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글]
과거사에 대해 가정법(if)을 써보면 어떨까?
신홍범 이사
프랑스 혁명사를 읽을 때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혁명 당시의 언론의 역할이다. 아주 많은 언론 매체가 등장하여 뜨거운 말들을 쏟아내는데, 인류 역사상 이렇게 많은 미디어들이 등장해 꽃을 피운 적이 있었던가 생각될 정도다. 그런데 이 매체들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매체가 있다. 「르 모니뙤르」(Le Moniteur)라는 신문이다. 프랑스 혁명사 연구의 대가 알베르 소불(Albert Sobul)의 『프랑스 혁명사』에도 몇 차례 등장하는 꽤 유명했던 신문이다. 권력의 부침에 따라 언론이 어떻게 변신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 되는 신문이기도 하다. 이 신문은 혁명 초기에 시민의 편에 섬으로써 프랑스 최대의 일간지가 되었으나, 시민의 힘이 약화되는 기미를 보이자 왕정의 편으로 돌아섰고,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1799년 브뤼메르 18일) 황제가 되자 이를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실각하여 엘바 섬으로 유배되고 루이 18세가 등장하자 재빨리 논조를 바꾸어 나폴레옹을 찬양하던 펜으로 무력한 황제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나폴레옹이 유배되어 있는 동안 이 신문의 공격적인 논조는 계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유배지를 탈출하자 사정이 달라졌고 그래서 다시 변신을 거듭했다.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은 1815년 3월 1일 쥐앙 만에 상륙하여 그를 저지하려는 군대를 연달아 격파하면서 빠리에 접근했고, 3월 20일 마침내 수도에 입성했다. 이 3주 동안에 시시각각으로 변한 「모니뙤르」의 기사 제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살인마, 소굴에서 탈출 ”
“코르시카의 아귀(餓鬼), 쥐앙 만에 상륙 ”
“괴수, 까프에 도착 ”
“폭군, 리용을 통과 ”
“약탈자, 수도 60 킬로미터 지점에 출현 ”
“보나파르트, 급속히 전진, 그러나 빠리 입성은 절대 불가! ”
“황제, 퐁텐블로에 도착하시다 ”
“어제 황제 폐하께서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거느리시고 튀일르리 궁전에 듭시었다.”
권력의 부침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언론의 이런 변신은 200년 전 아득히 먼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언론이 한국에는 없었던 걸까?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언론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 땅의 언론 역시 모니뙤르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만신창이가 된 우리 민족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몰아넣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언론이 해방 후 한마디의 사죄도 없이 ‘민족 언론’으로 ‘위장 변신’했던 것, 유신체제 때는 “민주주의의 토양을 굳건하게 닦는 일대 혁신 조치”라면서 박정희 독재를 찬양하고, 신군부가 등장할 때는 전두환을 ‘새 역사의 선도자’로 찬양하는… 등등, 그들이 저지른 굴종과 변신의 역사를 우리는 다 잘 알고 있다.
모니뙤르는 그 후 퇴출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도 1830년의 7월 혁명, 1848년의 2월 혁명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정의를 세우고 역사를 전진시켜왔던 프랑스 국민들이 이런 거짓된 언론을 그냥 두었을 리 없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들은 그런 부끄럽고 욕된 과거를 지녔는데도, 반성 한번 하지 않고 오늘 날 어느 때보다 번영을 누리고 있다.
한국 언론의 이런 변신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큰 원인 중의 하나는 과거의 과오를 청산하여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하지 못했던가?’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되풀이되는 질문이다. 언론의 경우 특히 그렇다.
한 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받아 나라를 잃고 오랜 세월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다면, 그리고 한 나라가 독재자에 의해 민주주의를 유린당한 채 ‘암흑시대’와 같은 끔찍한 세월을 30여 년 동안 겪었다면, 그 시대를 돌아보고 크게 반성하는 것이 당연하다. 나라가 왜 그 지경이 되었던가,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누가 무슨 짓을 했던가,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던가. 온 국민이 거국적인 대토론을 벌여 과오를 반성하고 정의를 다시 세워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올바르고 건강한 정신을 가진 나라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상식이다.
