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이란 무엇인가? (김경실)
등록 2015.02.24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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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 『걸작에 관하여』 샤를 단치/ 미디어윌


걸작이란 무엇인가?


김경실 민언련 부이사장




“나는 걸작의 기준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책을 펼치고 몇 장 넘기지 않아서 필자 샤를 단치의 이런 고백을 만나게 된다. ‘걸작이 꼭 갖추어야 할 10가지 조건’까지는 아니어도, 일정 정도 걸작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그것이 필자 개인의 아주 자의적인 것이라 할지라도-을 알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책을 든 독자로서는 낭패스러운 일이었다. 그럼 이 책은 대체 걸작에 대하여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것인가. 걸작의 조건이나 기준 대신 이 책을 채우고 있는 것은 필자가 걸작이라 칭한 작품들-주로 서구의 고전들로, 적어도 나에게는 생소한 작품들이 대다수이다. 그래서 간혹 나오는 일본 작가들의 이름이나 중국 시에 대한 언급에는 좀 더 눈길을 주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한국 작가의 이름은 찾지 못했다-에 대한 이야기와 걸작을 정의하는 짧고 강한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 이를테면 “모든 걸작은 독창적이다. 독창성이 여러 걸작들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문학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걸작은 대답하지 않는다. 걸작은 스스로 자신의 범주를 만든다” 등등. 그중에서도 단연 내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비형식에 대한 형식의 승리가 걸작이다”라는 문장이었다. 그것이 곧 ‘글짓기’란 단어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글짓기와 글쓰기 사이 


글을 ‘짓는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 가로 10줄, 세로 20열로 이루어진 200개의 빈칸이 들어찬 빨간 줄 원고지를 떠올리게 하고, 그래서 커서가 반짝이는 모니터 위에 자판을 두드려 자유자재로 쓰고 지우는 요즘은 고루한 아날로그 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지는 단어. ‘다소 작위적인 느낌, 자연스럽지 못한, 틀에 얽매인, 형식적인’ 등등의 어감을 가진 이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된 것은 어떤 시인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그는 글은 마음 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이 아니고, 분명한 설계도를 가지고 단어와 문장들을 쌓아올려 ‘짓는 것’이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타고난 재능에 신비한 영감이 더해져 열정적으로 써내려 가야만 훌륭한 문학이 탄생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단호하고 확신에 찬 이 시인의 정의는 새삼 ‘글쓰기’와 ‘글짓기’의 사이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형식을 파괴한다는 말은 도전적이기도 하고 뭔가 새로운 창조를 해냈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아무 형식이 없이 유의미한 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형식의 파괴가 신선한 시도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일정한 성취에 이르려면 ‘어떤’ 형식을 벗어나기 힘들다. 형식이 없다는 말은 구조가 없다는 말이고, 구조가 없다는 말은 판단할 아무 근거가 없다는 말이다. 


스토리 혹은 주제만으로 걸작이 탄생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도 여러 번 걸작으로 언급하고 있고, 으레 20세기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기억에서 기억으로 이어져 가고 특별한 스토리도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도 없이 굽이굽이 흘러간다. 이야기는 길고, 지루하고, 느닷없이 여기저기 건너뛰고(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이 걸작 읽기에 번번이 실패하는가)… 한마디로 정교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악필로 정평이 나서 그의 전담 편집자 외에는 철자를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는 프루스트의 원고들에는 군데군데 빼곡히 적힌 다양한 크기의 메모조각들이 누덕누덕 덧붙여져 있다. 반드시 들어가야 하므로 나중에 써넣은 것들이다. 그 메모 조각 속의 글들은 단지 ‘비자발적 기억들의 연속’인 스토리를 이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었을까. 


걸작, 비형식적인 인생에 맞서는 어떤 형식 


“이렇게 말하는 작가들이 있다. “어떤 힘이 나에게 불러주었다. 나는 받아쓰기만 했다…….” 책을 쓰다 보면 작가들은 어떻게 썼는지 모르고, 또 어떻게 쓰는지를 설명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걸작은 형식을 부여하고자 존재하는 것이지 의미를 부여하고자 있는 것이 아니다. 비형식에 대한 형식의 승리가 걸작이다. 비형식이 걸작의 가장 큰 적이다.”(74~75쪽) 

이것이 걸작의 조건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 이 책에서 내가 찾은 걸작에 관한 적절한 정리가 아닐까 싶다. 우리의 인생이 비형식적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