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_
[시민비평공모-은상] 공영방송은 우리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 들어가며 <KBS 스페셜> 8월 17일자 '언론과 민주주의-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 편은 자국 내에서는 물론 유럽 각국에서 비판받는 이탈리아의 언론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프로그램은 그가 당선에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 배경으로 다수의 미디어를 직접 통제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3선에 성공한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이미 그 자신이 이탈리아 최대 미디어 그룹의 소유주이다. 시청률 1위의 상업방송은 물론 신문사, 출판사, 영화배급사에 광고회사까지 한 사회 내의 미디어를 직접 소유하고 이제는 공영방송마저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하고 있다. 한 사회 내의 언로를 통제함으로써 진실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 나아가 그러한 왜곡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가치가 얼마나 훼손될 수 있는지를 최근의 이탈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통해 우리 앞에 제시한다. 그리고 이렇게 KBS 스페셜이 유럽의 한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건 그저 단순히 남의 일에 참견하길 좋아하는 호사가적 취미 때문이 아니다. # 익숙한 광경을 보다 "TV가 한 사람의 손에 놀아나면 결국 우리는 그가 제시하는 거짓된 진실 속에 살게 됩니다." - 나보나 광장 시위현장에서 한 학생의 인터뷰 중 기시감. <언론과 민주주의-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의 도입부를 보며 느낀 첫인상은 '낯설지 않음'이었다. 우리는 멀지 않은 과거에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가 대중매체를 얼마나 효과적인 도구로 이용했는지를 여전히 기억한다. 그는 기사와 칼럼을 통해 끊임없이 유대인에 대한 대중의 증오심을 부추겼고 당시로서는 최첨단 미디어인 라디오를 이용해 대중을 효과적으로 선동했다. "여론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괴벨스의 믿음이 시공간을 뛰어 넘어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에게까지 전해진 것일까. 온갖 대중매체의 유통경로를 통제한 이탈리아의 미디어 재벌 베를루스코니는 그러한 괴벨스를 현대적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데자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성공한 기업가이기에 경제를 잘 굴러가도록 할 것 같다"는 현지 택시기사의 인터뷰는 지금의 대통령 이명박을 당선시킨 지난 대선 국면의 한국사회의 그것과 놀랍도록 빼닮았다. 건설업에서 시작해 이탈리아 최고 미디어 재벌이 된 베를루스코니나 마찬가지로 건설로 시작해 서울시장을 역임한 이명박의 성공스토리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사기 충분했다. 그렇게 성공한 CEO 출신들은 개인의 과거 성공을 국가의 미래 성공에 등치시키며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좌파정권에 실망한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선거과정에서 후보자의 부패나 비리가 별로 문제시 되지도 않았던 것, 자신들의 성공이 온전히 개인의 힘으로 이룩된 것임을 공공연히 자랑하고 마찬가지로 '당신'들도 열심히 노력하면 '자신'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고문을 심어주는 것까지. 그렇게 그들은 우리와 닮아 있었다. 공영방송 라이(RAI)를 장악하기 위해 이사회를 베를루스코니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한 사실을 언급할 때면 이제 프로그램이 말하려고 하는 바는 뚜렷해진다. 혹시나 제작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시청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노파심에서였을까, 국내 최대 부수와 열독률을 자랑하는 한 일간지는 곧바로 자신들의 사설지면을 통해 이 프로그램을 친절히 '설명'해주기도 했다. '이건 먼 나라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KBS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이 신문은 자주 그렇게 해왔듯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들만 늘어놓았던 점이나 표현이 세련되지 못했던 점이 아쉬움을 주기도 했지만, 나에게 이 좋은 프로그램을 다시 찾아보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 방송의 공공성 확보를 위하여 한 사회의 언론이 처한 지평은 곧 그 사회가 얼마나 민주적인지의 척도가 된다.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의 각기 다른 목소리들이 얼마나 투명하게 표출되며 또한 권력에 대한 비판과 감시기능이 원활히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언론의 제 역할을 규명하고 나아가 민주주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비판과 감시라는 그 본연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언론은 특정집단의 이해관계에 충실하거나 혹은 그 자체로 권력이 되었다. 공영방송이 존재해야할 이유는 바로 이 지점이다. 공영이든 민영이든 혹은 관영이든 문제는 언론사를 소유한 주체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언론이 진정한 언론답게 존재할 수 없는 상황, 언론의 제 역할을 방해하는 권력들의 횡포에 있다. 공영방송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한 사회의 언론은 이러한 문제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게 제 역할을 해나갈 수 있다. 카뮈의 말을 빌리자면, 공영방송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공영방송마저 없다면 무조건 나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대중매체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현실에서 드러나는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의 당파적 대립은 물론 대다수의 매체가 자본주의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정확히 그 범위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잡는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우리는 그동안 매체 안에 담겨진 내용을 확산시키거나 매체 자체의 기술을 창출할 수 있는, 시장에 대한 지배의 정도에 따라서 한 사회내 담론과 문화권력을 조정할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지켜봐왔다. 오히려 이렇게 자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대중매체는 그 본래적 기능, 즉 사회적 의사소통의 기술적 가능성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공공성에 기여하기보다는 개인주의적 삶의 형식을 공고히 하고 시민들을 정치경제의 문제로부터 떨어뜨리려 하고 있다. 공적매체라는 전파를 사용하는 방송 역시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에 공영방송, 즉 특정집단이 아닌 자본이나 정치권력의 영향에서 벗어나 다수의 공중에 의해 전파가 사용되는 체계가 필요한 것이다. # 다시 공영방송을 생각하다 정권의 언론장악은 더 이상 '음모'가 아닌 '현실'이다. 공영방송의 사장 한 명을 몰아내기 위해 국가사정기관이 총동원됐고 대통령후보 방송특보 출신이 방송사 사장으로 내려앉아 수명의 기자들을 해고하는 광경을 우리는 목도했다. 공영방송이란 것이 존재한다고 해서 방송의 공공성이 저절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5공, 6공 시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정권차원의 방송장악이 민주사회라는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일어나는 현실은 공영방송 역시 자칫 잘못하다가는 허울뿐인 공영방송, 오히려 공공성을 저해하는 공영방송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공공성의 영역이 자동적으로 구축되는 것이 아니듯, 공적 가치를 실현할 공영방송을 수호하는 일 역시 시민사회의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민주사회 구성원으로서 공영방송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보다 많은 담론과 논의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 나가며 쇠고기협상을 하는 것을 보고 외국과의 협상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고, 대운하를 밀어붙이는 것을 보고 우리의 백두대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생각할 수 있었기에 오히려 지금 정권에 감사하다는 우습지 않은 우스갯소리는 공영방송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지금의 사태는 현 정권의 잘못을 저지하는 차원을 넘어 방송의 공공성에 대해서, 또한 그러한 공공성을 실현할 최소한의 토대로서 공영방송의 존재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