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구저바구] 삶이야기
가난했던 내 학창시절 이야기(1)
정인열([작은책] 독자사업부)
전교조 ‘법외노조’ 소식이 들려왔다. 내 가난했던 학창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가난한 학생이어서 더 힘들었던 그 시절에 나는 전교조선생님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지는 못했다. 그때 전교조선생님을 한번이라도 만날 수 있었더라면 조금은 덜 힘들었을까?
초등학교 1학년 말의 봄방학 때였다(1986년). 우리 집은 성남 신촌동에서 강남 일원동으로 이사하게 되어 일원초등학교라는 큰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당시 한 반에 80명이었고, 교실이 부족해 오전반?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했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나이 드신 얼굴이 길쭉한 여자 분이었다. 어린 내 마음에 인상이 썩 좋지는 않았다.
산수 시간이었다. 나누기를 배우는 시간이었는데 선생님이 아이들 번호를 부르고 칠판에 적힌 문제를 풀라고 했다. 한 아이가 풀지 못하고 분필만 잡고 있자 선생님이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처음 보는 광경에 나는 너무나 충격을 받았고 겁도 났다. 무지 세게 쥐어박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불려나갔고 풀지 못했다. 나도 머리를 한 대 맞았다. 눈물이 나왔다. 그 다음부터는 산수 시간이 무서웠다.
△서울일원초등학교 교훈석
초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이 누구였는지 생각은 나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 직업은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목수였고, 엄마는 지금은 없어진 근처 일원시장에서 빵을 팔았다. 집은 캄캄한 지하 단칸방이었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우리 반에 가난한 사람이 누구니?”
그러자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얘요, 얘요, 얘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고 그 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가난한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 창피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감추어야 한다는 것도. 그 날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더니 아버지는 다음 날 하얀 새 운동화를 사가지고 와서 나에게 신겨주며 말씀하셨다.
“인열아, 이거 신고 가면 친구들이 너보고 가난하다고 하지 않을 거야.”
그 이후 같은 반 남자아이들에게 매일 맞았다. 그 중 제일 악질이었던 아이 이름은 ‘남상봉’이었고 아직도 또렷하게 얼굴까지 기억난다. 집에 갈 때 아이들 여럿이 나에게 발길질을 한 날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울면 “눈에서 구정물이 나오는 것 봐!” 라며 비아냥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들이 나를 괴롭혔던 이유는 내가 허름한 옷을 입었고, 집이 가난해서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은 일원동 주택가 지하 집에서 인근 판자촌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다. 판자촌은 대모산 아래에 있었고 논과 밭이 있는 시골 같은 곳이었다. 동생과 나는 학교에서 한참을 걸어 산 고개 하나를 넘고 공동묘지를 지나서 등하교를 해야 했다. 2학년 때 경험 이후로 가난한 것은 부끄럽고 감추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반 아이들이 “너네 집 어디야?” 하고 물으면 일원동에 산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으레 일원동 주택가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던 즈음 유괴 사건이 많이 발생한다며 학교에서 같은 곳 사는 아이들끼리 묶어서 하교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일원동 대모산 밑에 산다는 말도 못하고 일원동 주택가 아이들 그룹에 끼어서 하교를 했다. 집하고는 정 반대 방향이었지만 판자촌에 사는 걸 들키는 게 싫어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하교할 때마다 매일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초조했다. 옛날 살던 집 앞에 서서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말하며 헤어져야했다. 나는 학교 가는 것 자체가 매일매일 무서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여전히 일원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당시 학교는 이미 아이들 수가 너무 많아서 포화상태였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베트남 전쟁을 다녀온 40대 남자 선생님이었고, 내가 처음으로 만난 좋은 선생님이었다. 나는 키가 작아 선생님 바로 앞자리에 앉았는데 그것이 선생님이 날 유심히 지켜보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내가 판자촌에 사는 아이라는 것도 알게 되셨고, 산 고개를 하나 넘어 등하교를 하는 아이라는 것도 아셨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가난한 집 아이라는 걸 아는 순간, 무관심해 지거나 편견을 가지고 대했다. 하지만 이 선생님은 내가 글쓰기를 잘하거나 국어시험을 잘 보면,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칭찬해 주셨다.
1학기가 끝날 무렵 일원동에 초등학교가 하나 더 생겼고 절반 정도의 아이들은 모두 새로 생긴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나는 판자촌 아이들이 다니는 규모가 작은 왕북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거기서는 신나게 놀았던 기억밖에 없다. 담임선생님은 젊은 총각선생님이었는데 나한테는 국어를 잘 한다며 잘 대해주셨다. 하지만 단체 체벌은 늘 있어서 손바닥과 발바닥을 많이 맞았다. 일원초등학교에서는 공부나 숙제는 하지도 않았는데 작은 학교로 전학 가서는 같은 판자촌 친구들과 학교를 다니게 되어서 그런지 안정이 되었다. 학교 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모든 과목 성적이 좋아졌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