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구저바구] 삶 이야기
햇볕이 살짝 비켜나있는 것 같았던 우리 20대
손주화 (전북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국장)
나랑 그 친구는 참 가난한 학생이었다. 그리고 원하던 학교 진학에 실패했고 지역의 국립대에 나란히 진학하게 되었다는 점도 비슷했다. 가정형편에 자발적으로 수도권 대학 입학을 포기한 나와는 달리 그 친구는 어떻게든 그때의 상황을 벗어나려 발버둥치고 있었던, 왠지 수도권으로만 대학을 간다면 인생의 실타래가 풀릴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교에 무슨 환상이 있었을까? 대학교 입학까지 세 번의 OT가 진행되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행사를 참여하지 않는 대신 그 친구와 충동적으로 여수 밤바다로 떠났다. 차비만 들고 무턱대고 만난 우리는 달리던 열차 안에서 말을 나누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친구와 나는 생활의 고단함과, 입시의 실패감과 열패감을 느끼던 그런 요소를 몸으로 체감하고 있었고 도피하듯이 야간열차를 타고 여수로 달려간 것이다.
가난한 스무 살 예비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오들오들 떨며 겨울 여수를 몸으로 체험했고 다행히 여수에 살던 친구 덕에 그날 밤 거처를 무사히 마련할 수 있었다. 돌산대교 바람을 이겨내려 팔에 팔짱을 끼고 노래를 부르며 건너오던 그 순간이 십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그 시기 암담했던 마음을 같이 감싸주던 친구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 다음날의 고열 때문이었을까?
사회인이 되고 십 년 만에 가족과 함께 온 여수는 그때와 같은 듯 다르다. 나도 더 이상은 힘들었던 여대생이 아닌 것처럼, 숙소는 고급스러워졌고 이제는 굳이 여수를 걷지 않는다. 다 아는 것처럼 차로 한 바퀴 쓱 둘러보고 속으로 ‘역시 볼 것이 없어’라고 웅얼거릴 뿐... 그런데 숙소도 허름하지 않은데. 뭔가 허전하다. 쓸쓸하다.
돌산대교에서 마주 불던 바람을 꼬옥 팔짱끼고 건넜던 그 친구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한 명은 의사가 되었다. 다른 한 명은 해외 유학파가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만난다면 그날 있었던 날을 제외하고는 공유할만한 내용이 없게 된 사이지만, 여전히 그 날은 내 ‘아픈 젊음’의 선명한 순간인 것이다. 인두로 지진 듯 결코 지울 수 없는, 평생 그 사람을 규정하는 어떤 화인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사람은 늘 누군가의 ‘온기’를 그리워하며 산다. 누군가의 온기가 먼저 될 수 있다면, 우리 삶을 둘러싼 이 불가해한 많은 일들도 안개 걷힌 뒤의 풍광처럼 선명해질 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날처럼 끙끙거리던 나의 손을 잡아주던 그 동기의 온기가 그립고 따뜻하게 기억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살다가 문득 문득 그 때를 기억할 것이다. 청춘의 길목, 그 고단했던 한 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