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속에서 꿈꾸기
비 오는 날이었고 눈앞엔 큼지막한 국회의사당이 있었다. 이곳저곳에 표정 하나 없는 경찰들이 말뚝처럼 박혀 있었고 그 앞에서 누군가가 손자보를 들고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발돋움을 해서 넘겨다보니 저쪽 본청 앞에서 여전히 농성 중인 세월호 유가족들이 보였다. 무심코 밑을 내려다보니 빗방울들이 물거품을 만들며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어딘가로 뛰어든 빗방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이었다. 수많은 꿈들이 이 세상 모든 곳에서 동시에 부서지고 있는 듯한 끔찍한 느낌에 사로잡혀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붙박여 있었다. 그러나 오마이뉴스 정치부 국회 출입기자인 이주연 회원을 만나러 어서 다른 곳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거기서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주연 회원의 웃음은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것 같이 들렸다. 소리를 내야 할 때 소리를 내야 좋은 악기인 것처럼, 이주연 회원의 웃음은 웃음이 있어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그곳을 파고들어 듣기 좋은 울림을 남겼다. 그리고 웃음과 웃음 사이로 이주연 회원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2006년 여름이었을 거예요. 민언련 여름 언론학교 강의를 듣고 나서 바로 방송분과 활동을 시작했어요. 대학 다닐 때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는데요. 기자가 되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면 좋을까 이리저리 고민하던 중에 민언련과 만나게 된 거였어요. 방송분과로 들어가서 모니터 활동을 3년쯤 했죠. 2008년 한 해 동안은 방송분과 분과장으로 활동하기도 했고요.
민언련 사무실이 지금과는 달리 서대문 쪽에 있을 때였고, 그때는 방송분과 인원이 10여 명쯤 됐어요.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모였죠. 누가 어떤 방송을 보고 올지 미리 정해서 분과 모임 때마다 좋았던 방송과 나빴던 방송으로 나눠 평가하는 식이었어요. 그리고 다음 주 모임을 위해 어떤 방송을 보고 올지도 정했어요.
그때 분과엔 언론사 지망생들도 있었지만 아닌 사람도 있었고, 굳이 꼭 언론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운동’의 관점에서 분과 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죠. 서로 달랐지만 다들 어울려 친하게 지냈어요. 그게 기억에 가장 많이 남아요. 엠티도 가고, 매번 뒤풀이도 가고......
이주연 회원은 언제부터 기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기 시작했을까. 뜻밖에도 재미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고등학교 때 장래희망을 말하라고 하면 기자라고 했던 것 같아요. 괜히 멋져 보이고 해서.(웃음) 일종의 동경이랄까? 딱히 계기라고 부를 만한 건 없었어요. 대학 들어가선 ‘내가 어떤 직업을 가졌을 때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는데 그때 떠오른 게 결국 기자였죠. 기자라면 뭔가 사회 변화에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어렴풋이 있었어요. 전공인 사회학도 기자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아서 선택한 거였고요.
대학 시절에 언론학교를 통해 민언련과 인연을 맺고,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얼마간 분과 활동을 이어 가던 이주연 회원은 2010년 1월에 오마이뉴스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진보언론’ 쪽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확고했는데 그 가운데 저를 뽑아 준 곳이 오마이뉴스였어요. (웃음) 2010년 초에 들어가 수습 6개월을 거쳐 사회부에서 3개월쯤 있었고, 그해 11월 말에 정치부로 발령이 났죠. 국회는 그때부터 출입했어요. 처음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었지만 지금은 새정치민주연합과 다른 진보정당들까지 드나들고 있어요.
국회는 칼 없는 칼부림이 날마다 벌어지는 곳이다. ‘우리가 정권을 잡아야 더 나은 세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패를 갈라 한데 모여 있으니 싸움이 벌어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그 거친 싸움판에 첫 발을 딛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국회를 출입하며 낯설거나 힘들었던 점은 없었느냐고 이주연 회원에게 물었다.
처음 오마이뉴스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저는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이른바 ‘정치판’이나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잘 몰랐어요. MB 욕할 줄만 알았지 무슨 법이 어떻게 통과되려 하는지 같은 문제엔 영 깜깜이었죠. 국회를 출입하면서 그런 ‘정치의 문법’을 배우는 게 참 어려웠어요. 정치인을 다루는 기사라는 게 기본적으로 ‘썰’을 풀 줄 알아야 하는 건데 이것저것 잘 몰랐으니 처음엔 정말 쉽지 않았어요. 근데 한 1년쯤 출입하다 보니 ‘정치판이 요렇게 돌아가는 구나’ 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좀 어려 보이는 게 있어서 그런지 의원들이 저를 인턴인 줄 알고 대한 적도 있었어요. 왠지 애처럼 본다는 느낌? (웃음)
이주연 회원은 올해로 벌써 5년차 기자다. 인터뷰하기 전에 뭔가 좀 미리 알고 갈 만한 게 없나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다가 이주연 회원이 한국기자협회에서 주는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하는 사진을 보게 되었다.
