수의를 입고 포박당한 채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의 진실도 밝혀졌습니다. 오랜만에 밖에 나와 좋았고, 또 반가운 얼굴이 많이 보여 좋았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참으로 ‘웃픈’대답이었습니다.

 

셋. 2016년 연극 <보도지침>을 만나다.
연극 ‘보도지침’은 대한일보의 기자 주혁과 월간 독백의 편집자 정배의 ‘보도지침 문건’폭로로 시작됩니다. ‘이 기사는 보도하지 말 것’, ‘이 기사는 1면에 보도할 것’, ‘이 기사는 사회면에 2단으로만 보도할 것’. 보도 가치와는 무관하게 보도 여부 및 방향, 내용, 형식까지 이미 답은 정해져 있고, 언론사는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 저항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후 이들은 피의자 신분으로 법정에 서게 됩니다. 두 피의자와 함께 법정에서 보도지침의 실체를 두고 공방을 벌이는 황승욱 변호인, 최돈결 검사, 송원달 판사는 모두 같은 대학 연극반 출신입니다. 이들이 기자회견장과 법정과 동아리방, 연극무대를 오가며, 각자가 처한 개인적 배경과 사회적 현실 사이에서 각기 다른 행보를 선택하는 모습을, 관객은 외신기자와 관객, 참관인을 오가며 바라보게 됩니다.

 

“몰라서 묻냐?” 금서를 연극 무대에 올리거나, 보도지침을 폭로하거나 하는 식의, 삶을 흔드는 어떤 선택이 이뤄진 이후 주인공들은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대한 일종의 선언을 내놓습니다. 변호사인 승욱은 진실을, 검사인 돈결은 정의를, 출판인 정배는 마음의 소리를, 송원달 판사는 균형을 추구하며 모두 자리를 떠나지요. 그러나 와중 기자인 주혁은 끝내 무엇을 추구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과거와 현재, 두 차례에 걸쳐 반복됩니다. 대신 그는 긴 침묵 끝에 질문을 내놓습니다. ‘정말 몰라서 묻느냐’고. 여기에서 생략된 질문은 무엇이고, 우리가 내놓아야 하는 대답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몰라서 묻냐’는 질문은 판사와 편집국장, 연극 동아리 선배 등의 입을 통해 몇 번이나 반복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연극이 무대에 오른 지금은 2016년입니다. 정의로운 이들이 목숨을 걸고 진실을 폭로한 지 30년이 지난 것이지요. 그렇다면 정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사라진 걸까요? 편집국에 흩날리던 그 검은 종이들은 사라진 것일까요? 그냥 그 사안이 중요해서 그렇게 보도하는 것 아닐까요? 이런 질문을 향해 연극 보도지침은 이렇게 되묻습니다. “정말 몰라서 묻나?”

 

 


넷. 연극이 끝난 뒤 진행된 신홍범 선생님과의 대화
연극이 끝난 뒤, 함께 관람한 30여명의 민언련 회원들은 신홍범 선생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신홍범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회고 중 언협에 대한 이야기는 민언련 회원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했습니다. 선생님은 보도지침 폭로는 당연히 김주언 기자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엄혹한 시대에 그 글을 폭로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추진하는 데는 언협의 결단과 노고가 있었기 때문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당시 여러 어르신들이 보도지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시고 연이어 고초를 겪으셨다고 합니다. 보도지침 사건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서 임재경 선생님은 해외언론과 접촉하며 여론을 상기시켰고, 그야말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모든 분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비뚤어진 언론문제를 바로잡고자 분투하셨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사실 부끄럽지만 제게 있어서 보도지침은 오래된 위인전에 적힌 위인들의 업적처럼, 대단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빚 바랜 그냥 과거의 일’이라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글이나 사진, 혹은 제삼자의 설명으로 접한 보도지침 사건과 그 실제 주역들의 목소리로 전해 듣는 사건은 전혀 달랐습니다. 권력이 스스로를 감시할 수 없듯, 언론 역시 외부에서 감시하는 시선과 비판하는 목소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선생님들의 말씀에 제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부가 입맛에 맞춰 임명한 공영방송 사장들을 보고도. 비판적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광고를 받지 못하는 진보 언론들을 보고도. 해고된 이후 여전히 복직되지 못한 기자들을 보고도. 세월호 보도를 보고도, 어버이연합 게이트 보도를 보고도 우리는 정말로 정말로 모르고 있는 걸까요?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그럼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요?


울고 웃으며 본 이 연극이 극장을 떠나는 각자의 주머니 속에 작은 숙제를 하나씩 넣어 준 기분입니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께도  연극 <보도지침>을 권합니다. 
다음 페이지의 글은 신홍범 선생님께서 ‘구속 수감된 사유 중 하나’라는 <보도지침> 폭로 기자회견 당시의 성명서 일부입니다. 이 글을 쓰실 때의 선생님들의 마음을 곱씹어보고 싶어 일부를 발췌해서 올립니다. 언론개혁 운동의 필요성과 민언련이 해야 할 일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성 명 서

 

 

오늘의 언론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있는 정부당국의 이른바 「보도지침」의 세부 내용이 밝혀짐으로써 현 언론의 정체가 남김없이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 민주언론운동협의회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왔던, 그러나 정부당국이 애써 비밀로 취급코자 했던 이 보도지침을 입수하여 자료집으로 간행, 공개한다. (중략…)
이제 이 땅에는 언론탄압이 아니라 언론과 권력의 일체화가 있을 뿐이다. 언론활동이 아니라 언론의 조작만이 있을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언론탄압이란 말은 진정한 언론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과 저항이 있을 때에라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과 권력의 일체화, 이것이야말로 이 땅의 언론의 성격을 규정해 주는 본질이다. 오늘의 언론이 마치 언론탄압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처럼 때때로 오인되고 있는 것 역시 언론이 마치 탄압받고 있는 양 가장함으로써 신문기업의 상업성을 높이려는 의식조작의 결과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중략…)
국민의 편이 아니라 권력과 일체가 되어 마땅히 알려야 할 사실과 진실을 은폐·왜곡하고, 언론조작에 의해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왜곡·오도한다면, 그리고 고난 받는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의 현실과 의사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더불어 오히려 그들을 박해한다면 그 언론은 민주주의와 민중의 적으로 규정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오늘의 언론이 민주화를 저해하는 가장 중요한 권력장치 가운데 하나, 즉 언론권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언론을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으로 규정한다.
「보도지침」에서 폭로된 이 땅의 언론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지체 없이 오늘의 이 사악한 언론을 타파하고 우리가 그토록 오래 열망해 마지않았던 민주적인, 민중적인 언론, 우리들의 참다운 새로운 언론을 탄생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언론의 건설은 낡고 그릇된 것의 부정, 극복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보도지침」 자료집 간행을 계기로 우리는 민중이, 국민이 더 이상 제도언론의 의식조작, 환상조작에 기만당하지 않고 현 언론의 정체에 대한 가차 없는 인식에 이르게 되기를 바라며, 이를 계기로 대대적인 제도언론거부운동을 우리와 더불어 전개해주실 것을 호소하고자 한다. 우리는 언론의 민주화가 사회의 민주화에 선결적 요건이 된다는 언론의 중대성에 비추어 민주화를 열망하는 모든 국민과 더불어 낡고 거짓된 언론을 부수고 새 언론을 건설키 위한 범국민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임을 거듭 밝힌다.

 

1986년 9월 9일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