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언련과 나] 기억 속에 밝게 빛나는 민언련 시절
등록 2015.01.07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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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에 밝게 빛나는 민언련 시절



우종현 회원


안녕하세요, 민언련 회원 여러분? 저는 2002년에서 03년 즈음 민언련 방송모니터위원회에서 방송모니터링을 했던 우종현이라고 합니다. 10년이 넘게 ‘민언련’이라는 공간을 떠나 있다가 불쑥 인사를 드리니 조심스럽고 설레네요. 그동안 선후배 회원님들께 소식 한번 제대로 전하지 못 했던 점을 생각하면 미안하기도 하고요. 아마도 사무처장님은 저에게 그동안의 무심함을 뉘우칠 기회를 주려 회원통신에 글을 쓰라고 하셨겠지요.


언론학교로 처음 만난 민언련


2001년 가을 제39기 언론학교를 들으면서, 민언련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당시 저는 군대에서 갓 제대한 복학생이었는데요, 군 생활을 하면서 텅 빈 머리를 무언가로 가득 채우고 싶다는 욕구 불만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그 무언가가 왜 하필 언론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학생회관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나오던 가을밤이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땅에 떨어진 언론학교 포스터가 제 발에 와서 걸렸습니다. 저는 전공이 영문학이어서 언론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또 소심해서 나서서 무언가를 하지도 못하는 성격이었는데, 이날은 혼자서 신촌의 허름한 민언련 교육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러고는 무려(!?) 5만 원이나 되는 수강료를 내고 두 달 동안 최문순 언론노조 위원장, 김동민 교수, 손석춘 위원, 정성일 평론가, 손석희 아나운서, 최민희 사무총장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의 들을 때는 저분들이 뭐 하시는 분들인지 잘 몰랐어요. 그저 5만 원짜리 강의치고는 재밌네, 괜찮네 했죠.


즐거웠던 방송분과 활동


그렇게 언론학교에 다니다 뒤풀이 하던 날 강윤경 선배가 부어주는 술에 정신을 몇 번 잃고, 이송지혜 간사가 해 주는 따뜻한 사무실 밥과 찌개를 몇 번이고 얻어먹고, 인터넷분과와 방송분과에서 양다리를 걸치던 강정훈 선배와 방송분과장이었던 최한성 선배, 김영석 선배가 사주는 술과 밥을 얻어먹고, 민언련 새내기 간사 박진형 선배에게서 욕을 먹고…. 이렇게 저는 선배들에게 얻어먹다가 자연스레 방송분과 식구가 되었습니다.

저 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방송은 별로 안 보고 신문이나 잡지를 많이 봅니다. 게다가 당시 신문분과는 조중동과 거의 홀로 대적하던 시기여서 정말 멋있었지요. 똑똑한 회원들도 많고, 모니터링 체계나 민언련 사무국의 지원도 갖춰져 있으며, 조중동이라는 적과 맞서 싸우는 정의의 사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언론학교를 마친 대부분의 회원은 신문분과에 자리를 잡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솔직히 방송분과 사람들과 마시고 먹고 이야기하는 게 좋아서 민언련을 계속 다녔습니다.



그렇다고 만날 놀고 마시고 먹은 것만은 아니었고요. 밥값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수업은 빠져도 방송분과 모임은 매주 개근했습니다. 분과장님이 주는 모니터링 숙제는 교수님이 내주는 학교 숙제보다 열심히 했습니다. 민언련 인턴 생활을 하면서 국회도서관에서 1930년대 조선일보 기사를 열람복사해 분석하고, 중앙일보 사옥 앞에서 일인 시위도 하고, 대선 관련 방송 3사 뉴스를 모니터링하면서 난생처음 SPSS도 돌려 보고, 매달 분과원들과 토론하면서 좋은 방송·나쁜 방송을 선정해서 보고서도 쓰고, 방송뉴스 연성화를 주제로 한 토론회에서 발제도 하고, 광화문에서 촛불도 들었고, 막판에는 기자가 되어 보겠다고 언론사 시험도 봤습니다.


민언련에서 기자의 꿈을 키운 2년


민언련에서 그렇게 2년 동안 어깨너머로 기자들과 PD들을 보면서 밥벌이로 기자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자들을 비판하면서 내가 써도 저들보다 낫겠다는 오만한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마음 한편으로는 언론운동을 하는 선배들처럼 운동에 투신하는 것은 겁이 났습니다. 오만하고 비겁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저는 결국 기자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면접만 가면 늘 면접관들하고 그 회사의 보도 경향을 비판하면서 싸웠거든요. 그분들은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기자 생활을 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으셨던 분들이었을 텐데 하룻강아지 같은 놈이 으르렁거리니 얼마나 마뜩잖으셨을까요.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몇 번의 시도 끝에 기자가 되겠다는 뜻을 접고 취직을 하면서 서울을 떠났고 그렇게 민언련도 그만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게 벌써 10년 전이네요. 직장생활을 하다 지금은 대전에 작은 법률사무소를 열어 일하고 있습니다. 기자는 되지 못했지만 어쨌든 글 쓰는 일을 해서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것. 이것 또한 민언련과 민언련 사람들 덕분일 겁니다.


빛나던 민언련 시절을 돌아보며



돌이켜 보면 방송분과 사람들과 함께 민언련을 다녔던 2002년, 2003년이 제가 가장 밝게 빛났던 때 같습니다. 그땐 참 고민도 많았고, 행동도 많았고, 깨우침도 많았고, 눈물도 많았던 때였어요.


사무처장님 그리고 민언련 회원님들. 회원통신에 글을 쓴다는 핑계로 요 며칠 그때를 떠올리며 흐뭇했습니다. 이 글을 메일로 보내고 나면 다시 하루하루 밥벌이 걱정을 해야 하는 퍽퍽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10년 전의 빛났던 저를 다시 기억나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