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_
[시민비평공모-금상] 2008년 대한민국, 그 불편한 진실
등록 2013.09.3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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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단체가 주최하고 <오마이뉴스>가 후원한 <시민비평 공모 - 시민, '좋은 방송'을 말하다>에 참여해주신 시민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현 정부들어 위기에 처한 공영방송 시사보도 프로그램의 가치를 알리자는 취지로 기획된 이번 공모에 48편의 글이 들어왔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이중 8편을 선정했고, 그 수상작을 싣습니다.


[금상] 2008년 대한민국, 그 불편한 진실

‘KBS 스페셜-워킹푸어’ / 오슬기

▲ < KBS 스페셜 > '일하는 빈곤층, 워킹 푸어'


궁할 궁(窮)에 바쁠 망(忙).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한자가 모여 만들어진 중국의 신조어가 있으니, 바로 '궁망족(窮忙族)'이다. 미래를 위해 죽도록 일하면서도 가난하여 희망이 보이지 않는 처지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란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워킹 푸어(Working Poor)'와 비슷한 뜻인 셈이다. 얼마 전 이와 관련해 한 취업 사이트에서 놀라운 설문 결과를 발표했다. 우리나라 20~30대 직장인의 65%가 스스로를 아무리 일해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근로 빈곤층, '워킹 푸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2008년 대한민국, 그 불편한 진실

국민소득 2만달러의 나라 대한민국. 그러나 2008년 현재 저임금계층 비중은 27%로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열심히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든 사람이 전 국민의 1/4이 넘는다는 얘기다. 지난 9월 28일 '<KBS 스페셜> 일하는 빈곤층, 워킹 푸어(Working Poor)'편은 이와 같은 불편한 진실을 수면 위로 끌어냈다. 1시간 남짓 담담한 목소리로 풀어낸 이야기에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새벽 1시 반. 승객이 모두 떠난 지하철 승강장에 한 여인이 쪼그려 앉아 바닥을 닦고 있다. 올해 59살의 박연자씨는 청소용역 근로자다. 매일 밤 9시부터 새벽 6시까지, 무려 9시간 동안 만여 평 규모의 역사와 7개의 출입구를 쓸고 닦는다.

이렇게 꼬박 한 달을 일해 받는 돈은 수당을 더해 백만원이 조금 넘는다. 몇천원을 더 벌기 위해 쉬지 않고 계속되는 노동.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동네 경로당에서 소일거리를 한다. 800장의 종이봉투에 손잡이를 붙이면 장당 10원씩, 모두 8000원을 받을 수 있다.

집에 돌아와 청소 중 감전사고로 다친 팔 때문에 약을 먹던 박연자씨가 갑작스레 흐느낀다. 힘겹게 속으로만 삼키는 눈물,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시름과 절망이 묻어 있을까. 쉼 없이 약을 먹어도 사그라지지 않는 고통. 아무리 일을 해도 나아지지 않는 제자리 인생. 지독한 가난을 대물림 받고 있는 아들.

벼랑 끝에 선 워킹 푸어

'워킹 푸어' 문제는 때로 예상치 못한 무서운 결과를 낳기도 한다. 최근 급격히 증가한 무차별 범죄가 그 예다. 가해자들의 대부분은 오랜 시간 깊은 절망과 분노를 품어 온 '워킹 푸어'였다. 올해 6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본의 '아키하바라 사건'. 일일 파견 노동자였던 범인은 자신의 신변을 비관하여 길 가는 행인들을 무차별 공격했고, 모두 17명이 죽거나 다쳤다.

올 들어 일본에선 한 달에 한 번꼴로 이 같은 '거리의 악마(도리마)'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들은 대개 단순 노무직, 비정규직으로 경제적 지위가 낮은 '워킹 푸어'였다. 최근 출간된 책 <워킹 푸어>의 저자인 카도쿠라 다쿠시씨는 비정규직이 확산될 경우 일본인 1/4이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일본이 자랑하던 '1억 중산층 시대'는 옛말이 돼 버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묻지마 살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방송이 나가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논현동 고시원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임시직을 전전해 오다 몇 달 전부터 무직 상태였던 범인은 '세상이 날 무시해 살기 싫었다'며 무서운 분노를 표출했다. '생계형 범죄' 또한 연일 뉴스를 장식한다.

