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내부자들>
영화적 허구가 아닌, 현실의 재구성
정원철 회원
디스토피아 aka. 헬조선
은행의 불법대출 사건, 재벌기업의 비자금 조성과 대선자금 비리, 기득권 언론과 썩은 정치권의 결탁, 정치인, 언론인 등에 대한 성 접대, 유력 대선 후보조차 ‘왕’으로 모시는 재벌. 그들의 뒤에서 민원을 해결해주며 여성 접대부를 제공하는 조직폭력배 출신 연예기획사 대표. 내부 고발 후 조직을 떠나야 하는 공익 제보자. 이 모습들은 영화 속의 허구일까요, 대한민국의 현실일까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건과 캐릭터는 어쩌면 우리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것 들입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관련된 실제 사건들과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적당히 ‘꼬리 자르기’ 식으로 마무리되곤 했습니다.
영화는 최근 유행하는 절망적 현실을 드러내는 말, ‘헬조선’을 보여줍니다. ‘족보’ 혹은 ‘타이틀’이 없으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성공할 수 없는 현실, 능력보다는 높은 곳과 닿아 있는 연줄이 더 중요한 현실. 아무리 큰 부정과 비리라도 그것이 권력이 있는 자들의 것이라면 적당히 마무리되는 현실. ‘헬조선’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수저 계급론’의 모습도 영화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족보’도 없는 검사 우장훈(조승우 역)에게 부장검사가 이야기합니다. “그러길래 잘 태어나지 그랬냐?”
최근 전 서울시장 오세훈은 한 강연에서 ‘헬조선’이라는 표현에 대해 "개발도상국에 가서 한 달만 지나보면 금방 깨닫는 게 국민적 자부심"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전 새누리당 대표이자 현대중공업 회장 정몽준의 아들은 세월호 사고 후 페이스북에 “국민 정서 자체가 굉장히 미개”하다는 글을 올려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전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아는 승무원들에게 저지른 “슈퍼갑질”을 통해 큰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요. 이 사례들을 통해 기득권이 국민을 바라보는 태도를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요? 어쩌면 그들에게는 대한민국은 살기 좋은 나라, 기업하기 좋은 나라이고, 쌓여가는 가계 부채, 청년들의 고통, 따라잡을 수 없는 전셋값, 갈수록 빈곤해지는 노년층의 문제 등은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개인적 고난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극중 기득권 언론 ‘조국일보’의 이강희(백윤식 역) 주간은 재벌 회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대중은 개, 돼지입니다.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정치권력 주변의 죽음
극중에서 미래자동차에 불법 대출을 해줬던 은행장이 검찰에 출두합니다. 대선 전에 ‘먼지’를 털고 가려는 이강희 논설주간의 설계였습니다. 조사과정에서 우장훈 검사의 추궁에 괴로워하던 은행장은 알 수 없는 번호로 자신의 성 접대 영상을 전송받습니다. 괴로워하던 은행장은 검찰청 건물에서 뛰어내립니다. 이강희 논설주간의 책상에는 ‘검찰의 강압적인 수사로 인한 은행장의 투신자살’이라는 글이 완성되어 있습니다.
지난 7월 국가정보원이 대선과정에서 이탈리아의 해킹프로그램을 사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담당자가 빨간색 마티즈에서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난 해 3월에는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 당시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국 과장이 자살을 기도했다가 ‘최근의 기억’만 잊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일이 있습니다. 2011년에는 박근혜의 동생 박지만 관련 재판의 주요 증인인 오촌 조카가 또 다른 오촌 조카에 의해 살해당하고, 범인인 오촌 조카도 자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올 해 4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여당 정치인들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전달했다고 주장을 남기며 자살했고, 세월호의 소유주인 유병언의 죽음은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마무리 되었습니다. 정치권력과 국가기관 주번에서 일어난 자살, 살인, 의문사들은 그저 개별적 사건이라고 생각하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브로커 언론
극중 이강희는 언론사 논설주간입니다. 그는 배후에서 재벌과 정치권 등을 연결시키는 브로커 역할을 합니다. 검사 출신인 장필우(이경영 역)를 정계에 데뷔시키고 미래자동차라는 스폰서를 붙여줍니다. 또 세종로와 경복궁, 청와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재벌과 정치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논설을 씁니다. 그가 쓰는 논설은 그대로 여론이 되어 재벌과 정치권력을 기쁘게 합니다.
안상구(이병헌 역)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미래자동차 비자금 파일을 가지고 양심선언을 합니다. 검찰에 소환된 이강희 논설주간은 검사에게 이야기합니다. “누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서 ‘볼 수 없다’가 ‘보여진다’, 또는 ‘매우 보여진다’로 바뀔 수 있다. 기자들이 자신과 정치깡패 안상구의 말 중 누구 말을 더 신뢰하겠는가.” 그리고 검찰 수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자신의 입장을 밝힌 후 이렇게 덧붙입니다. “마지막에 단어 세 개만 바꿉시다. ‘볼 수 있다’가 아니라 ‘매우 보여진다’로.”
언론을 이용한 재벌과 정치권력 비호 또한 현실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당장 ‘조중동’을 펼쳐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종북’, ‘포퓰리즘’, ‘막말’, ‘폭력집회’ 등 현실의 이강희가 썼음직한 글들이 보일 것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표현되는 왜곡된 언론환경 속에서 언론시민단체인 민언련의 활동이 중요한 이유를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부고발자
출세가 목표였던 검사 우장훈은 ‘내부고발자’가 되어 재벌권력과 정치권력, 언론권력의 결탁을 고발합니다. 그리고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여러 공익 제보자가 있었습니다. 삼성의 비자금 조성과 정치권, 사법권, 행정권에 금품살포를 고발했던 김용철 변호사, ‘국정원 대선 여론조작 사건’의 경찰 수사결과 왜곡발표를 고발했던 권은희 수사과장, 군 부재자투표 부정을 고발했던 이지문 중위, 황우석 줄기세포 조작을 고발했던 과학자들, 군 납품 비리를 고발했던 김양수 소령, 삼성에서 뇌물을 받은 검사들의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국회의원 등.
흔히 ‘내부고발자’로 이야기하는 공익제보자들은 조직 내에서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좌천되거나 조직 내 ‘왕따’가 되어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대부분 조직을 떠났습니다. 위에 쓴 공익제보자들 또한 대부분 자신이 속해 있던 조직에서 나왔거나 내쳐졌습니다. 이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조직들로부터도 배척당했습니다. 당장 생계가 곤란해지기도 하고 새로운 직업을 구하기도 힘들어집니다. 우리 사회의 공익제보자들에 대한 처우는 매우 열악합니다.
원작 만화 작가인 윤태호는 ‘모든 균열이라는 것은 내부의 조건이 완성시킨다’는 구절을 쓰면서 연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민들이 알기 힘든 ‘그들’의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고발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여겼겠지요. 우리 사회의 공익제보자들에 대한 태도, 보호 장치 등을 다시 한 번 돌아봐야겠습니다.
“대한민국 기득권이 영화 <내부자들>을 싫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