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책] ‘타이타닉 현실주의’에 맞서는 ‘진정한 현실주의’ (2013년 12호)
등록 2014.01.08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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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 현실주의’에 맞서는 ‘진정한 현실주의’

 

김경훈 회원 l insain@naver.com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의 이상을 흔히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예컨대 그들은 사회주의가 인간의 탐욕이라는 ‘현실’을 무시했기 때문에 애초에 실현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가 본래의 이상과는 전혀 다른, 인간을 억압하는 체제로 귀결한 것은 ‘현실’을 무시한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는 바로 그 부조리한 ‘현실’을 인정하고,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회주의가 그랬듯 ‘현실’을 억지로 바꾸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현실’만이 우리에게 가능한 최선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얼마간의 모순과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현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현실주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런 주장에 단호히 반대한다. 그는 그런 식의 ‘현실주의’를 ‘타이타닉 현실주의’라 칭한다. 지구라는 ‘타이타닉’ 호가 빙산을 향해 가고 있고, 빙산과 충돌하면 침몰할 거란 ‘현실’을 무시한 채 “전속력으로”를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주의적인 경제학자가 타이타닉호에 “전속력으로”라는 명령을 하려고 합니다. “속력을 떨어뜨리면 안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타이타닉호의 논리, ‘타이타닉 현실주의’입니다.-<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17p


이 책은 보수주의자의 ‘현실주의’가 어째서 ‘타이타닉 현실주의’인지를 하나하나 논증한다. 그들이 외면하는 또 다른 ‘현실’, 즉 현 체제가 이대로 지속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 분야는 경제발전뿐만 아니라 전쟁과 평화, 안전보장, 민주주의 등 여러 영역에 걸쳐 있다.


특히 ‘국가와 폭력’을 다룬 2장은 만만치 않은 고민을 던진다. 국가는 군대, 경찰 등의 ‘정당한 폭력’을 독점한다. 그것은 사람들의 믿음에 기초한다.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고, 개인의 폭력을 규제함으로써 전체적인 폭력의 양을 줄일 수 있다는 믿음. 그러나 저자는 이런 믿음을 단호히 비판한다. 대부분 국가가 ‘정당한 폭력’을 독점한 근대국가가 된 20세기에 가장 많은 사람이 폭력의 희생자가 됐다는 것이다.


20세기만큼 폭력에 의해 살해된 인간의 수가 많았던 100년간은 인류의 역사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선례가 없는, 전혀 새로운 기록입니다. 그리고, 누가 가장 많이 사람을 죽였는가 하면, 개인도 아니고, 마피아도 아니고, 조직깡패도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입니다. 전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엄청난 수의 사람을 죽여왔습니다.-<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33p


저자는 심지어 국가가 외국인보다 자국민 쪽이 압도적으로 많이 죽였다고 말한다. 20세기에 국가가 살해한 인간의 수가 약 2억 명인데 그 중 약 1억 3천만 명이 자국민이라는 것이다. 국가폭력을 막기 위해 평화헌법을 만든 코스타리카의 사례도 흥미롭다. 군대를 만들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국민을 죽이고, 독재정권을 세우기 때문에 군대를 두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군대의 필요성을 고민하게 된다. ‘세계평화를 위해 군대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 보수주의자는 비현실적이라고 반박한다. ‘일국 평화주의는 위험하며, 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현실주의’가 20세기에 자행된 국가의 무수한 살인을 낳았던 것은 아닐까? 군대가 자국민을 주로 죽였다면 차라리 군대가 없는 게 더 안전한 것은 아닐까? 국가가 무수한 사람을 죽였고, 많은 경우 그 대상이 자국민이었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평화를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현실주의’가 실은 생각보다 허술하고, 얄팍한 논리에 기초하고 있음을 일깨운다. 보수주의자들은 이제껏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외면해왔다. 그러나 현 체제가 맞이한 전쟁과 불평등의 심화, 기아, 환경파괴 등은 그런 식의 ‘현실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부터 비로소 21세기의 ‘진정한 현실주의’를 향한 모색도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