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버려야 산다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l isu@catholicnews.co.kr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창립 된지 내년이면 40주년이 된다. 최근에 사제단과 관련해 ‘종북사제단’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임의적으로 결성된 보수단체들뿐 아니라, 정부여당 인사들의 입에서조차 ‘종북’은 유행어처럼 저항세력에 붙이는 접두사가 되었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에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자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현 정부와 국가기관이 ‘민주주의에 저항하는 세력’일 수도 있겠다.
정의구현사제단과 박근혜 대통령 부녀간은 악연이다. 박정희 유신정권과 그 하수인이었던 중앙정보부에 의해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면서 만들어진 게 정의구현사제단인데, 이제 박근혜 정부와 국정원이 정의구현사제단과 다시 결전의 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구현사제단이 천주교의 저항세력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7월부터 천주교 평신도를 비롯해 수도자들과 사제들,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나섰다. 이미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인 이용훈 주교는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을 ‘불법’으로 못박았다.
이 마당에 사제들의 시국미사를 ‘종교인의 직접적인 정치개입’이므로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대한민국을 수호한다는 일부 천주교인들은 “사제복을 벗고 정치를 하라”고 윽박지르고, 어느 주교는 “사제의 정치행위 금지”를 표명해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주교가 제시한 <한국교회 사목지침> 등 교회문헌에서는 사제들의 공직임명, 정당가입, 노동조합 활동을 금하고 있을 뿐, 오히려 교황조차도 “공동선을 위한 정치참여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성당에 모여 나라를 위해 기도를 하겠다는 사제들에게 ‘종북’이라며 기도를 금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국기도회는 독재정권이 흔히 써먹던 조찬기도회보다 훨씬 복음적인 한국 천주교회의 미풍양속이다. 조찬기도회를 정치권력에 축복을 해왔지만, 시국미사는 세상의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을 위해 기도를 바치기 때문이다. 한편에선 특혜와 비리가 끓고 있겠지만, 한편에선 고난 속에서도 희망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유신정권 시절에는 천주교 주교가 감옥에 갇히고, 공권력이 성당을 둘러싸고, 사제들은 사찰대상으로 몰매를 맞기도 했다.
2009년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을 때,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의 종교적 정신적 지도자께서 우리 곁을 떠나시니 슬프고 허전합니다. 마지막 전화를 드렸을 때 나라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나라가 편안해지도록 노력하라고 당부의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이 유언같이 됐습니다. 앞으로 노력을 해서 김 추기경님이 하늘나라에서 나라 걱정 국민 걱정 하지 않으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추모메시지를 남겼다. 지금 그분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노력이 아직 부족했는지 나라가 편안한 날이 하루도 없다. 복지정책은 후퇴하고, 국민들 걱정이 많아진다. 나라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종북주의자가 갑자기 수북하다.
아무래도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를 쉽게 저승으로 떠나보내드리지 못한 까닭인지도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은 김수환이 추기경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한 말을 기억해야 살 길이 열린다. 박정희 정권이 1971년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보법’을 통과시키자 천주교 주교단은 1972년을 ‘정의평화의 해’로 선포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해 성탄절 메시지를 통해 이 법이 “북괴의 남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국민의 양심적인 외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라고 물었다. 또한 1972년 광복절 메시지에서는 “우리는 국민 상호간과 정부와 국민 간에 불화만을 조장하므로 전 국민의 단합에 금이 가게 하는 졸렬한 정보정치의 지양을 엄중히 요구한다”며 “보위법이나 정보정치는 결과적으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말살시킬 위험이 크다”고 질타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니, 이제 아버지를 편안하게 저승으로 보내드리고, 박근혜 대통령은 정상적인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와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코복음 10장 29-31절)
여기서 버릴 항목에는 ‘아버지’가 들어있지만, 희한하게도 받을 목록에는 ‘아버지’만 빠져있다. 당시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는 ‘권력’이다. 힘에 의존하는 존재는 복음에 합당하지 않다는 게 예수의 소신이었다. 아버지는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참된 평화는 자비와 공정에서 오기 때문이다. 사회적 엘리트가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들을 품어낼 줄 알 때 평화가 온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했다. 일각에서 “우리는 대통령을 뽑은 게 아니라 여왕을 뽑았다”는 말이 들린다. 이 마당에 첫째가 꼴찌가 될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해 두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