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기억이 없으면 윤리도 없다고 예술은 말한다”
등록 2014.11.21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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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없으면 윤리도 없다고 예술은 말한다”




김경실 부이사장 ilfuoco@hanmail.net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중요한 문장이다. 많은 경우 작가들은 작품을 시작하는 첫 문장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 첫 마디에 작품 전체의 모든 것이 녹아 있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 작품의 이 문장이 그렇다. 막 이야기를 시작하는 화자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흥신소 직원


주로 다른 이들의 뒷조사나 이전의 행적을 추적하는 흥신소 직원인 기는 정작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다. 소장이 붙여준 이름인 ‘기’로 생활해왔던 그는 흥신소가 문을 닫게 되자 이번에야말로 직업적 기량을 발휘하여 자신의 행적을, 자신이 누구인지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는 우연히 손에 넣은 낡은 사진 속의 한 남자를 가리키며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가 나하고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혹은 다른 사진 속의 한 남자를 보며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가 나일까, 나는 러시아 사람일까, 맥케부아는 내 이름일까, 나는 페드로였을까.....’

그렇다면 이 작품은 기억을 잃어버린 한 남자의 ‘자아 찾기’를 그리고 있는가? 그렇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 집요하고도 예민한 작품의 본질은 아니다.


작가의 삶과 물음이 녹아 있는 작품


파트릭 모디아노는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노벨문학상은 한 작품에 수여되기도 하지만 한 작가에게 주어지기도 한다. 한 작가의 작품 활동에, 모든 저작물에 의미와 영광을 부여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 그리고 모디아노가 그런 경우이다.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는 모디아노의 선정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는 기억의 예술을 통해 불가해한 인간의 운명을 소환하고 점령기 프랑스의 현실을 드러냈다.” 

‘점령기 프랑스의 현실.’ 그렇다. 추적할수록 애매하고 혼란스런 기의 과거는 1940년대 유럽을 휩쓸었던 전쟁과 관련되어 있다. 연인과 함께 쫓기며 국적을 바꾸고, 이름을 바꾸고, 신분을 위조하고, 마침내 국경을 넘으려다 기억의 선을 넘어버린 남자, 그럼으로써 모든 생을 잃어버린 사람, 그가 자신이 찾아낸 자신, 그것을 찾기 이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현재의 ‘기’이다. 

2차대전의 참화 속에서 태어나 불안하고 혼란한 어린 시절을 보낸 모디아노는 기억을 잃어버림으로써 과거의 삶을 지워버린 ‘기’를 내세워 묻는다.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규정되는가. 지금의 나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당신이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예술은 과학을 동반한다. 인지신경과학자인 이안 로버트슨은 <승자의 뇌>에서 말한다. “우리는 주변 세상과 총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주변 세상의 변화하는 풍경에 따라서 우리의 상태가 조정된다. 심지어 유전자로 표시되는 단백질까지도 이 과정에서 바뀐다.” 더 나아가 “사실 발전해가는 ‘나’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나에 대해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대한 내 이미지들의 총합이다.” 그렇다면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나 자신인가 타인인가, 과거인가 현재인가, 혹은 기억인가, 이미지인가.....

르 몽드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만일 우리가 살지 않는다면 기억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이 모든 탄성은 너무나 얇아 보이지만 비밀스레 거대한 질문을 담고 있는 이 위대한 책 덕분이다.”


예술은 국경을 넘는다. 우리 곁의 불문학자이자 평론가인 황현산은 <밤이 선생이다>에서 담백하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기억이 없으면 윤리도 없다고 예술은 말한다. 예술의 윤리는 규범을 만들고 권장하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순결한 날의 희망과 좌절, 그리고 새롭게 얻어낸 희망을 세세연년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기억만이 현재의 폭을 두껍게 만들어준다.....미학적이건 사회적이건 일체의 감수성과 통찰력은 한 인간이 지닌 현재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에 의해 가름된다.....당신이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잊지 않겠다!” 외치고 되뇌이며 2014년을 지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바래게 하고 종내는 휘발시킨다. 그러나 잊지 않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만은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