프랑스 같은 나라는 그것을 해냈고, 독일도 그러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나치 하에서 반역죄를 저지르거나 반인륜 죄를 저지른 자들을 지금도 찾아내 처벌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날의 망령들이 다시 살아나 배회하는 일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는 특히 지식인들을 엄하게 다루었다. 대서양 연안에 나치의 군사용 콘크리트 벽을 쌓는 데 돈을 댄 경제인보다 나치에 부역한 언론인과 작가들을 더 엄하게 다스렸다.
왜 지식인들을 특히 가혹하게 다루었던가? 『바다의 침묵』을 쓴 레지스탕스의 작가 베르꼬르는 이렇게 말했다. “지식인의 반역은 기업가의 반역에 비해 백배나 더 중대하다. 왜냐하면 지식인의 범죄는 자기 자신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자신의 사상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타인의 사상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기업가와 지식인을 비교하는 것은 카인과 악마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카인의 죄는 아벨에 그치지만, 악마의 위험은 무한하다.” 지식인이 자신의 능력을 잘못 사용하면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나쁜 영향을 끼쳐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뿐 아니라 조국의 운명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차 대전 후 프랑스는 나치 청산 문제를 놓고 온 나라가 대토론을 벌였다.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자비를 베풀어 범죄자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프랑수아 모리악과 반역자들을 처벌하여 정의를 세워한다는 알베르 까뮈의 논쟁은 유명하다. 프랑스가 이렇게 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똑같은 과오가 미래에 되풀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프랑스 문예」)지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지난날의 우리의 모든 불행은 반역자들을 처벌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오늘 또다시 그들을 처벌하지 못한다면 커다란 불행이 닥칠 것이다. 어제의 범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를 조장하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도 이런 기회가 몇 차례 있었다. 해방 후가 그러했고, 군사독재가 무너진 후가 그러했다. 형사처벌까지 한 프랑스처럼 했어야 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한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절반 정도만 했더라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델라의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형사처벌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수많은 범죄자들을 불러내어 텔레비전 방송 중계 하에 전 국민 앞에서 진실을 고백하고 사죄하게 했다. 우리도 전 국민적인 차원에서 대토론을 벌여 유신체제가 우리 역사에서 무엇이었는지, 그 시대에 우리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어떻게 말살됐는지, 누가 반인륜 범죄를 어떻게 얼마나 저질렀는지, 특히 언론과 공안기관이 어떤 짓을 했는지 등을 밝혀 그 시대를 정리했더라면 어땠을까? ‘정신적’, ‘문화적’으로라도 과거를 청산했다면 지금 어떠했을까?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대에라도 수십 년 후의 미래를 내다보고 그렇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아마 꽤 달라졌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이 등장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언론부터가 달라졌을 것이다. 국민들의 의식이 바뀌고 역사를 보는 눈도 달라졌을 것이므로 지금처럼 국민들을 우습게 보고 두려움 없이 역사를 되돌리는 짓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역사에 대해 가정법을 쓰는 것은 부질없고 허망한 짓이라고 한다. 지나간 일이라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다짐은 대개 이런 가정법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제 그 가정법을 우리 자신을 상대로 다시 한 번 써 보는 것은 어떨까? ‘민주화시대가 열린 후 우리가 좀 더 깨어 있어, 피 흘려 얻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더 많은 노력을 했더라면 어떠했을까?’라는 가정법이다.
확실히 ‘자유를 지키는 자유인’으로 살아가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유명한 프랑스 혁명사 사가(史家)인 조르주 르페브르(Georges Lefebvre)는 자신의 프랑스 혁명사연구를 끝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노예로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사는 것이 더욱 힘들며, 때로 사람들이 자유를 포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유는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의 자유가 성스럽게 살 것을 요구하듯이, 용감한, 그리고 때로는 영웅적인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