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구저바구] 삶이야기
가난했던 내 학창시절 이야기(2)
정인열([작은책] 독자사업부)
왕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배정을 받았다. 도곡동에 있는 숙명여중이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강남 8학군 지역에 있는 부잣집 아이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나처럼 가난한 집 아이는 한 반에 대여섯 명 정도 되었다. 숙명여중은 아주 큰 학교였다. 전통의 사립 명문이라며 숙명여고와 같이 붙어있었다. 중학교 때 처음 만난 짝은 나보고 어디 사냐고 물었다. 나는 다시 기가 죽어서 “일원동” 이라고 대답했다. 그 아이는 대치동 동원아파트에 살았고 가끔 그 애 집에 놀러가기도 했다. 그 애는 이상하게 아이들이 몇 동에 사는 지를 꼭 물어보고는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몇 평짜리 집에 사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중학교 수업은 공부 잘 한다고 자부했던 나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선생님들은 자꾸만 어려운 말들로 빠르게 진행했고 다시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서 공부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성적만 강조했다. 중하위권 성적을 맴돌자 선생님들에게 나 같은 아이는 당연히 관심 밖이었다. 독서를 엄청나게 좋아하던 나는 이때부터 책을 읽지 않게 되었고 다시 학교 가는 게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여전히 판자촌에 살고 있었고 집안 형편은 좋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었고 나와 비슷한 가정형편의 아이들과 친해졌다. 제일 친한 아이들은 주로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로 우리 집보다 더 형편이 어려운 생활보호대상자 가정이었다. 1학기 말 쯤이 되면 담임선생님은 아이들 몇 명을 호명했다. 그리고 수업 끝나고 교무실로 오라고 했다. 거기에는 나도 포함되어있었고, 나와 친한 아이들도 있었다. 육성회비를 못 낸 아이들이었다. 이렇게 가난했지만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있어서 학교는 그럭저럭 다니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에 사춘기가 왔다. 살고 있던 일원동 판자촌은 수서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어 동네는 포크레인이 들어와서 아랫동네부터 집들을 허물기 시작했다. 세입자들에게는 임대아파트에 들어갈 입주권이 주어진다고 했다. 나는 너무나 기뻤다. 나도 이제 사람들이 나보고 어디 사냐고 물어보면 일원동 OO아파트라고 말할 수 있게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아파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2년 동안 임시거주지역에 살아야했는데 거기는 비닐하우스였다. 예민한 사춘기 때였는데 거기에 사는 것이 정말 싫었다. 하지만 아파트에 들어가려면 참아야했다.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로 벌이가 안정되지 않아 아파트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 리비아 건설노동자로 2년을 해외에 나가셨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도 좋다고 생각되는 선생님은 만나지 못했다. 그냥 항상 성적만 생각해야했고 고등학교 진로도 결정해야했다. 뭘 하고 살겠다는 꿈도 없었고 어떤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남들 다 하니까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해 개포고등학교에 배정받아 다니게 되었다.
고등학교에도 잘 사는 아이들이 많았다. 대부분 대치동과 도곡동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었다. 하교할 때면 항상 학교 앞에 고급 승용차에 엄마들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형편이 어려워서 학원이나 과외를 받지 못했는데 나 빼고는 거의 모든 아이들이 영어, 수학 학원은 기본이었고 과외 교습을 받았다. 또 성적이 잘 안 나오는 아이들은 부모들이 예체능 계열로 진로를 바꿔주었다. 좋은 대학 간판을 따기 위해 작곡, 미술, 기악과 등으로 아이들의 소질과는 상관없이 부모들이 정해주고 레슨이나 학원을 보내 주었다.
