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가을호][여는 글] 어느 토요일의 단상 - 정태춘, 소울푸드, 그리고 공영방송
등록 2023.02.07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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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 청명했던 9월 24일 토요일, 민언련 회원의날 행사가 열렸습니다. 코로나로 지난 3년간 미뤄졌던 후원회원들과의 반가운 만남은, 민언련 오픈하우스를 시작으로 서촌의 역사 문화적 유적을 돌아보는 서촌산책과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상영 및 관객과의 토크로 늦은 밤까지 다채롭게 이어졌습니다.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시대의 가객 정태춘의 40년간 음악 인생을 담아낸 다큐멘터리이지만 단지 정태춘의 개인사가 아니라 지난 40년 동안 그의 노래와 함께했던 우리들의 기억을 소환하고 되돌아보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특히 영화 중에 삽입된 ‘우리들의 죽음’이란 노래에 각별한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밤마다 듣고 또 들었던 ‘우리들의 죽음’

 

‘우리들의 죽음’은 1990년 망원동 연립주택 지하 셋방에서 불이 나 5살, 3살 어린 두 남매가 숨진 사건을 소재로 한 노래입니다. 새벽 일찍부터 아이를 맡아주는 곳이 없어 밥상과 요강을 방 안에 들여놓고 밖에서 문을 잠근 채 경비원 아빠와 파출부 엄마가 일하러 나간 사이 벌어진 참극이었죠. 전세 4백만 원짜리 단칸방에서 누나는 엎드린 채, 동생은 옷가지에 코를 묻은 채 사체로 발견되었답니다.

 

이 노래에 왜 그렇게 꽂혔었는지 저도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서정적이고 평화로운 노래들도 많은데 신림동 원룸에서 늦은 밤 불면증으로 잠이 깰 때마다 반복해서 이 노래를 듣고 또 들었습니다. 볕 안 드는 어둑한 단칸방에서 어린 남동생을 돌보며 하루를 보내던 제 어린 시절이 떠올라 그랬을까요? 치열한 80년대를 보내고 30대에 접어든 뒤 문득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서러웠던 심경에 깊은 공명을 불러일으켜서 그랬을까요? 평화로운 서정 가요도 아니고 진취적인 투쟁가도 아닌데, 그때 저를 위로하고 치유해 준 것은 유년의 아픈 추억과 당시의 무력감을 송곳처럼 깊숙이 파헤치고 의식의 표면 위로 끌어올려 준 이 노래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소울푸드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달달하고 매콤하고 기름진 음식을 찾다가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헛헛할 때 간절히 당기는 음식. 그 자체로 위로가 되고 약이 되고 다시 몸 일으켜 나아갈 힘이 되어주는 음식. 제겐 ‘우리들의 죽음’이, 정태춘의 노래가 그런 소울푸드 같은 음악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민을 위한 소울푸드, 공영방송

 

공영방송이 왜 필요하냐고 묻습니다. TV를 틀면 수백 개의 채널이 쏟아져 나오고, OTT로 유튜브로 온갖 영상들을 다 찾아볼 수 있는 시대에 공영방송이 뭐 그리 대수냐고, 공영방송이 중요하던 시대는 이제 지났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공영언론이 우리 사회에서 평범한 시민들을 위한 소울푸드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깔깔대는 오락물이나 흥미진진한 엽기스릴러물은 아니어도, 우리 삶의 이면과 치부, 구석지고 응달진 곳을 두루 응시하고 공감하고 연대하게 하는 우리 생존의 기본조건.

 

이것은 산업의 영역도, 정쟁의 영역도 아닙니다.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삶을 지탱하게 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게 해 주는 소통과 각성의 마지막 보루입니다. 더구나 지금처럼 끼리끼리 입맛에 맞는 정보만 골라서 보고 그 좁고 깊은 우물이 세상의 모든 것인 양 우물안 개구리들을 만들어내는 현실에서, 문제의 정곡을 짚어주고 고통과 불의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투영해주는 공동의 우물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소중합니다.

 

지금, 공영방송이라는 공동의 우물에 독을 타고 아예 봉쇄해 버리려는 조직적이고 치밀한 움직임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KBS를 감사하고, MBC 사장 해임안을 상정하고, TBS 미디어재단을 폐지하겠다는 조례안을 내고 YTN 최대주주인 공기업의 지분을 매각해 민영화하려고 합니다.

 

공영언론, 방통위, 민언련을 향한 위협

 

방송의 공공성과 공적 책임을 관리하는 방송통신위원회를 겨냥한 감사와 검찰수사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회원의 날 행사가 있기 바로 전날인 9월 23일, 2020년 TV조선 재승인 심사과정에서 ‘조작’이 있었다는 혐의로 방송통신위원회와 당시 심사에 참여한 심사위원 3명에 대해 대대적인 압수수색이 있었습니다. 압수수색을 당한 심사위원 중에는 당시 학계 추천으로 심사에 참여한 민언련의 채영길 공동대표도 있습니다. 

 

검찰의 주장은 “TV조선에 대한 재승인을 막고자” 방송통신위원회 실무자들이 “심사위원 3명을 불러 점수를 수정하도록 요구”하고 심사위원들과 “공모”했다는 것입니다. 심사과정의 엄격한 규율과 절차를 아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억지 주장입니다. 심사위원들이 평가와 관련해 방송통신위원회 직원과 따로 소통하거나 접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다른 심사위원들이 어떤 점수를 주는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심사에 참여한 위원들의 공통된 증언입니다. 4박 5일(2020.3.16~20) 동안 진행되는 합숙 심사에서 공식회의를 통해 점수를 어떻게 수정하든 그건 개별 심사위원들의 당연한 권한입니다.

 

감사원과 검찰이 이렇게 무리한 감사와 수사를 강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공영언론 전반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통해서 그들은 무엇을 얻어내고자 하는 걸까요? 왜 정부 여당은 툭하면 민언련을 표적 삼아 겁박을 해대는 것일까요?

 

지금껏 공영언론이 전 국민의 소울푸드 역할을 다해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산업적 논리를 앞세워 규제 완화를 추진해 온 방송통신위원회가 제대로 된 관리감독자 역할을 해왔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공영언론과 방송통신위원회에 대한 정치적 공세와 위협을 방치하면 시민을 위한 공동체의 우물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회원의날 행사를 마치고, 오신 분들을 배웅할 때 문득 마주한 별밤을 생각합니다. 울고 웃으며 하루를 함께한 회원님들의 뒷모습이 작은 별처럼 빛났습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힘을 모아 함께 견뎌줄 동지가 더없이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폭풍의 먹구름 아래에서 여러분의 손을 꼭 잡으며 버텨낼 수 있도록 힘 보태주십시오.

 

이진순 상임공동대표

 

 

 

▼날자꾸나 민언련 2022년 가을호(통권 222호) PDF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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