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44살에 뽑은 21세기 영화 44편 첫 번째, 44위 - 38위
등록 2015.01.28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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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살에 뽑은 21세기 영화 44편

첫 번째, 44위 - 38위



김현식 회원



나는 마흔네 살이다. ‘남자 나이 마흔이면 가슴이 쓸쓸해진다.’ 는 말이 와 닿는다. 불쑥 허전함이 밀려와 무작정 시내를 걷는 때가 많다. 특히 광화문과 종로 일대 극장은 도피처이자 안식처다. 영화를 보고 나면 마음이 한결 충만하다. 4회(2월, 5월, 8월, 11월)로 나눠 소개할 영화 44편은 2001년부터 2014년까지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다. 그럴싸한 명분이나 맥락은 없다. 마흔네 살이라서 44편이다. 국내외 유수의 영화매체가 발표하는「** 베스트 영화」를 나도 뽑고 싶었다. 감성이 차오른 44살 남자의 영화 수다로 이해하면 좋겠다. 이 중 한 편이라도 각박한 일상에 작은 위안이 되길 바란다.


44위. 2046 (홍콩, 감독 : 왕가위 / 출연 : 장쯔이‧장첸‧기무라 타쿠야‧양조위‧장만옥‧공리)


사랑과 추억을 주제로 삼은 <아비정전>, <화양연화>를 잇는 3부작의 완결판이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인연은 엇갈릴 수 있다.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스쳤다면 우리의 인연도 달라졌을까.” 극 중 주모운(양조위)의 독백처럼 왕가위 영화 속 등장인물의 사랑은 언제나 엇갈린다. 차갑고 슬프다. ‘2046’은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던 1997년, 중국 정부가 ‘앞으로 50년 동안 홍콩에 변화를 가져오지 않겠다.’고 약속한 마지막 해이다.


43위. 쓰리 타임즈 (대만, 감독 : 허우 샤오시엔 / 출연 : 장첸‧서기)


부제 <最好的時光>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세 번의 시간은 오로지 사랑을 위해 기억될 순간이다. 영화는 '연애몽(戀愛夢)-1966년 가오슝', '자유몽(自由夢)-1911년 대도정', '청춘몽(靑春夢)-2005년 타이베이' 세 편으로 구성됐다. 세 편 중 첫 번째 이야기 ‘연애몽’이 가장 애틋하다. 1966년 가오슝의 어느 당구장에서 처음 만난 종업원 슈메이(서기)와 휴가를 맞아 그곳을 방문한 군인 첸(장첸)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며 사랑을 키운다. 어느 날 첸은 휴가를 맞아 다시 당구장에 오지만 슈메이는 당구장을 떠났다. 플래터스가 부른 OST ‘Smoke Gets in Your Eyes’와 데미스 루소스의 'Rain and Tears'가 구슬프다.


42위. 울지마 톤즈 (한국, 감독 : 구수환 / 출연 : 이태석 신부)


아프리카 수단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 톤즈에서 헌신하다 마흔여덟 나이로 생을 마감한 고 이태석 신부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톤즈의 아버지이자 의사, 선생님, 지휘자, 건축가였던 쫄리 신부님 이태석. 영화 시작은 생전의 이 신부가 가수 심수봉의 노래 “그때 그 사람” 을 연주하는 장면이다.

이때부터 눈물이 쏟아진다.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 꿈을 현실로 만든 이태석 신부의 삶은 자체로 거룩하다.


41위. 야곱 신부의 편지 (핀란드, 감독 : 클라우스 해로 / 출연 : 카리나 하자드‧ 헤이키 노우시아이넨)


종신 복역 중 사면을 받고 출소한 레일라는 눈이 보이지 않는 야곱 신부에게 온 편지를 읽어주는 일을 한다. 삶의 고통을 털어놓은 이들의 편지에 답장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야곱 신부. 레일라는 야곱 신부의 일을 의미 없는 일이라 여긴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더는 편지가 오지 않자 야곱은 실의에 빠지고 레일라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는다. 영화는 사는 게 힘들고 고독하지만,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상영시간 74분 동안 영화는 매우 절제됐다. 하지만 믿음과 구원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40위. 하바나 블루스 (스페인‧쿠바, 감독 : 베니토 잠브라노 / 출연 : 알베르토 요엘‧로베르토 산마르틴)


Habana, 영화제목이 ‘하바나’인 건 정말 촌스럽다. '아바나‘가 당연히 멋지지 않은가?

무명 뮤지션인 루이와 티토는 가진 것 없이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음악을 향한 열정만큼은 대단하다.

어느 날 “스페인 스카우트”라는 일생일대의 제안을 받고 부푼 꿈으로 설렌다. 하지만 이들의 계약이 사실상 노예계약이란 걸 알게 되면서 고민에 빠진다. 영화 내내 올드아바나 뒷골목 풍경과 진심으로 음악을 즐기는 쿠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루이와 티토가 음악을 생명처럼 여기며 고단한 일상을 극복하듯 쿠바 사람들에게 음악은 아픔을 치유하는 원동력이다. 한 번쯤 아바나를 방문하길 권유한다. 말레콘 방파제를 걷고 나면 절로 블루스 선율이 떠오를 테니.


39위. 클로저 (미국, 감독 : 마이크 니콜스 / 출연 : 나탈리 포트먼‧주드 로‧줄리아 로버츠‧클라이브 오웬)


최고의 장면은 댄(주드 로)이 연인 앨리스(나탈리 포트먼)에게 안나(줄리아 로버츠)와의 비밀관계를 털어놓을 때이다. “난 사랑에 빠졌어.”(댄) “숙명처럼 말하네? 사랑은 순간의 선택이야. 거부할 수도 있는 거라고. 자기한테도 분명 선택의 순간이 있었어.”(앨리스)

등장인물들은 매우 가깝지만 하나가 될 수 없고 서로를 사랑하지만, 서로를 다 알 수는 없다.

마치 불완전한 사랑인 것 같지만 모든 껍데기를 벗어버린 현실적인 사랑이다. 그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한! 오프닝과 엔딩에서 흐르는 데미안 라이스의 OST ‘The Blowers Daughter’는 주옥같다.


38위. 러블리, 스틸 (미국, 감독 : 니콜라스 패클러 / 출연 : 마틴 랜도‧엘렌 버스타인‧아담 스콧)


가족도 친구도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80대 노총각(!) 로버트 말론에게 사랑스럽고 당찬 메리가 다가온다. 처음 만나는 날 메리는 다짜고짜 로버트에게 데이트를 신청한다.

“만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됐지만, 당신과 함께 있으면 평생을 함께한 사람 같아요.” 로버트의 고백에는 커다란 복선이 깔렸다. 순진한 로버트와 신비스러운 메리의 사랑은 순탄하게 이어질 것인가.

치매를 앓으면 인생의 단 한순간만 제대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나머지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럼에도 사랑은 어떤 순간에도 처음은 설렘이다. 마치 로버트처럼.


5월호에서는 37위부터 26위까지 영화 12편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