우리집은 여전히 가난했고 아버지는 안정적인 직업이 없었다. 해외에서 국내로 돌아와서는 노점상을 하셨다. 집 앞 단지 입구에서 생선장사도 했고, 날 좋은 봄에는 화분 장사도 했다. 하교하는 길에 장사하는 아버지가 멀리서 보이면 나는 아버지가 노점하는 게 창피해서 마주치지 않게 멀리 돌아서 집에 가곤 했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죄송하고 철없던 행동이었다)
학교 수업은 항상 수능 대비였다. 인성이나 정치, 역사에 관한 선생님의 열띤 가르침은 없었다. 예를 들어 야경국가에 대해서는 야경국가는 이런 것이다 라고만 설명하고 밑줄 치라고 했지 문제점이 무엇인가 뭐 그런 설명은 없었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 공부를 했지만 잘 나와야 중위권을 겨우 유지했다. 가난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성적도 좋지 않으니 선생님들은 나 같은 아이는 기억도 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면담을 한다고 했다. 당시 나는 성적이 중하위권이었다. 면담은 3분이 채 안 되었다. 담임은 말도 안하고 그냥 성적표만 보고 있었다. 나는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선생님, 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성적이 좋지 않은데요.” 라고 했더니 담임은 피식 웃으면서 “어쩌긴, 큰 일 나는 거지.” 그걸로 면담 끝이었다.
학교 가는 것은 여전히 싫었다. 이미 많이 놓쳐버린 수학 시간에는 문제 풀기를 시킬 까봐 늘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시험기간이 되면 나와 제법 친한 친구들이 늘 이렇게 얘기했다.
“큰일났어. 나 공부 하나도 안했어.”, “망했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도 무조건 나쁜 성적을 받은 체 표정을 구겨야했다. 나는 그런 상황을 대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친구들인데 왜 공부 안했다고 서로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거지? 친구들인데 서로 경쟁자라고 선생님들도 얘기하고. 그럼 우리는 친구가 아닌 건가.’
고3 수능이 끝나고, 원서를 쓰는 기간이 되었다. 각 담임 선생님들은 대학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소위 ‘안전 빵’이라는 곳에 입학 원서를 넣으라고 아이들에게 강요를 했다. 자신들이 가고 싶은 곳 보다 합격이 보장된 곳에 입학원서를 넣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안 써주는 선생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반 친구 하나가 얘기하는 걸 들었다.
“엄마가 어제 담임 만났어. 케이크를 줬는데 케이크 안에 봉투를 넣었지. 근데 담임이 그거 받더라.”
담임선생님은 순박하게 생겼었는데 돈을 받았다고 하니 기분이 씁쓸했다.
원하던 대학 입시에서 다 낙방하고 나는 굉장한 모멸감을 느꼈다. 내 자신이 벌레가 된 것만 같았다. 학교 졸업식에는 다 대학교에 합격한 아이들만 온다고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그래서 학교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졸업 앨범이 없다. 결국 집에서 가까운 성남 인근의 2년제 대학에 진학했다. 전자계산 과였는데, 단순히 취업이 잘 될 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택했다.
내가 만난 선생님들은 성적이 나쁘면 인생도 하류 인생으로 살 수 밖에 없다고, 성적 순서대로 인생이 정해진다고 큰 일 날 것처럼 늘 말해왔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항상 성적만 걱정했고, 학교 다니는 내내 단 한 번도 행복했던 기억이 없다. 그 증거인지 모르겠지만 서른 살이 되어서도 늘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었는데, 그 꿈은 일관되게 두 가지 내용이다.
하나는 가난에 대한 꿈이다. 판자촌에 살면서 가난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조마조마한 꿈, 살던 집이 헐리는 꿈이었다.
또 하나는 학교에 가서 시험을 치는 꿈이었다. 주어진 시간 안에 문제를 다 풀지 못하고 쩔쩔매고,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해서 창피를 당해야하는 상황에 처한 꿈이었다. 이 꿈을 가끔씩 반복해서 꾸는 날이면, 자다가 가슴이 두근두근한 채로 깨서 한 숨 돌리고 다시 잠이 들곤 했다.
△ 코스콤 해고노동자 시절의 정인열
2007년 7월 1일, 비정규직 보호법이 시행되던 날. 옆 동료가 차별당하는 게 당연하고, 불법을 저지른 회사에 침묵하는 동료들도 싫었다. 너무 분해서, 회사를 엿 먹일 목적으로 시작했던 노동조합은 내게 세상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그 뒤로 나는 가난과 학력 문제에서 진정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뒤로부터 나는 그 꿈을 꾸지 않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