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_
[시민비평공모-은상] 금메달은 슬펐습니다
9월 2일은 베이징 올림픽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모든 국민이 베이징 올림픽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금메달리스트들을 환영하기에 바빴다. 누구나 생각했다. 그들은 평생 연금을 받으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올림픽에서 거둔 명예, 금전적인 보상, 더불어 국민들의 아낌없는 사랑까지, 베이징 전사들은 이 모든 걸 가지는 행운도 거머쥐었기에 누구보다 부러운 존재였다. 그런데 <KBS 시사기획 '쌈'>은 올림픽의 이런 축제 분위기와는 상반된 '슬픈 금메달'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금메달이 어찌 슬플까. 금메달이 과연 슬플 수 있을까? 금메달이 슬프다고? '쌈'은 지난날 금메달의 영광을 누린 메달리스트들을 찾아가 금메달의 의미를 묻는 것으로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88 서울 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였던 레슬링의 한명우 선수부터 서울 올림픽 유도 금메달 김재엽 선수, 그리고 동계 올림픽 4관왕의 영예를 누렸던 전이경 선수까지. 서로 다른 종목, 다른 올림픽에 참가했지만 슬픈 금메달의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쌈'은 스스로 정의하지 않고 그들의 입으로, 그 슬픈 의미를 말하게 했다. 한명우 선수는 금메달을 위해 바친 평생의 노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현실을 꼬집었다. 김재엽 선수는 은퇴 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직장 하나 가질 수 없는 울분과 서러움을 토해냈다. 전이경 선수는 동계 올림픽 4관왕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아이스링크에서 몇몇 초등학생의 코치가 되어 있었다. "금메달리스트인 그들이 직장 하나 가질 수 없는 현실. 이것이 대한민국 스포츠의 모순입니다. 금·은·동메달을 딴 젊은 청춘들을 나라에서 책임져주지 않습니다."(전 동계올림픽 4관왕 전이경 선수) 적재적소에서 궁금증을 풀어주다 이쯤에서 시청자들은 궁금해졌다. 금메달리스트이면서 세계 1위를 할 정도면 우리나라에서 후배 양성을 위해서 대부분 감독이나 코치를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우리 뇌리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다. 마라톤의 황영조 선수나 배드민턴의 김동문 선수도, 심지어 금메달을 따지 않는 축구의 차범근 감독이나 황선홍·홍명보 선수 모두 후배 양성을 위해 감독과 코치 자리에서 그들의 두번째 인생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쌈'은 궁금증에 대한 답을 바로 제시한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감독·코치 자리는 파벌 다툼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몫일 뿐이라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들은 직장을 잡지도, 운동을 놓지도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말이다. 매 프로그램마다 적절한 설문조사로 사안의 객관성을 높여왔던 '쌈'은 이번에도 전·현직 금메달리스트 11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는 금메달리스트들의 삶이 냉혹하다는 현실을 반영했다. 은퇴 후 지도자나 교수 등 후배 양성을 위해 일하는 49% 외에는 51%가 샐러리맨·자영업자·전업 주부로 살아가고 있었다. 사회 적응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이 48%, 사회 적응력에 대한 준비가 미비했다고 느낀 이들도 56%나 되었다. 해석은 자제하고 평가는 시청자에게 맡긴다 운동선수들에게는 교육이 없었다. 언제나 운동에 운동, 그렇게 운동에 목숨 걸어야 겨우 딸 수 있는 금메달이었기에 학교도, 국가도 이를 방관했던 것이다. '쌈'은 이들이 은퇴 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꼬집는다. 그리고는 또 다시 금메달리스트들의 목소리로 이를 지적한다. 여기서 시청자들은 '쌈' 제작진이 말하는 것보다 실제 금메달리스트들이 말하는 씁쓸한 교육 현실에 공감하게 된다. '쌈'은 좀 더 객관적이고 적합한 사례를 보여주면서 해석은 자제하고 평가는 시청자들에게 맡기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사례는 명확하고 적절했다. 대학원에서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탈사회화와 재사회화에 대한 연구'를 논문으로 발표한 전이경 선수의 사례가 먼저 제시됐고 학생 선수의 학습권을 주장하다 스스로 태릉선수촌을 떠났던 전 수영선수 장희진씨의 인터뷰도 이어졌다. '쌈'은 외국에서 활동하는 금메달리스트들의 인터뷰도 담아냈다. 박주봉 일본 배드민턴 대표팀 감독은 일본에서는 운동과 일상이 병행되기 때문에 은퇴 후 직업에 대해 부담감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호주의 양궁 대표팀 감독인 오교문씨가 말한 호주의 사례는 더욱 엄격했다. 호주의 학생 선수들은 시합 중에도 매니저와 함께 시험을 치르며 감독이라 할지라도 선수들의 학습권을 함부로 침해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과연 활만 쏜 제가 이 자리에 서지 못했다면 한국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오교문 호주 양궁대표팀 감독) 운동선수는 죽을 때까지 운동만 해야 합니까? "어떻게 금메달리스트가 포장마차를 할 수 있냐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손가락질 때문에 포장마차 일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재엽 전 유도 금메달리스트) '쌈'은 금메달리스트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국민이 생각하는 감독과 코치는 정말 소수의 금메달리스트에게 돌아갈 뿐이었다. 그 속에서 도태된 메달리스트들은 운이 좋으면 중·고등학교에서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었고 대학 강단에서 이론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운동과는 전혀 상관없는 생업에 종사해야 하면서도 금메달리스트라는 슬픈 운명 때문에 사람들의 의아함과 손가락질을 받아왔던 것이다. '쌈'은 이런 문제들로 고민하는 그들의 고충을 국가가 들어줘야 한다고 꼬집는다. 금메달리스트를 키울 때까지만 신경 쓰는 국가에 금메달리스트들의 은퇴 후 삶을 직접 비춰주는 방식으로 일침을 가한 것이다. 여기서도 금메달리스트들은 말한다. 선수들에게도 교육 제도가 개선된다면 동메달리스트들도 시상대에서 울지 않고 웃을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은 말을 제시하며 끝을 맺는다. "금메달 영광 뒤에 숨어진 방황 슬픔 그리고 눈물. 왕기춘이 고개 숙이고 있더라고, 세계 2등인데. 죽어라고 운동했지 않습니까. 왜? 한 번 살아 보려고…. 작게는 나를 위해. 크게는 국가를 위해. 유도 선수가 운동이나 하지. 은퇴하고 어린 시절 꿈이 생각났지만 이젠 돌아갈 수 없잖아요." 참 뇌리에 남았다. 금메달이 슬프다는 역설로 호기심을 자극한 후 그 속에서 20여개도 넘는 금메달리스트들의 인터뷰 영상을 중심으로 슬픈 금메달의 의미를 새겨주는 형식이 시사 프로그램 특유의 지루함까지 떨쳐내게 했다. 베이징 올림픽이 끝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수많은 금메달리스트들에 집중하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금메달도 슬플 수 있다는 역발상은 매우 참신했다. 금전적인 보상, 일시적인 명예가 그들의 평생을 책임져 줄 수는 없었다. 애국가가 그렇게 아련하고 금메달이 그렇게 슬플 수도 있었다. 금메달이 슬프다는 역설이 더 이상 역설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쌈'은 사회적 약자를 비춰주면서도 때로는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명제에 대한 역발상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바로 그 점이 '쌈'의 가장 큰 장점이고 시청자들이 끝까지 '쌈'을 사수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9월 2일, 금메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순간, 금메달은 너무나 슬펐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