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인터뷰_조은미 회원] ‘하드코어 인생’, 평범한 그녀의 특별한 삶(2016.5.)
등록 2016.05.03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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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_조은미 회원]

‘하드코어 인생’, 평범한 그녀의 특별한 삶

 

 

 

민언련에 적을 둔 지 고작 1년, 회원과의 관계도 아직 서툰 ‘초짜 활동가’에게 회원 인터뷰는 간단치 않은 일이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민언련 방송모니터위원회 출신 JTBC 온라인 뉴스 편집자라는 것 뿐이었다.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장소를 인터뷰 장소로 정해달라는 요청에 그녀는 자신이 근무하는 JTBC가 아닌 SBS 앞 공원을 택했다. 여기서부터 이미 뭔가 심상치 않았다. 사전 정보는 ‘전무’, 인터뷰 장소도 ‘예상 밖’이었던 이번 ‘회원의 하루’는 민언련 회원을 소개하는 인터뷰가 아니다. 초짜 활동가가 한 사람을 배워가는 대화의 일부이고 민언련과 회원의 삶이 함께 빛나는 순간에 대한 단상이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빛나는 ‘금빛’스웨터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인생 도정, 오늘의 주인공 조은미 회원이다.   글_이봉우 활동가, 사진_이병국 회원, 동행_김언경 사무처장

 


치열했던 민언련의 ‘누렁이’
더없이 맑은 오후였다. 약속 장소인 SBS 목동사옥 앞 공원은 시간이 멈춘 듯했다. 북적대는 일상에서 벗어난 잠깐의 휴식, 봄노래를 흥얼거리게 하는 날씨 사이로 그녀가 왔다. 마침 그녀의 옷차림 역시 ‘금빛’이었다. ‘금빛’햇살이 비친 그녀는 먼발치에서도 오늘의 주인공임을 실감케 했다. 조은미 회원을 보고 싶다며 동행한 김언경 사무처장 때문인지, 그날따라 유난히 찬란했던 날씨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수 백 미터를 앞에 두고도 ‘그녀’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인사를 나눴다. 나른한 듯 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목소리는 ‘금빛’햇살로 물든 그날의 풍경과 잘 어울렸다.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여전히 ‘초짜 활동가’가 허둥대는 사이, 김 처장은 조은미 회원과 수다인지 인터뷰인지 모를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자 이제 민언련과의 인연부터 쭉 알아서 말해봐”라는 김 처장의 말에 “셀프 인터뷰냐”고 핀잔을 주면서도 그녀는 삶의 실타래를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민언련과의 인연은 평범했다. 2006년, 언론학교로 첫 발을 디딘 그녀는 방송분과 홍보에 말 그대로 ‘홀렸다’고 한다. 조은미 회원이 활동하던 시기는 자타공인 ‘방송분과의 전성기’였다. 일주일에 한번 하는 분과 모임 이외에도 분과 모니터 아이템을 위해 별도의 공부모임을 했고, 주말에는 소풍을 가느라 분과원들을 일주일에 3번 만난 적도 많았다고 한다. 김 처장이 “네 별명이 누렁이였나?”라며 별명 얘기를 꺼내자 “네, 전 누렁이, 주인님은 강윤경 간사였죠”라는 재밌는 대답이 돌아온다. 강윤경 활동가의 충실한 ‘누렁이’가 되어 방송분과 활동에 매진한 그녀는 곧 민언련 인턴까지 인연을 이어갔다. “민언련에서 공부하는 재미를 많이 느꼈다.” 한 살 배기 초짜 활동가는 처음 들어보는 민언련의 가치이다.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고용해서 맡기는 보도 코딩 작업도 그녀가 몸담았던 시절의 민언련은 회원들이 “맨 땅에 헤딩하듯”해냈다고 한다. 그녀에게 민언련은 무엇일까. “채널이라고 해야 할까. 사회적 채널 중의 하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저의 세계가 더 넓어진 것도 있고 풍성해진 것도 있고. 그런 공간이 되어줬고. 이제 다시 올 수 없는 한 시절이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그렇게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그럴 수 있었을까. 그 때 해놓은 걸로 지금 먹고 산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하고. 아마 다시 하려고 하면 그 정도로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농부의 딸’, ‘화’를 내다
현재 방송분과를 담당하는 활동가로서 ‘열성’방송분과원 ‘조은미’와, 그 시절의 ‘방송분과’가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방송분과로 지금 돌아올 수 없겠냐고 부탁하려던 찰나, 그녀는 민언련 이전과 이후, 자신의 ‘진짜 삶’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방송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 이유가 범상치 않다. “사회에 화를 내고 싶었다. 화를 내는 합리적인 명분이 기자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 때문에 사회에 화가 났을까? “경상도에서 막내딸로 살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은 차별이 심했다. 또 집이 농사를 지었는데 농부에 대한 왜곡된 시선에도 화가 났다. ‘멍드는 농심’과 같은 기사를 보면 정말 농심을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도시 소비자가 주체로, 농촌은 객체로만 설정하는 언론 보도들은 농심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 ‘농부의 딸’이 내놓은 일침이다.