도대체 저임금 근로자들의 삶은 얼마나 힘겨운 걸까. 현재 우리나라의 법정 최저임금은 3770원으로, 주 40시간을 일하면 한 달에 78만원을 벌 수 있다. 하지만 최저임금위원회가 산정한 미혼단신근로자의 생계비는 120만원에 이른다. 물가는 치솟는데 임금은 제자리다. 얼마 전 내년 최저임금이 4000원으로 인상됐지만 이를 적용 받는 노동자는 12%에 불과하다. 최저임금조차 못 받는 사람이 200만 명에 이른다.

<KBS 스페셜>, 함께 길을 찾다

근로자들은 6%에 불과한 최저임금 인상폭이 불만족스럽지만, 이윤을 내야 하는 기업 측에서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양쪽 모두를 배려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KBS 스페셜>은 미국과 덴마크의 사례에서 조심스레 해답을 찾아본다.

미국 볼티모어에서 통학버스 보조원으로 일하는 드니스 배리씨. 여성가장인 그녀는 네 명의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다. 넉넉한 삶은 아니지만, 가족이 함께 먹고사는 데 큰 문제가 없다. '생활임금'을 적용받기 때문이다.

'생활임금(Living Wage)'이란 노동자가 4인 가족과 최소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임금을 뜻한다. 최저임금과 생활임금간의 차액은 시 재정으로 충당된다. 한 시의원은 생활임금의 도입이 결과적으로 시에도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혜택을 받은 시민들이 안정적인 수입을 받아 세금을 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30개 주에 생활임금이 적용되고 있다.

국민 소득도 행복지수도 세계 최고 수준인 덴마크는 어떨까. 엘링 스모씨는 한 제조회사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는 청소 관리원이다. 몸이 불편해 주 20시간밖에 일하지 못하지만 정규직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자신의 일과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정규직과 임시직간의 임금격차가 적은 대신 해고가 자유롭다.

하지만 실직자들에게는 정부가 제공하는 실업 수당과 재취업 교육이 준비돼있다. 결국 해고 인력의 95%는 1년 내 재취업에 성공한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덴마크의 노동시장 모델은 촘촘하게 짜인 사회 안전망과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배려하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에 가능했다. 결국 미국과 덴마크 모두 정부와 국민들의 대타협이 문제 해결의 열쇠였던 셈이다.

사람이 자원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실질 비정규직이며, 4년제 대학 졸업자의 약 20%가 비정규직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그야말로 비정규직의 바다인 것이다.

기업에서도, 정부에서도 해결해주지 않는 이런 상황 속에 스스로 돌파구를 찾은 대학생들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같은 대학 동아리 소속인 이 학생들은 학내 경비원과 청소 근로자들이 최저 임금조차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학교와 용역업체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 결과 노동조합이 결성됐고 근로자들은 꿈만 같던 주 5일 근무와 최저 임금을 보장받게 됐다.

한 여학생은 힘주어 얘기한다. 비정규직 문제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오늘도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박연자씨의 무거운 어깨 위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씨의 말이 겹쳐지는 듯하다.

"빈곤층은 교육받지 못하고 정부는 이들을 돕지 않고 있다. 가장 가치 있는 자원인 인력 자원에 투자하지 않는 한 번영은 없다."

방송을 보고 난 후, 한동안 먹먹한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나 또한 현실이 답답한 구직자 신분이기 때문일까. 취업난과 저임금에 허덕이는 주변 사람들이 떠올라서일까. 이번 '일하는 빈곤층, 워킹 푸어'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밝히고 공론화했다. 이제 시청자들은 '워킹 푸어'가 더 이상 해당 근로자나 사용자 측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정부와 온 국민이 함께 손을 잡고 해결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처럼 국민들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공영방송의 시사보도 프로그램만큼 사회 문제를 공론화하고, 그에 대한 공감대를 이끌어내기에 좋은 통로도 없다. 올해 방영돼 화제를 모은 방송들만 봐도 <KBS 스페셜> 이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해 얼마나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성찰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다.

'언론과 권력,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 '노회찬과 상계동 사람들'에서는 어긋난 현실에 거울을 비춰줬으며, '안마사 그녀의 이야기', '일하는 빈곤층, 워킹 푸어'를 통해서는 소외 계층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환기시켰다. 그런가 하면 '꿈꾸는 토르소맨, 더스틴 이야기', '그의 잃어버린 목소리, 테너 배재철의 도전'과 같은 감동적인 휴먼 다큐를 선사하기도 했다. 시청자들은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공영방송의 시사보도프로그램으로서 이처럼 올곧고 따뜻한 시선을 견지할 때, 우리는 더 큰 사랑과 신뢰로 보답할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