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뜸 힐링영화 <안경>
안경 :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l 일본 l 2007 l 코미디, 드라마 l 106분
배경선 회원 l baecci85@nate.com
힐링. 요즘 이곳 저곳에서 힐링을 많이 이야기한다. TV에서도, 서점에 진열된 책에서도, 여행상품에서도 ‘힐링’ 없인 안 되는 모양새다. 쉼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들에게 휴식이 주는 청량감은 삶을 다시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맞다. 하지만 어딜 봐도 힐링, 힐링하니까 오히려 힐링을 강요받는 것 같은 갑갑함도 느껴진다. 힐링의 틀 안에서는 힐링을 느낄 수 없을 것 같달까. 그런 의미에서 진짜 ‘힐링’하고 싶을 때 보면 좋을 영화, <안경>을 소개한다.
일본영화 <안경>(2007)은 얼마 전에 옮긴 새 직장 분위기에 적응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내게 친구가 추천해 준 영화다. <안경> 속 여주인공 타에코가 마치 나와 비슷해 보인다면서 시간 될 때 보라는 친구의 말에 위로받고 싶은 마음으로 보게 됐다. 대부분의 일본영화가 그렇듯이 잔잔하고 조금은 나른하게 흘러가는데, 그런 와중에도 혼자 큭큭대고 웃을 수 있고 어느 샌가 영화 속 인물들과 동화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무척 묘한 영화다. 조용히 사색을 즐기며 여유를 갖고 싶다면 이 영화의 감독인 오기가미 나오코의 슬로우 라이프 시리즈 <카모메식당>(2006), <토일렛>(2010) 등을 추천한다.
이 영화에는 총 다섯 명의 인물만이 등장한다(친구에게 등장인물이 다섯 명뿐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영화를 보다가 자겠지 싶었다). 휴식을 찾아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오지의 한 민박집에 머물기로 한 주인공 타에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삶에 지쳐 휴식을 갖길 원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민박집 간판을 크게 달면 손님이 많이 찾아와서 일부러 작게 만들었다”는 민박집 주인 유지, 매년 봄에만 찾아오는 수수께끼 빙수 아줌마 사쿠라, 민박집에 사는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수시로 민박집에 들러 참견하는 생물 선생님 하루나, 뒤늦게 타에코를 찾아온 제자 오모기 군. 이 인물들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일상을 즐기는 법을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타에코가 처한 상황이 마치 나와 비슷하다’라고 말했던 친구의 말은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알 수 있었다. 타에코는 다소 엉뚱하고 황당한 풍경에 주춤하게 되는데, 아침에 눈을 떴는데 옆에 낯선 이(사쿠라)가 웃으며 “잘 주무셨나요?”라고 인사를 하지 않나, “왠지 불안해지는 지점에서 80m 더 가면 거기서 오른쪽입니다”라고 써있는 주소로 길을 찾아가야 하질 않나, 이런 엉뚱한 곳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타에코가 마치 나 같아서 한참을 집중하면서 봤다. 영화는 타에코가 낯선 휴식처에서 적응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바쁘게만 돌아가는 요즘, ‘무엇을’, ‘왜’에 집중하기보다 ‘어떻게’에 초점을 맞추면서 관객들에게 쉼을 느끼게 해준다. 등장하는 민박집이 바닷가 근처이기 때문에 모래사장과 파도치는 바다의 풍경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인물들의 대사보다 여백이 많은 풍경을 더 많이 노출함으로써 ‘젖어들기’에 수월하게 해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안경>일까 한참을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등장인물들 모두가 안경을 쓰고 있었다. 누구 하나 안경을 집어던지는 장면도, 안경을 깨고 부스는 장면도 없다. 이렇다 할 연관성이 있는 장면이라고는 영화 말미에 타에코가 바람에 날아간 안경을 줍지 않고 그저 내버려두는 것 뿐. 아직도 제목이 갖는 의미는 아침 물안개처럼 희미하다.
그러나 이렇게 영화의 의미를 한참 생각하게 하듯, 감독은 어쩌면 시간을 갖고 소중한 어떤 것들을 꺼내어 볼 여유를 주려고 한 것은 아닐까 싶다. 천천히 사색하는 시간 속에 기다림을 배우는 것이 ‘힐링’하는 방법이라고 사쿠라 아줌마가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더불어 낯선 이 곳에서 나 역시 마음을 열고 타인과 섞일 수 있길, 젖어들 수 있길 바래본다.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