안철수 의원이 정치 입문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던 무렵에 인터뷰가 하나 있었는데요. 저는 거기 따라가서 타자 쳐 주고 그걸 정리해서 기사로 만들고 했을 뿐이에요. 제가 잘해서 상을 받은 건 아니에요. (웃음)
이주연 회원이 너무 겸손한 것 같아서 나중에 따로 인터넷을 뒤져 보니 상을 탄 기사의 제목은 <안철수 교수 서울시장 출마 결심 임박>으로 2011년 9월 1일자 오마이뉴스 기사였다. 상을 받는 자리에서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안 원장의 출마 임박 기사는 한국사회에 이른바 안철수 현상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기사였다. 인터뷰에서 안 원장은 한나라당을 ‘응징해야 한다’고 했고, 이 인터뷰로 인해 안철수 현상은 10·26 보궐선거는 물론 내년 총선·대선까지 이어지는 중요 요소로 급부상했다.”
비록 막내 기자였지만 당시 정치 판도를 뒤바꿀 가장 중요한 인물의 이야기를 선배 기자들과 함께 기록한 것이다. 타자만 치고 기사만 정리했다고 해도 그때의 경험은 이주연 회원에게 앞으로도 딴 생각하지 말고 계속 기자로 살아야 한다고 등 떠미는(?) 흐뭇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제가 ‘아, 이런 기사를 써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한 건 한겨레 안수찬 기자의 기사를 읽으면서였어요. 그분 특유의 심층적인 내러티브 보도가 있거든요. 접근하는 방식도 무척 새롭고 문장도 참 좋으세요. 저도 그런 식으로 기사를 써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그러나 이주연 회원은 ‘제 2의 안수찬’이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기자가 되고 싶은지 (뻔하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물음을 던져 보았다.
남들이 안 쓰는 걸 쓰는 기자가 되고 싶어요. 똑같은 정치 이슈를 전달하는 기사들은 정말 많지만 내용은 다 비슷비슷해요. 누구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권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다. 국회든 청와대든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부터가 한정적이라 비슷한 기사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저는 뭔가 다른 기사를 써 보고 싶어요. 더 많은 정보를 담는다든지, 남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사건을 바라본다든지, 다른 기자들은 안 만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든지, 긴 시간을 두고 심층취재를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아무래도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긴 해요. 기본적으로 담당해야 하는 현장들이 있고, 반드시 써야 하는 기사가 있고, 회의도 해야 하고, 일상적인 취재도 나가야 하고 하니까요. 시간적인 제약이 있으니 일주일이 지나도록 기사 하나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어요. 그래도 오마이뉴스는 기자들이 얼마든지 새로운 시도를 해 볼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이긴 하죠. (웃음)
현장을 누비는 기자의 눈에 요즘의 언론 보도는 어떻게 비칠까?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궁금했던 것은 요즘 언론에 대한 명쾌한 진단이 아니라 민언련 방송분과 출신 기자인 이주연 회원이 분명 스스로 지니고 있을 어떤 입장이었다.
갈수록 저급화되고 있어요. 종편은 말할 것도 없고요. 예전에 방송분과에서 활동할 때도 언론이 ‘연성화’됐다고 말이 많았어요. 뉴스가 말랑말랑해졌다는 거죠. 사회적인 현안이 급박한데 날씨나 문화계 소식을 메인 뉴스로 채우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지금도 똑같아요. 세월호 유가족들 소식도 있는데 정작 뉴스는 말랑말랑한 소식들로 채워지고 있죠. 지상파 뉴스가 그 지경이라면 종편은 뉴스가 아니라 쇼예요. 제가 방송분과 시절에 모니터를 할 때도 ‘아무리 MB 정권이 탄압을 한다지만 어떻게 뉴스가 저 지경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종편은 그보다 더 하잖아요.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으니, 저급화의 끝은 아무도 알 수 없어요.
끝으로 민언련 회원들에게 전하는 한 마디를 부탁했다.
민언련의 중심 활동이라면 역시 모니터 활동이잖아요.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언론인 지망생이라면 모니터 활동이 꼭 필요해요. 뉴스를 곱씹으면서 내 것으로 만든다고 할까? 그러면서 사안이 뭔지 이해할 수 있고, 이슈들을 따라갈 수도 있으니까요. 사무처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민언련이 잘 될 수 있으니까, 회원들 중심으로 하는 모니터 활동이 지금보다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치자 이주연 회원은 쉴 틈도 없이 다시 국회로 돌아갔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손자보를 든 누군가도 여전히 국회 정문 앞에 서 있었다. 광화문 단식농성장에서도, 청운동의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에서도, 어느 천막 농성장에서도, 어느 크레인 위에서도, 어느 송전탑 아래에서도 누군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딱딱한 아스팔트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나는 것은 누구의 꿈도 아닌 그저 빗방울일 뿐이었다.
이주연 회원의 꿈은 자기만의 기사를 써 보는 것이라고 했다. 꿈이 있는 사람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자기만의 자리를 찾으려 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헤매고 넘어지고 부딪히면서도 다시 얼마든지 일어설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은 빗방울과 다르다. 이주연 회원의 울림 좋은 웃음소리는 자신이 빗방울과는 다르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웃음소리였던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