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인간을 지혜롭게 한다
전미희 이사 l wooriana@hanmail.net
여는 글로 좀 뜬금없을 수도 있겠지만 난 요즘 몇몇 드라마와 친구다. 최근 내가 재미있게 보고 있는 드라마는 얼마 전에 끝난 말랑말랑한 로맨틱 코미디 <주군의 태양>(17부, SBS)과 메디컬 드라마 <굿 닥터>(16부, KBS2) 그리고 일일 드라마 <못난이 주의보>(133부, SBS)이다. 물론 듬성듬성 보는 드라마도 있다. 이중 <못난이 주의보>는 닥본사(닥치고 본방 사수)를 기본으로 애시청하고 있는 드라마다. 이 일일드라마가 주는 흡입력이 웬만한 미니시리즈보다 대단하다. 2008년 <가문의 영광>을 쓴 정지우 작가의 작품이라면 음미해볼 만하다.
<못난이 주의보>는 임성한표 선정적인 드라마 <오로라 공주>가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서바이벌 드라마라는 누리꾼들의 조롱을 받을 때 보게 되었다. <못난이 주의보>는 부모로 인해 한 가족이 된 네 남매가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고 차츰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가며 다른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게 되는 성장드라마다. <못난이 주의보>는 첫째인 공준수가 공부 잘하는 동생 공현석을 위해 스스로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다가 출소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드라마는 착한 듯 하지만 은근히 센 드라마다. 공준수는 평생 자기 과거를 숨기며 살아가야한다고 생각할 때 아버지에 대한 상처로 내면의 벽을 쌓고 사는 나도희 실장(BY그룹의 후계자)을 동대문에서 만난다. 그녀를 사랑해 BY회사로 들어간다는 건 자기 과거와 직면해야하고 헤쳐 나가야 할 고통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며, 거대한 편견과 스치듯 지나칠 수 있는 수모와 모욕을 세포 깊숙이 찔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가깝게는 나도희의 가족인 아버지, 새엄마,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회장인 할아버지까지. 게다가 회사 내에서는 나도희를 사랑한다고 우기는 야망의 이한서 변호사의 추잡한 술수와 악행, 앞으로 겪을지도 모르는 회사 내의 저항과 위압 등 그들의 사랑이 대면해야하는 면면이 간단한 게 없다.
그런데 이들에게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장벽을 헤쳐 나가는 방법은 편법이 아닌 기다림이고 몸으로 하는 조용한 설득이다. 공준수는 사람들이 뱉어내는 말들이 비수처럼 꽂혀 도망가고 싶은 순간에도 변명을 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빌딩 옥상을 그리고 거리를 달리고 달린다. 그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진 않는다. 그냥 ‘애 쓴다’라고 서로 위로할 뿐이다. 공준수의 아킬레스건을 자극하면서 가족과 주변사람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이 변호사의 추잡한 악행이 이어질 때마다 공준수는 더욱 단단해지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간다. 이는 공준수가 주변 사람들의 이해와 신뢰를 구축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딸과 연인 사이인 것을 안 나도희의 아버지가 공준수에게 뻔뻔스럽다며 주먹질을 가했을 때도 변명하지 않고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건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애원해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리고 평생 공 씨 형제에 대한 원한으로 살아가는 죽은 경태의 아버지를 만난 공준수는 자신의 진정성을 보이려 경태 곁으로 가겠다며 죽음을 선택하려는 자신의 오만함과 정면으로 직면한다. 그는 “내가 얼마나 오만한 인간이었는가”라고 오열하며, 그동안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사랑하는 이들과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통렬하게 깨닫는다.
난 이 드라마에서 ‘오만(hybris)’이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누구보다 착한 공준수이지만 소중한 삶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깨닫는 순간 그의 결핍은 채워 질 것이고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다. 이 드라마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일정부분 닮았다. 오이디푸스 왕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다는 신탁으로 버려지지만 결국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오만한 인간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사태를 극한에서 직면하면서 모르고 저지른 죄도 책임을 져야한다며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버리고 추방당한다. 고대 폴리스에서 추방은 인간이 아닌 짐승을 뜻한다. 운명을 바꾸진 못하지만 운명의 한도 내에서 자신이 책임져야할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 연민과 동정을 얻기까지 인간의 본질은 결핍인 것이다. 이 결핍을 모르는 자가 오만한 자이고 오만을 고치려면 고통을 겪어야한다. 그래서 희랍 격언에 “고통이 인간을 지혜롭게 한다”라는 말은 새겨 볼만하다.
덧말 : 11월 말이면 끝나는 <못난이 주의보>. 방송분과위원회가 올해의 좋은 드라마로 눈여겨봤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