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글]
“아버지는 군사쿠데타, 딸은 역사 쿠데타!”
박석운 공동대표
“아버지는 군사쿠데타, 딸은 역사 쿠데타!”
이번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카피가 되었다. 박정희 소장은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켜 1년전 4월 시민혁명으로 등장한 민주정부를 전복시켰다. 박정희 소장은 시류를 타고 배신과 변신을 거듭하는데는 귀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대신, 일국왕(이른바 “일본천황”)에게 충성맹세하는 혈서를 쓰고 일제의 괴뢰 정부인 만주국 산하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에는 일본육사를 거쳐 만주의 관동군에서 육군 소위로 시작하여 일본군 중위로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그는 일제가 패망하고 난 뒤 귀국하여서는 재빨리 변신하여 한국군 내 남로당 핵심요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다가 여순반란사건 당시 남로당 요원임이 발각되자, 또다시 변신하여 동료들의 명단을 밀고해 바친 댓가로 목숨을 구걸하게 된다. 이후 그는 한국군 내 만주 관동군(일본군) 인맥의 도움을 받아 한국군 내에서 승승장구하여 육군 소장까지 승진하였다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게 된다.
쿠데타 이후 그는 민정이양을 약속하고 국방이라는 군인 본연의 임무로 복귀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조금 뒤 이 약속을 뒤집고 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당시 대통령은 2번 밖에 못하도록 헌법에 명시되었으나, 그는 3선개헌을 감행하여 독재권력을 이어갔다. 1971년 치러진 그의 3번 째 대통령선거의 상대가 바로 김대중 후보였다. 당시 김대중 후보가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 음모를 집중 제기하자, 박정희 후보는 “이번이 마지막 출마”가 될 것이라고 선거공약하게 된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 그는 탱크와 군홧발을 동원하여 국회를 해산시키고 1인 영구집권체제를 완성시키게 된다. 친위쿠데타(10월유신)를 통해 비상국무회의에서 박정희가 임명한 장관들에 의해 “제정” 절차를 거친 것으로 참칭된 유신헌법에 따라, 이제 더 이상의 대통령선거도 없어지고, 대신 체육관에서 대통령이 “추대”되는 상황이 되었다. 과연 박정희의 공언대로 그의 대통령 출마는 더 이상 없어도 영구집권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국사 교과서 국정화가 추진되었다. 친위쿠데타 바로 다음해인 1973년 6월 9일 청와대에서 국사교과서의 국정화방안에 대해 보고되었고, 이어서 국사교과서는 국정화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되고 난 뒤에도, 광주항쟁을 유혈진압하고 집권한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 치하에서도 국사교과서는 여전히 국정인 상태로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위한 1987년의 6월민주항쟁 이후, 비로소 국정교과서는 폐지되고 검·인정제로 전환되었다.
2012년 8월 20일 새누리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날 박근혜후보는, “5·16에 대해 몇 년간 혁명이라고 나온 적도 있고 군사 정변이라고 한 교과서도 있고 쿠데타라고 한 교과서도 있고 다양하게 기술되고 바뀌어왔다. 학생들은 교과서대로 배우겠죠. 그러나 정치권에서 국민의 생각이 다양하게 있는데 옳으니 그르니 끝이 없는 싸움을 하면서 이렇게 생각하라고 몰아가면 국민이 분열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며 관점의 다양성을 정치권에서 강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고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는 태도를 표변하여, 여론의 압도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고 있다.
최근 청와대 회동에서는 “국정교과서를 중단하고 경제 살리기와 민생에 전념해 달라”는 야당대표의 요청에 대해, 박대통령은 “현재의 교과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우리 현대사를 태어나서는 안 될 정부, 못난 역사로 가르치는데 이렇게 패배주의를 가르쳐서 되나. 이걸 바로 잡자는 순수한 뜻”일 뿐이라 강조했다. 또한 “국민 통합을 위한 올바르고 자랑스러운 역사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우기면서,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로 고속 역주행을 감행하고 있다.
박근혜 ‘영애’는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 때 일어난 5·16 쿠데타로 졸지에 “공주” 비슷하게 된 이후, 줄곧 청와대에서 살았다. 대학을 졸업한 해이자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1974년부터는 퍼스트레이디 행세를 하면서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공범 역할을 하다가, 아버지가 암살당한 후 만 27세의 나이로 청와대에서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는 것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대통령의 치부를 가리는 한편 박정희를 찬양·미화하려는 목적도 크지만, 한편으로는 셀프미화 또는 셀프찬양하고자 하는 측면도 있다고 본다. 왜냐 하면, 자신이 유신독재의 공범으로 활동한 역사적 사실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유신독재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아버지 문제가 아니라 박근혜 자신의 문제로 느끼기 때문이다.
절대 다수의 역사학자들과 국민 대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근혜정권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역사쿠데타”를 강행하는 것은, 조중동과 종편방송 등 쓰레기 언론 뿐 아니라, 바로 왜곡편파보도와 정권바라기 방송만 일삼고 제대로 된 비판과 검증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서, “언론”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공영방송의 몰락에도 그 책임이 있다. 아버지의 군사쿠데타를 이은 딸의 역사쿠데타를 저지시키기 위해, 이제 주권자들이 전면에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