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인터뷰_송민희] “죽은 시대의 망령이 돌아왔다”(2015.12.)
등록 2015.12.0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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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 송민희 회원

“죽은 시대의 망령이 돌아왔다”

 

 

 

유민지 활동가

 

약속을 잡기가 너무 어려웠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하루도 쉰 날이 없다고 했다. 11일, 언론단체들이 주관한 국정화 반대 촛불문화제에서도 만났지만, 다음 일정 때문에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 이리저리 일정을 맞춰봤지만, 쉽지가 않았다. 결국 11월 14일, 민중총궐기 현장에서 그녀를 만났다. 장소는 사전 결의대회가 있던 대학로였다. ‘집회현장에서 흔들리지 말고, 인터뷰를 열심히 하자’라고 결심했는데, 만나자마자 “민지야, 이것 좀 들고 올라가자”한다. 졸지에 국정화 반대 발언자 뒤에서 “친일독재미화 교과서 반대한다” 피켓을 높이 들고 서있었다. 오며 가며, 30분은 족히 들고 있었던 것 같다. 인터뷰 해준다고 꼬셔놓고 ‘용역’으로 쓴다며, 도대체 인터뷰는 언제해 줄 거냐고 툴툴대자, “이따가 인터뷰 열심히 할게~”하며 눈을 찡끗한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연신 웃음이다. 으이구….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  -글_유민지 활동가/사진_이병국 회원

 

 

2000년, 언론학교, 로맨틱, 성공적
“민언련에 맨 처음에 온 게 2000년이었어요. 언론학교 35기. 몸이 많이 아파서 큰 수술을 받고 쉬고 있었어요. 휴학도 꽤 한 상태였죠. 집에서 『말』지를 읽다가 언론학교 광고를 보고 ‘한 번 들어볼까?’하는 마음에 갔죠.”
그 한 걸음이 민희 씨의 삶을 흔들었다.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시민들이 뭔가 더 좋은 걸 만들겠다고 다 늦은 저녁시간에 강의실로 모여든 거잖아요. 저는 중간에 빠지고, 출석도 다 못했는데…. 끝까지, 뜨겁게 토론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충격이었죠.”
그 모습이 민언련의 모습으로 남았다. 언론학교 강의가 끝나고, 활동가들과 민언련 회원들이 분과에 들어오라고 홍보를 하는데, 그녀는 요리조리 피해다녔다.
“쑥스러워 피해 다녔어요. 그러다가 김시창 활동가에게 잡혔어요. 송년회에 한번 오라고 해서 참석했다가, 노래분과 활동을 하게 됐죠.”

 

언제나 플랫(♭) 가끔은 샵(#)
그러고 보니, 그녀는 노래를 참 좋아했던 것 같다. 눈을 감고 기타 소리에 맞춰 노래를 읊조리던 그녀의 모습이 내 기억 어디선가 튀어나온다.
“제가 노래를 잘하지 못하지만, 노래를 워낙 좋아해요. 70-80년대 노래는 다 꿰고 있죠.”
그랬다. 내가 듣기엔 고리타분한 노래들, 옛 이야기들을 그녀는 줄줄 꿰고 있었다. 다섯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한 스무살은 차이나는 사람과 대화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요즘 나는 ‘고리타분’ 했던 노래를 오히려 찾아 다니며 듣고 있다. 5년 전 그녀가 이제서야 나에게 번졌나보다.
“막내 이모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해직됐어요. 전교조 해직교사였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외할머니를 좋아하고 따랐는데, 이모와 같이 살고 계셨거든요. 할머니네 놀러갔다가, 이모 방에 들어가서 어른들이 읽는 책도 몰래 읽곤 했죠. 워낙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는데, 이모 책 읽고 고민도 많이 했어요.”
이모를 통해 알게 된 민중가요가 참 좋았다고 했다. 대중가요와는 또 다르게, 가사가 좋고 마음이 와닿았다고…. 그 어린 나이에 민중가요 가사를 이해하고 있었다니, 활동가로 살 운명이었던 게 틀림없다.
“어쨌든 이런저런 인연으로 노래분과를 했는데, 그 활동이 너무 좋았어요. 내 동갑 친구들이 분과에 들어와서 서로 어울려 다니면서, 기타 들고 노래 부르고….  학교를 졸업하면서 노래분과 활동도 끝났죠.”
노래분과 뿐만이 아니다. 신문분과 활동, 각종 캠페인, 집회 등 당시 민언련 행사라면 어디든 그녀가 있었다.
“학교를 한학기만 다니고 휴학하면서, 내 문제에만 갇혀있었어요. 내가 공익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내 문제에만 매달렸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 민언련 활동으로 많이 해소된 거 같아요. 당시 안티조선운동을 한참 할 때였는데, 작은 힘이지만 열심히 보탰죠.”

