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없는 진실은 견딜 수 없다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기 몇 시간 전, 포털뉴스 화면에서 부고 기사를 보았습니다.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이 95세를 일기로 선종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도 아니지만 절로 숙연해져 잠시나마 그의 안식을 빌었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인기가 별로 없는 교황이었습니다. 전통의 수호자, 고집스런 교리주의자로 평가 받던 그는 전임 시절 폐지된 교황 의상을 부활시키고 동성애, 이혼, 여성사제 서품 등에 반대했습니다. 사제들의 성추문과 뇌물 비리가 폭로되면서 궁지에 몰린 그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스스로 교황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전임 교황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 모은 건 <두 교황>이란 영화였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이 영화에서 완고한 원로라기보다는 순명하는 신학자, 정통을 지키려는 성직자로 그려집니다. 교황청에서 보수파를 상징하는 그와 진보파를 대표하는 현직 프란치스코 교황 사이의 긴장감 넘치는 대화를 축으로 영화는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원칙과 개혁의 공존을 잔잔하게 설파합니다.
크리스마스 연휴에 영화 <두 교황>을 다시 보았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흘려버렸던 대사가 유난히 마음에 꽂혔습니다. 영화 후반부 베네딕토 16세가 성직자들의 비리를 알고도 침묵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장면에서, 훗날 프란치스코 교황이 되는 호르헤 추기경은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사죄경을 바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진실은 중요하지만 사랑이 없는 진실은 견딜 수 없습니다.” 그것은 베네딕토 16세 자신이 세상을 향해 발표한 ‘진리 안의 사랑’이란 회칙의 핵심 메시지였습니다.
비판 언론과 시민단체에 불어닥친 외풍
어지러웠던 지난해를 보내고 더 만만치 않을 새해를 맞으며, 그 한 문장을 곱씹어 봅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2022년 한 해 안팎으로 작지 않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새 정권이 들어서고 비판 언론과 시민단체를 겨냥한 통제가 공공연하게 자행되면서 민언련 역시 외풍을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정치적 편향성’이란 프레임이 씌워진 민언련은 정책 공론장에서 배제되기 일쑤였고, 방송통신위원회 종편 재승인 심사를 비롯한 미디어기구 심사와 각종 위원회 활동에 참여한 민언련 인사들은 집중 감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1월 3일 늦은 밤에도 채영길 공동대표는 검찰에 불려가 학자의 양심을 추궁당하고 있습니다. ‘채널A 검언유착 사건’ 당사자로 민언련에 고발당한 한동훈 검사장이 윤석열 정부의 법무부 장관이 되고부터 어쩌면 이런 상황은 예견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당장 위기에 몰린 공영방송을 지키는 일이 시급합니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국민의 힘이 장악한 서울시의회가 합작해 재정 고갈과 폐쇄 위기로 내몬 TBS를 다시금 일으키고 명실상부한 서울 시민의 공영미디어로 재탄생시킬 수 있도록 주민발의 조례안을 띄우고자 합니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공영방송을 만들기 위한 투명하고 공정한 경영진 선임 제도도 안착시켜야 합니다. 준공영방송인 YTN 사영화를 반대하고, MBC에 대한 정치적 공격과 협박도 막아내야 합니다. 공적 재정을 기반으로 설립된 공영방송은 자본과 권력의 개입에 휘둘리지 않고, 진실을 알릴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혐오·배제 내포한 권력의 말에 맞서지 않는다면
공영방송과 제도를 지켜내는 것만큼이나 분열 및 적대로 가득찬 미디어 언어를 정화하고 바로잡는 노력도 중요합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지속되고 구조적 차별에 의한 사회 내부 갈등이 격화되면서 혐오와 증오의 말들이 미디어 연결망을 통해 일상적 언어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플랫폼과 채널을 넘나들며 재생산되고 무한 유통되는 적대와 반감의 언어 속에서는 공익과 공생, 연대의 가치가 들어설 수 없습니다. 미디어가 매개하는 혐오와 차별의 표현이 확산될수록 권력 및 자본이 구축한 폭력의 위계는 더욱 고착화될 우려가 큽니다.
타자를 동등한 생명과 자율성을 가진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목적을 위한 도구로, 언제든 사고팔고 대체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의식이 만연하면서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고 작고 약한 것을 경멸하는 세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혐오와 배제를 내포한 권력의 말에 단호히 맞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끝내 세월호와 이태원의 처참한 통곡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민언련은 올해도 인간성과 미디어 윤리를 파괴하는 혐오·차별을 생성, 유통하는 구조와 세력에 지속적으로 대항할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어쩌면 쉬울 지도 모릅니다. 공감과 공론을 전제하지 않은 진실이라면 말입니다. 적이냐 동지냐, 양극단의 대치가 첨예화될수록 민언련의 자리도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정치검찰의 칼과 족벌언론의 펜을 앞세운 무도한 정권에 맞서 장렬히 싸우라는 요구,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시대일수록 정론과 직필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립니다. 지금 민언련에 주어진 소명은 진실이 공론을 통해 시민들의 공감을 얻고 사회적 공명을 일으킬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해도 의회와 광장 그 사이 어디쯤에서 분주히 뛰어다닐 민언련을 만나거든 반갑게 인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정수경 민언련 정책위원장
▼날자꾸나 민언련 2022년+2023년 겨울호(통권 223호) PDF 보기▼
https://issuu.com/068151/docs/_2023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