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 | 김용범 회원
너와 나의 연결고리 #민언련
유애리 회원
5년 전 민언련과 인연을 맺은 뒤 줄기차게 사무처를 들락거린 김용범 회원을 만났다. 신문분과 활동을 하면서 2년 6개월 동안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모임에 참석할 정도로 담당 활동가 외에 엄청난 출석을 자랑했던 그다. 그러던 그가 가끔 행사 때에만 모습을 보일 정도로 한동안 활동이 뜸하더니 작년 봄 기타를 들고 민언련에 본격 컴백했다. 근무지도 민언련 사무실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그를 사무실 인근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만났다.
2월 초면 회원이 된 지 만 5년이 되는데 민언련은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좋은 학교를 다닌 덕분에 학교에서도 민언련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어요. 은사이신 김서중 선생님을 통해서요. ‘그런 활동에도 참여해보면 좋다’ 물론 지나가면서 하신 말씀이었을 테고, 처음엔 저도 흘려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방학이 돼서 사진 배울 만한 곳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민언련에도 사진 강좌가 있다는 걸 알고 듣게 됐어요.
종강 이후 회원이 되기까지 공백이 있던데요
강좌 뒤풀이 자리에서 신문분과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때 제 반응은 ‘그래 가자, 근데 좀 더 있다 가자’는 거였어요. 공부 좀 한다는 기자 지망생들이 잔뜩 모여서 으르렁대며 토론하는 곳일 거라고만 생각했거든요. 겁먹었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오래 할 거여서 그렇게 뜸을 들였나 싶기도 해요. 어쨌든 다시 한 학기를 보내고 나서야 문을 두드릴 용기가 났어요. 책상머리에서 하는 공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도 있었고, 이미 작정하고 온 거였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 기세가 좋았어요.
신문분과 활동에 대한 소회(?) 좀 얘기해주세요
처음 와서 본 신문분과는 어수선한 분위기였어요. 활동 기간들이 짧아 분과장도 세우지 못 했고, 뭔가 하긴 하는데 보고서도 나오는 둥 마는 둥 했으니까요. 분과 전체를 놓고 볼 때, 제가 활동했던 기간은 그런 것들을 재정비하는 기간이었다고 봐요. 제가 처음 들어온 친구들에게 해주는 말이 있어요. 모니터 활동도 좋고 다 좋은데,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이 제일 좋을 거라고요. 분과 활동이 제게 남겨준 것도 역시 사람이거든요. 이름을 일일이 부르고 싶을 만큼 이곳에서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났죠.
신문분과 활동 당시 100% 출석률을 자랑했던 김용범 회원. 당시 신문분과에서 함께 활동했던 이병국 회원은 “용범이 없었으면 신문분과가 없어졌을지도 몰라요. 제가 분과장일 때 직장인이라 종종 빠졌는데 용범이가 주축이 돼 분과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죠”라고 했을 정도로 신문분과 역사에 중요한(!) 인물이었다. 김용범 회원은 민언련 행사와 다양한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해 ‘2011년 최고 회원’에 등극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2011년에는 KBS 수신료 인상 반대 서명운동에 열심히 했다고 하던데요
그때는 수신료 인상이 정말 부당하다고 생각했어요. 민언련 활동도 거기에 집중돼 있었죠. 종편을 막아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고, 수신료 인상이 종편에 먹거리를 주기 위한 꼼수였으니까, 종편을 막기 위한 최후 전선이었다고나 할까. 우리 세대가 대체로 그렇지만, 저도 선배들처럼 싸워서 이겨본 경험이 없어서 그것만은 이기고, 막아보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했죠. 지금 와서 보면 좀 허탈하기도 해요. ‘(종편이) 개국할 때만 해도 자리를 잡겠느냐, 못 버티고 망할 거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죠.
노래분과 ‘막모인 사람들’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어떻게 만들게 됐나요
민언련 노래패 '막모인 사람들'. 왼쪽부터 김미정, 김경훈, 유애리, 이가희 , 김용범, 조현준
처음 시작은 술자리에서였어요. 평소 활동하는 분과는 달랐지만, 술과 노래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던 후배 현준이하고 작당을 했죠. 처음 결의한 저희 둘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사람들은 얘들이 이걸 진짜 할 거라고 믿지 않는 눈치였어요. 이리 빼고 저리 빼는 친구들을 어렵사리 불러 모아서 지금의 멤버를 만들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취업하면서부터 민언련과 멀어지고 있다는 아쉬움이 컸어요. 이대로 가다간 사람들과도 자연스레 멀어질 판이었죠. 다시 뭉쳐서 돌아오고 싶었어요.