이렇게 ‘화’를 내기 위해 꿈꿨던 기자지만 그녀는 기자도 ‘화’를 제대로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늘 스케치하듯 보도하는 것, 파업 등 우리 사회의 갈등에 대해 ‘평행선을 달린다’라고만 묘사하며 구경꾼에 머물러야 하는 현실에 회의를 느꼈다.” 결국 ‘농심’을 객체로만 보는 보도들에 치밀었던 ‘화’는, 그 보도의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는 방식으로 풀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 현실의 벽을 깨닫기까지, 그녀는 꽤 오랜 시간을 보낸 듯 했다. 그리고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회의에도 민언련이 영향을 미친 듯 했다. “민언련에 있으면서 기자에 대한 환상도 많이 깨졌다”고 말하는 그녀는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하드코어’인생, 평범한 삶은 없다
그렇다면 취재 기자로부터 등을 돌린 그녀의 다음 도정은 어디로 향했을까. 현재 JTBC 온라인 뉴스 편집을 하고 있으니 어찌됐든 언론인이 아닌가. 잡다한 생각이 복잡해질 때 쯤, 이번엔 ‘하드코어 인생’이라는, 진중한 그녀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드라마가 펼쳐졌다. 바쁘다는 말로는 그녀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SBS 인코딩 아르바이트, 민언련 모니터 활동, 한국언론재단 예비언론인학교 수업, 잡지 <1/n>기자까지, 최소한 하루에 세 가지 이상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듯 했다. 그녀는 “일생이 하드코어”라고 스스로의 삶을 표현했다. 보통 매우 힘든 상황을 의미하는 ‘하드코어’의 사전적 의미 중에는 “타협하지 않는”이라는 뜻도 있다. 조은미 회원의 “하드코어”에는 이 ‘타협하지 않는 특별함’이 묘하게 어울린다.


2007년, 민언련 활동과 SBS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던 그녀는 “기자가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SBS에서 보니 그냥 월급 받는 회사원이었다. 조직이나 직군의 문제가 아니라 기자를 투사로 여겼던 환상이 걷힌 것”이라고 회상했다. 기자가 되기 위해 ‘하드코어 일상’을 뛰었으나 기자가 특별한 직업이 아님을 발견한 셈이다. 이 역설에 SBS를 인터뷰 장소로 택한 이유도 담겨 있었다. “SBS에서 사회가 돌아가는 것과 나의 시간이 같이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SBS가 사회의 감각을 알려준 것이다. 지금 같이 일하는 분들도 그때 만난 사람들이다. 팀이 그대로 옮겨 갔으니 SBS가 인연도 만들어 준 것이다.” ‘알 수 없는 인생사’라는 진부한 코드가 딱 들어맞는 대목이다. 기자가 회사원이라는 사실에 대한 회의는 그녀에게 ‘사회 감각’을 가르쳐줬고 결국 그녀도 ‘회사원’이 됐다. 속칭 ‘금수저’로 불리는 특권 계층을 제외한 우리 모두가 ‘노동자’‘회사원’으로 살아가는 현실을 감안하면 특별히 아쉬운 일은 아니다. 핵심은 ‘회사원’이 아니라 ‘조은미’라는 개인에 있다.


