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언련 웹진 [e-시민과 언론] 15호부터는 생활글 ‘이바구저바구’가 새롭게 실리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들 모두 '이바구저바구'에 글을 보내실 수 있습니다. 삶이 담긴 다양한 글들을 기다리겠습니다. ccdm1984@hanmail.net 로 보내주세요~ (편집자 주)
[이바구저바구] 책 만드는 일, 그 뒷이야기
책의 이면
김경실(민언련 이사)
이어달리기는 아니지만, 이 난의 첫 문을 책으로 열었으니 그 바통을 이어받아 계속 책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열혈 독자’의 이야기였으니 이번엔 ‘치고받는 편집자’의 이야기가 어떨까 합니다.
흔히들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 하지만, 실제로 책이 팔리는(‘읽는’과 같은 의미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책은 읽는 사람들은 계절에 관계없이 늘 읽고 안 읽는 사람들은 늘 안 읽는다.) 계절은 방학을 끼고 있는 한여름, 혹은 한겨울입니다. 해마다 7월이면 관록 있는 유명 소설가들의 야심찬 귀환과 더불어 각 출판사들에서 준비한 야심작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역시 그런 이유로 7월에 낼 야심작 두 권을 한꺼번에 준비하고 있는 조그만 출판사의 편집자이야기입니다.
편집장과 필자의 통화. 필자는 한국사학계의 명망 높은 원로 학자이시다.
편집장: “.....네 그래서요 선생님, 저희가 나름대로 서점 관계자들에게 조사를 해봤더니 많은 사람들이 OOO 앞에는 ‘조선시대’가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요, 어쩔 수 없이......”
필자: “아니 그러니까 OOO는 조선시대밖에 없는데 조선시대가 꼭 들어갈 필요가 뭐가 있어요. 내가 처음에 출판사에서 이런 책을 만들고 싶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별로 마땅찮았는데, 제목을 ‘OOO 이야기’라고 한다고 해서 그렇게 하면 대중적으로 읽기도 좋고 괜찮은 생각이다 싶어서 시작한 건데, 이제 와서 ‘조선시대 OOO’으로 간다고 하면 그건 얘기가 전혀 달라지는 거예요.”
편집장: “그렇긴 한데요 선생님, 제목이 판매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커서요. 서점 관계자들 말을 그냥 무시하기도 어려워서.....”
필자: “거, 실장님. 남의 말을 듣지 마세요. 처음에 의도가 있어서 그렇게 정했고 나도 그게 좋아서 해보자 한 거잖아요. 그럼 그냥 초지일관 밀고 나가는 게 좋아요. 내 말을 믿어요.”
편집장: “그래도 판매가......”
필자: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냥 ‘OOO 이야기’로 밀고 나갑시다!”
편집장: (웃음을 한자락 깔고) “책임을 지신다면, 안 팔리면 선생님이 모두 사시는 걸로.....”
필자: “그거야...... 그건 그때 가서 얘기하고. 아니 잘 될 거예요. 내 생각이 맞아요. 그러니까 우리 그렇게 합시다.”
편집장에게 필자의 뜻을 전달받은 사장님: (그렇잖아도 조사 결과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달라 마뜩찮았던 터라 반색하며) “그럼 필자 선생님의 의견을 따라야지요. 그러는 게 문제가 없어요.”
문제는 영업부장: “아니 그럴 거면 뭐하러 영업도 바쁜데 조사해오라 마라 해서 사람을 피곤하게 했어요? 서점에 나가서 바쁜 사람들 불러 세워서 이게 좋으냐, 저게 좋으냐, 왜 좋으냐, 물어보는 거 쉬운 줄 알아요. 성의 있는 대답 들으려면 공을 얼마나 들여야 하는데, 담부터는 이런 일 시키지 말고 그냥 처음부터 필자 선생님이 하자는 대로 해욧!”
무안해진 편집장: “죄송해요. 조사결과도 필자 선생님도 모두 예상을 빗나가서 말이지요.....”
오후 시간.
작년 7월에 출간해 1년 동안 톡톡한 판매고를 올린 젊은 장르 소설가의 회심작이자 출판사의 기대작에 관하여 작가와 통화.
작가: “아니 그러니까 그 부분이 왜 문제냐고요?”
편집자: “아니 한밤중에, 네온사인 반짝이는 홍대 앞도 아니고 조선시대에 인적 드문 산속에서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이냐고. 그렇게 얼굴 근육까지 환히 보이게 하고 싶으면 하다못해 보름달이라도 띄우든가.”
작가: “아니 이게 지금 관찰자 시점이잖아. 1인칭이나 3인칭이 아니라고. 충분히 가능하지 무슨 소리야? 어쨌든 그 부분은 그렇게 그냥 둘 거니 그리 아셔요.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왜 쉼표랑 느낌표랑은 죄다 빼놓은 거야?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한땀 한땀 찍어놓은 건데.”
편집자: “부호는 부호일 뿐 남용하지 맙시다! 내가 그놈의 쉼표 따라 읽느라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애. 갈길은 급한데 어찌나 쉬는지 진도가 안 나가요. 그리고 그놈의 느낌표는 왜 너댓 개씩 붙여놓은 거야. 명색이 작가가 어떤 상황이든 문자로 표현을 해야지, 부호로 때우려 들면 되겠습니까? 문자로 합시다, 문자로.”
작가: “나야말로 이렇게 고리타분한 편집장하고 일을 하려니 숨이 막힌다니까. 부호가 얼마나 분위기를 살리는데 그래? 요즘은 이모티콘 잘 쓰는 것도 능력인 거 몰라요? 아무튼 꼭 필요한 건 내가 교정지에 표시해 놓을 테니까 살릴 건 살려줘요! 아니 그리고 H(남자 주인공)가 우는 부분은 왜 들어내라는 거예요?”
편집자: “아 그건 지극히 개인적 취향이긴 한데, 나는 요즘 눈물 뿌리는 남자들 별로더라구. 그 장면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웬만하면 들어냅시다. 최근에 울어서 성공한 남자도 없고 말이야.”
작가: “어, 뭐야 지금? 내가 공들여 탄생시킨 남주를 어따 비교하는 거야! 아휴 불쾌해! 이렇게 나오면 막 가자는 거지!”
편집자: “막 가기는 뭘, 우리가 어디 남입니까? 서로 손잡고 잘 해 봅시다. 대망의 칠월이 코앞이잖아요.”
작가: “더 이상 어떻게 잘 해. 편집장 말을 나처럼 잘 듣는 작가 있음 나와 보라고 그래. 내가 지금 교정지 온 거 보고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심정으로 칼질을 해대고 있다니까 그러네.”
편집자: “알았어요, 작가님. 우리 이번에 교정지 전해주러 올 때 초밥 먹으러 갑시다. 박 선생님이 경복궁 옆 삼청동에 좋은 초밥집을 봐 뒀답디다.”
작가: “초밥? 그 ‘초특급 요리사만이 만들 수 있어 서민들은 점심으로 도저히 먹을 수 없다’는 그 초밥을?”
편집자: “글쎄 나도 이번 시장선거 덕에 초밥이 그렇게 엄청난 음식인 줄 알았는데, 박 선생님 얘기로는 열 피스에 만 원인데 꽤 먹을 만하다고 합디다.”
이렇게 편집자의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출판인들이 고대하는 대망의 7월이 머지않았습니다.
여러분,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