 

“온풍기보다 네가 필요해~”
그렇게 회원활동을 하며 학교를 졸업했다. 전공이 역사(歷史)학이라 역사문제를 다루는 작은 인터넷 방송국을 1년 정도 다녔다.
“유적을 찾아다니는 건데, 그것도 재밌었어요. 그런데 회사 운영에 문제가 있어서 일하던 사람들이 다 같이 나오게 됐죠. 그때가 마침 광복 60주년이었는데, 인터넷 방송할 때 자문을 받으면서 연을 맺었던 민족문제연구소의 추천으로 문화사업추진위원회에 들어갔죠.”
그것이 민언련에 들어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줄이야!
“추진위를 해소하는데 사무실에서 쓰던 온풍기 같은 물품이 남았어요. 이걸 처분해야하는데, 민언련 생각이 나는 거에요. 이걸 기증하러 갔는데, 추진위 끝났냐면서, 사람 뽑고 있다고 반가워 하는거에요.”
민희 씨는 당시 시베리아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한달정도 되는 긴 여행이었다.
“거절했죠. 시베리아 열차에서 앞으로 뭐하고 살까 고민해보자하는 마음으로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한 달 정도 걸리니 어려울 것 같다고 했는데, 전미희 언니가 ‘기다려주마’ 이러는 거에요.(웃음)”
그래서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얼떨결에 민언련 활동가의 삶을 시작하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단체였지만, ‘나는 활동가 될 것이다’라는 진지한 마음으로 시작하지는 않았어요.”
그럼 언제 진지해졌냐는 물음에, “나는 원래 시작하면 또 바로 진지해지는 사람이니까~”하며 웃는다.
민희 씨가 들어오자마자 황우석 사태가 터졌다. 당시 ‘국민 영웅’이었던 황우석 박사의 문제를 PD수첩이 고발했고, 민언련은 PD수첩을 지지하는 입장을 냈다. 그러자 황우석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민언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화가 쉴 새 없이 걸려오는 거에요. 전화 받자마자 욕하는 사람도 있고, 고성도 오가고…. 황우석 지지 카페에 실시간으로 기록이 올라오기도 했어요. ‘송민희라는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박제선이라는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이러면서요.”
황우석 사태는 <제보자>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한민국을 들었다놨다 한 해프닝이었다.
“그해 겨울이었을 거예요. 서울대에 언론학교 포스터를 붙이러 갔어요. 라디오를 들으면서 서울대 교정을 걸었죠. 포스터를 붙이려고 청테잎을 뜯는데 라디오에서 황우석이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방송이 나오는 거예요. 그 추운 날 서울대에서 그 방송을 듣는데 영화속 한 장면 같았어요. 그날의 잔상이 아직도 가끔 떠올라요.”

 

 

2008년은 최고(苦)의 해, 출국금지까지 당했다
이명박 정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8년, 신문모니터 담당 활동가가 됐다. 광우병 사태가 터지고, KBS 정연주 사장이 축출되는 등 정권의 언론장악 본격화 됐다.
“당시 주요의제가 조중동의 왜곡 문제였어요. 촛불을 든 시민들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앞으로 몰려가 항의하기도 했고, 광화문에서부터 여의도까지 걸어 KBS에서 촛불을 들기도 했죠. 제 담당이 신문이었으니까 더 치열해야 했죠.”
거기에 더해 기소까지 당했다. 당시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이 벌어졌는데, 신문 모니터 담당자인 그녀가 민언련 논평을 해당 카페에 올려 공유하고 홍보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 24인의 운영진 중 한명이 됐다. 검찰은 카페 운영진 24인을 모두 기소했다.
“출국금지까지 당했어요.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갔는데, 검사가 민언련을 배후로 몰고가는거에요. 회의실도 제공하고 연락망 역할도 했다는 거죠. 아니, 회의할 곳 없어서 장소를 빌려준 건데 모든 걸 다 민언련 배후로 몰고 가더라구요.”
검찰조사는 열 시간 넘게 진행됐다.
“조중동 왜곡보도에 분노해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을 민언련과 어떻게든 엮어서 뭘 만들려고 하니까 마지막엔 화가 나더라구요. 신문에도 민언련이 배후인 양 나왔어요. ‘민언련 활동가 송 모씨가’ 이러면서….”
5년간의 법정 싸움 끝에 민희 씨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리고 민언련에서 2년간 더 활동하다 건강상의 문제로 퇴직했다.