노래모임을 만들어서 해보니 어떤가요
솔직히 처음에는 그야말로 ‘막모인’ 상태였어요. 그런데 연습곡을 정하고 떠듬떠듬 해 나가면서 상황이 180도 달라졌어요. 다들 제대로 빠져들었던 거죠. 그게 다 음악이 주는 즐거움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개성이 다른 사람들이 음정, 박자 맞춰가며 하나의 소리를 낸다는 게 생각보다 힘든 일이거든요. 품도 많이 들고 무엇보다 멤버십이 절대적이죠. 그런 점에서 성실함과 열정을 보여준 멤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고요. 올해도 잘 준비해서 민언련 행사나 집회 때 인사드릴 수 있도록 할게요. 기대해주세요.
신생 모임이 한 해에 공연을 두 차례나 했어요
30주년 기념식 공연은 오케이, 아니 완전 땡큐였죠. 처음 시작할 때부터 ‘민언련에서 불러주는 모든 공연에 응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물론 그건 저만의 생각이었고, 다른 멤버들에게는 큰 부담이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여름 운동회 때 첫 공연을 해봤잖아요. 한번 해본 티들이 났고, 모두가 잘 즐겨줬다고 생각해요.
지금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언론과 출판 무언가가 연결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을 읽고 생각하게 만드는 도구가 바로 책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매료됐던 것 같아요. 제 경우에는 특히 출판 저널리즘에 주목했던 것이고요. 물론 당장은 하고 있는 일도 그렇고, 부딪히는 현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부분들도 많죠. 그런 것들을 해소하기 위해, 지금은 한 출판인 단체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어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문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심어주기 위한 사업들을 하고요. 사회 참여를 위한 고민도 함께하는 곳이에요. 좋은 곳이죠. 그렇게 좋은 뜻을 품고 살아가는 선배 동료들과 부대끼며, 잘 지내고 있어요.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이기도 하고요.
김용범 회원은 연결고리를 만들어 가는데 적극적인 거 같아요. 그런 측면에서 민언련에 대해 남다른 것 같은데요
저한테 민언련은 요즘말로 ‘스펙’ 같은 거죠. 훌륭한 분들 보면 거리에서, 또는 감옥에서 공부했다고 하시잖아요. 저는 아직까지 민언련에서보다 많은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낯선 사람을 만나서 저를 소개할 때마다 느끼곤 해요. 민언련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구나 하는 것을요. ‘스펙’이라는 건 중의적인 의미도 있어요. 남들이 한창 스펙 쌓을 시기에, 민언련 출근 도장을 찍으며 지냈으니까요. 그러나 잘했다고 생각해요. ‘돈 버는 일은 괴롭지만, 자기 스스로 기꺼이 하는 일은 즐겁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는데요. 이 말은 노래패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해요.
분과원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지금이 어찌 보면 분과 활동이 다시 재도약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신문, 방송, 노래패 활동을 하는 분과원들의 숫자를 합치면 1개 소대 인원쯤 되니까요. 각각의 분과들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증거겠죠. 다만, 그것 못지않게 민언련 회원으로서의 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칫 반쪽짜리 활동 밖에 못하는 것일 수도 있거든요. 그런 친구들을 보면 아쉽더라고요. 서로 열심히 해서 민언련의 진짜 전성기를 한번 만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한 시간 반. 쉴 새 없이 답변을 쏟아내는 김용범 회원에게서 ‘말을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는 이병국 회원의 기억이 사실이었을까 싶다. 민언련에 와서 말도 트이고, 생각도 좀 더 트였던 것일까. 모범답안을 준비해왔더라도 외워서는 절대 할 수 없는 민언련에 대한 속내를 확인한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김용범 회원과 민언련은 동갑내기다. 풋풋한 이십 대를 지나 서른 살 청년의 패기로 뒹굴고 숨 쉬고, 함께 성장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