그녀는 JTBC 계열로 이직하던 시절을 이렇게 떠올렸다. “찜찜하긴 했다. 심지어 나도 종편 채널은 특혜로 생겨나는 방송사라며 개국을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스트레스가 많았다. 회사 내부에서는 인터넷에 편집할 때 최대한 편향적이지 않은 제목을 뽑으려 노력했다.” 민언련에서 언론운동에 몸담았던 그녀에게는 어쩔 수 없는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말하듯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는 소시민이고 조직의 일원”이다. 이게 끝이라면 우리 모두 ‘평범한 회사원’에 그칠 테지만 그녀는 해법을 제시한다. 바로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분명 회사가 잘못하는 것도 있다. 이번 총선 보도도 아쉬운 점이 많다. 경향신문의 성완종 회장 녹취록 사건도 분명 우리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를 문제제기 하지는 않았지만…”아직 말은 안하거나 못하더라도 잘못을 직시하는 것, 비판 정신을 잃지 않는 것. 조금 성에 차지 않더라도 ‘소시민’인 우리가 할 수 있는 ‘특별함’은 스스로의 ‘내부고발’아닐까.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
인터뷰가 여기서 끝났다면 단지 명랑한 ‘회원의 하루’가 됐을 법하다. 화기애애한 세 사람의 대화가 잠잠해질 무렵, 조은미 회원은 묵직한 얘기를 꺼냈다. 아직 기자를 꿈꾸던 시절, 대학원 진학 당시의 힘들었던 시간은 긴 여운을 남겼다.
“흔히 사람들이 얘기하는 ‘너도 잘못이 있으니까’이런 식의 말, ‘그런 자리에 왜 따라갔냐’는 말이 너무 듣기 싫었다. 사람들은 정말 쉽게 말하는구나, 그런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내가 일일이 다 설명하고 다닐 수는 없으니 너무 슬펐다.”


그렇다. 그녀는 뉴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대학 내 성추행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녀는 성추행 자체보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의 뒤틀린 시선에 더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이 일을 “안다는 것이 상처받는 일이라는 걸 온몸으로 겪은 일”이라고 묘사했다. 그녀는 당시 “정말 좋은 분”인 지도교수에게 물었다고 한다. “선생님 제가 뭘 잘못했어요?”교수는 “네가 잘못한 것 없지”라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조금 후에는 “아니 생각해보니 네가 잘못한 게 있어. 세상이 선할 것이라고 믿은 것. 그건 너의 잘못이야. 세상은 그렇게 선한 곳이 아니야”라며 ‘선하지 않은 세상’을 탓했다. 그녀도 ‘세상은 그렇게 선한 곳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분노하고 아프고, 또 무서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순 없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공부도 하고 독서모임도 하는 등, 그 일이 자신을 해치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봤다. 나중에는 다시금 “세상이 생각보다 친절하구나”라는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녀. “뭔가 그 일이 있고나서 엄청 어른이 되는 느낌?”이였다고 말할 때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김 처장도 “‘별 것 아닌데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문제다’, ‘그 사람의 고통은 알지만 나는 모른척 하겠다’는 태도가 정말 무섭다. 특히 조직을 위해서라는 생각에 자꾸 상황을 왜곡시킨다. 살다보면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의 아픔보다는 자기의 아주 작은 이익이나 입장 때문에 잘못된 처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게 좋은거다’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늘 굉장히 많이 성찰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조은미 회원이 그 일을 완전히 극복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녀는 ‘좌절’이 아닌 ‘극복’에 한 걸음 더 다가선 듯 했다. 만약 극복이 망각을 포괄하는 것이라면, ‘여성에 대한 억압’은 극복될 수도, 극복 되어서도 안 될 사안이다. 그래도 그녀이기에 믿을 수 있다. 이 사건을 ‘회원의 하루’에 반영해도 되는지 묻는 말에 흔쾌히 수락한 그녀의 눈빛에는 확신이 있었다. ‘하드코어 인생’으로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그녀는 값싼 ‘긍정’대신 치열한 비판 정신으로 대처하고 있는 듯 했다. ‘소시민’이 택할 수 있는 ‘특별함’이 ‘잘못을 직시하는 것’임을 아는 그녀는 억압받고 외면당하는 ‘피해자’ 역시 아픔을 직면해야 함을 보여줬다. 때로는 “안다는 것이 상처받는 일”일지라도.

 

그녀는 비교적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한 후에도 ‘하드코어’를 살고 있다. 결혼을 앞둔 그녀는 “육아 선행학습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언니와 함께 살며 조카를 같이 돌본다는 뜻이었다. “결혼하면 조카도 보고 나중에는 제 아기도 키우고”라며 너털웃음을 짓는 표정에선 ‘달관’의 경지마저 느껴졌다. 여기서도 그녀는 팍팍한 일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건강한 시민으로 살면서 농촌 소설을 쓰고 싶다”는 것이 앞으로의 계획이다. 사회를 향해 화를 내고 기자를 꿈꿨던 ‘농부의 딸’은 긴 여정을 거치며 기자의 꿈을 비껴갔으나 결국 ‘농촌’으로 돌아간다. ‘하드코어 일생’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 ‘건강한 시민’과 ‘농촌소설’을 포기하지 않는 ‘하드코어 일생’, 그녀가 제시하는 ‘특별해지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