 

역사 왜곡 세력과의 싸움, 또 다른 시작
“민언련 활동을 그만두고,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스스로 치유하는 시간이라고 여겼죠. 자전거 타고, 이리저리 다니며 평소에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했죠. 그러던 차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12년이 유신 40주년이라고 ‘딱 1년만’ 도와달라고 하더라고요.”
또 얼떨결이었다. ‘유신의 부활을 막아내자’며 들어갔는데, 부활을 막지 못해 아직까지 그만두질 못하고 있다며 웃었다.
“교학사 문제가 터지면서 된통 당했어요. 5개월 동안 정말 바빴죠. 학자들을 들들 볶아가면서 교학사 교과서 문제를 분석해달라고 하고, 이리저리 전화 돌리고, 연대체를 구성하고…. 그래서 교학사 교과서의 수천 개의 오류를 찾아내고 이슈화한 거죠. 정말 정신 없었어요.”
그 5개월이 너무 힘들었다. 밖에서는 생존투쟁을 하고 있는데, 우린 무슨 교과서 오류나 찾아내는 배부른 투쟁을 하고 있는가하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1월에 들어서자마자 교학사를 선택한 학교에서 철회가 막 이어지는 거에요. 시민들의 움직임이 빛을 본거죠. 그땐 정말 하루하루가 너무 감동이었어요. 그냥 막 눈물이 나더라구요. 결국 교학사 교과서는 0.01% 채택률에 그쳤죠.”
그 당시의 벅참이, 그 순간의 짜릿함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오래 운동을 한건 아니지만, 처음 승리를 맛봤어요. 주위에서도 고생했다고 격려해줬지요. 자신감과 희망이 다시 생겼어요. ‘이 문제는 이겨야 하는구나, 이길 수 있구나’ 다시 힘을 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또 다시 국정화 문제가 터졌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에 맞춘 역사 국정화
“거리에 학생들이 나와요. 얼마나 통통 튀는지 몰라요. 여태껏 교육 받은 건 다양성인데, 난데없이 국정화라니 애들이 못견디는 거죠. 아이들이 발언하는 걸 듣고 있으면, 정말 감동이에요.”
역사 교과서 문제를 얘기하는 그녀의 눈빛과 표정이 단호하다.
“있을 수 없는 일,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70년대로 회귀하고 있는 거에요. 교육을 통제하고 사상을 획일화시키고 시키는 건 너무 위험한 거잖아요. 이미 다 끝난 시대의 이야긴데, 죽은 시대의 망령이 돌아온 거죠.”
정부는 일반 교육과정도 다 무시한 채, 역사교과서만 1년 앞당겨 개편을 하겠다고 나섰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맞추려는 시도라는 말이 무성하다.
“역사를 배우는 건 민주시민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사회가 어떻게 지켜졌는지, 어떤 부침이 있었는지를 확인하고 앞으로 우리의 과제를 풀어가는 거죠. 저들이 하고 있는 행동 하나하나가 또 다시 역사에 남게 되겠죠.”
민언련의 역할에 대한 말도 덧붙인다.
“역사로 남도록 기록하는 것, 시민들에게 알리는 역할이 언론이잖아요. 그 언론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건 민언련, 우리의 역할이고요. 그래서 우리의 싸움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바쁜 와중에 그녀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지난 학기에 광복 70주년이라 행사가 많아서 휴학을 했어요. 그런데 메르스 때문에 행사가 많이 취소되고 오히려 한가했지요. 8월에 등록할 때는 국정화는 절대 안 될 거라 생각해서 등록했죠. 밀어붙이는건 말이 안되니까요.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한 거죠. 하루도 쉬어본 적 없는데, 그 와중에 학교 레포트 쓰고 있어요. 학교에서도 대단하다고 해요.”
학교에서도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민희 씨의 활동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힘내라고, 잘 싸우라고 응원한다. 그녀의 움직임이 주변을 변화시키고 있다.
“앞으로 활동가로 살아야겠다고 정한 순간, 좀 더 공부하고 전문성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혼자 책읽는 것과 다른 느낌이죠. 한학기에 500만원 정도 드는데, 그 가치가 되도록 더 열심히 잘하고 싶어요.”

인터뷰가 끝나고, 이미 행진을 시작한 집회 대열을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차벽으로 가로막혀 멈춰버린 군중 속으로 그녀가 들어간다. “조심해요. 힘내고요!” 집회에 참가한 이가 다치진 않을까 염려하는 시대, 누군가 민주주의 수레바퀴를 되돌려버린 시대, 역사의 기록을 거짓으로 조작하려는 시대에 그녀와 우리가 살고 있다. 온 몸으로 맞서는 그녀를, 그리고 우리를 응원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