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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의 불법 판촉 행위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사진은 지난 2003년 1월 20일 오후 서울 광진구 구의동
한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자전거 신문 판촉사원들이 트럭에 싣고 온 자전거를 내리는 모습. ⓒ 오마이뉴스
권우성 |
작년 10월 어느 일요일 오후.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영화 테이프 한 편을 빌려오다가 집 앞 주차장에 세워둔 낯선
오토바이를 발견했습니다.
"가뜩이나 비좁은 주차공간에 누가 이렇게 남을 배려하지 않고 오토바이를 세웠을까?"
혼잣말로 짜증스럽게 되뇌이면서 지나치는데 <조선일보>라는 스티커 글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하여간
<조선일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쯧쯧…. 혀를 차는 순간, 신문이 나오지 않는 일요일에 무슨 일일까, 의문이
들더군요.
"신문 안본다는데..." - "공짜로 몇 개월 넣어드려요"
건물로 들어서자 반지하 방에 사는 아주머니와 판촉사원으로 보이는 남자의 실랑이 소리가 복도를 울렸습니다.
"전화기·온열기, 뭐 이런 거 드리구요, 공짜로 한 몇 개월 넣어 드려요." "아이. 글쎄 저희는 신문 안
본다니까요. 도대체 몇 번을 말씀드려야…."
아하, 저것이 말로만 듣던 불법 판촉이구나! 민언련 회원인 저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이런 '부자신문'들이 불법경품을 쓴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또 불법경품을 신고하면 포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딩동- 딩동-. 잠시 뒤 초인종 소리와 함께 우리 집에도 조선일보 판촉사원이 찾아왔더군요.
"<조선일보>에서 신문 보시라고 나왔는데요."
저는 뭘 어떻게 해야 불법경품을 신고할 수 있는지 몰라 잠깐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일단 뭔가 증거를 남겨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MP3를 녹음기능에 맞춰 들고 문을 열었습니다.
입구에서 본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발신자 표시 전화기'를 주고 내년 5월까지 공짜로 신문을 넣어주겠다면서
<조선일보> 구독을 권하더군요. 순간 저는 '계약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을 했습니다. 신고를 하려면 계약서가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녹음 내용 같은 증거만 있으면 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차 접촉 "집사람과 의논해봐야..." 거절
"이럴 줄 알았으면 신고포상제 홍보물을 잘 읽어볼 걸…."
잠깐 동안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구독계약서가 필요한지 확실하지도 않는데, 괜히 구독신청했다가 읽지도 않는 신문을
집에 들이는 게 싫어서 "집사람과 의논해야한다"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뭘 그런 걸 집사람과 의논하느냐"면서 집요하게 매달리는 겁니다. 제가 나중에 볼 생각이 들면 연락을
하겠다고 했더니 명함을 내놓더군요.
어, 그런데 명함이 이상했습니다.
저는 신문판촉은 당연히 우리 동네 신문지국에서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명함에는 <조선일보> 로고와
함께 '본사홍보부 ○○○'이라고 돼 있는 겁니다. '오호라, <조선일보>가 이런 식으로 일등신문 자리를 지키는게 아닐까' 꼭 신고를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다음날, 저는 공정위에 신고하려면 계약서와 경품 사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전날 받은 명함의
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저녁에 동네 <조선일보> 지국에서 전화기를 들고 왔더군요.
2차 접촉 "아저씨 계약서 써주고 가요"
왜 다른 분이 왔냐고 물었더니, "어제 왔던 사람은 조선일보사에서 직접 나온 판촉사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신문은 내일부터 넣어드릴게요. 그리고 내년 5월부터 수금하러 올게요"라고 말하면서 휭하니 나가는 게 아닙니까?
"어…. 아저씨, 계약서 써주셔야죠."
당황한 저는 그 사람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계약서를 가져오지 않았다"면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불법경품의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흔히 쓰는 수법인 것 같았습니다.
이거, 좋은 일 한번 하려다 <조선일보> 좋은 일만 시키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포기하지 않고 "약식으로라도 계약서를 써달라"고 하면서 흰 종이와 펜을 내밀었습니다. 약식 계약서가 증거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형식으로든 문서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집사람에게 늘 융통성 없다는 핀잔을 듣는 제가 'MP3 녹음'에 이어 '약식 계약서'까지 쓰다니…. 어떻게 그런
임기응변이 떠올랐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입니다.
결국 약식 계약서를 받은 저는 '조선일보 홍보부'라는 사람의 명함, 불법판촉현장을 녹음한 파일, 약식 계약서와
전화기 경품을 민언련에 주었고, 저 대신 민언련이 공정위에 신고했습니다.
혹시 해코지? 그런 일은 없었다
돈보다는 의미있는 일을 했다는 사실이 뿌듯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조선일보>가 신고사실을
알아차리고 내가 없을 때 아내와 딸에게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전에 신문지국들끼리 싸움이 벌어져 살인사건까지
일어났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떠올라서 한동안 찜찜한 맘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저는 올해 신고포상금으로 40만원 조금 넘는 돈을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사무실
동료들에게 피자를 '쏘고', 나머지는 아버님 칠순잔치에 보태서 동네 어르신들께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조선일보> 덕분에 효도한
셈입니다.
그리고, 민언련은 기자회견을 열어 제가 신고한 내용을 불법판촉의 사례 가운데 하나로 발표했습니다. 효도도 하고
불법경품 근절 운동에도 기여했으니 그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선일보>, 나처럼 둔한 사람한테 딱 걸리다니…. 정말 고맙다!
그런데 이제 불법판촉은 그만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불법판촉 없이 진짜 '1등 신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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