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호 회원을 만나러 자유언론실천재단으로 가는 길은 민언련 사무실에서 걸어서 10분. 오랜 시간 연대활 동 주요 ‘파트너’로만 생각했던 분을 ‘감히’ 인터뷰이로 만나려니 어색하기만 했다. 6년 넘게 인사하고, 밥 먹 고, 활동을 도모했지만, 막상 박강호 회원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내친소)처럼 박강호 회원을 소개하자는 마음으로 ‘부담’을 내려놓고 그를 만났다
아르바이트생, 두 달 만에 출판사 편집장 되다?
만나자마자 일 얘기다. 사실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행동일 것이다. 박강호 회원은 자유언론실천재단 상임 이사를 맡고 있다. 재단법인이라고는 하지만 자유언론실천재단이 ‘빵빵한 재산’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상징 성만은 뚜렷하다. 자유언론실천재단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80년해직언론 인협의회‧새언론포럼 등 언론계 원로·중진 인사들과 시민단체‧현업단체들이 뜻을 모아 2014년 10월 설립했다. 흔히 말하는 언론계 ‘코어’ 조직이다. 주요 언론 현안이나 이슈에 중심을 잡고 언론계 총의를 모으는 역할을 한다. 자유언론실천재단 실무 중심에 박강호 회원이 있다. 박강호 회원은 2015년부터 민언련을 후원했으니 그리 길지는 않다. 회원활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정책위원, 이사 등의 직책을 맡은 적도 없다. 그저 묵묵히 후원하는 4천명 회원 중 일원이지만 민언련(특히 사무처)이 활동하면서 언제든 상의하고, 도움을 구하는 우선순위다.
조영수(민언련 협동사무처장) 우선 궁금증부터 풀어보고 싶어요. 자유언론실천재단 상임이사를 맡고 있잖아요. 그리고 꽤 오랜 시간 언론운동을 하셨는데 언론과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는가요?
박강호(자유언론실천재단 상임이사) 군 제대 후 복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한 선배가 사회과학 출판사 을 운영하고 있었어요(‘열’은 ‘연다’는 의미). 그 선배가 “뭐 하냐. 아르바 이트도 할 겸 와서 좀 도와줘”라고 불렀죠. 용돈도 벌고 경험도 쌓고 나쁘지 않았죠. 출판사에서 두 달인가 일하는데 선배가 갑자기 경찰에 잡혀가 버렸어요. 졸지에 편집장이 됐어요. 영업부장 한 명, 경리직원 한 명뿐이고. 그러니 제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된 거에요. 그렇게 스물여섯부터 출판사에서 일하게 됐고 대학 졸업도 못 하고 지금까지 온 거죠.
조영수 선배 출판사에 아르바이트 갔다가 ‘길’이 바뀌게 된 거네요. 그래서 출판사 살림은 잘 꾸렸나요?
자유언론실천재단 상임이사인 박강호 회원이 격변의
시간을 거친 출판운동, 언론운동 활동을 이야기하고 있다.
박강호 선배가 구속되고 3개월 후인가 경찰이 또 들이닥쳤어 요. 『민중의 역사』라는 책 때문에요. 마침 2권을 편집하고 인쇄소에 넘겼는데 인쇄소가 ‘털리고’ 저도 같이 걸린 거죠. 사장은 이미 감옥에 가 있고… 사장 아내가 제 동기였는 데, 뭐 어떻게 하겠어요. 제가 뒤집어쓰는 수밖에요. 어쩔 수 없이 ‘큰집’ 신세를 지고 나왔더니 그때 막 서울지역출판노조가 만들어졌는데 노조 사무국장 할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1991년 4월 서울지역출판노조 사무국장 이 됐고, 2년 뒤 위원장이 됐어요. 거기다 민주출판언론노조협의회(민출노협)도 있었는데 그 곳 사무처장까지 겸하게 됐죠. 너무 이른 나이(30)에 노조 위원장을 했어요.
조영수 당시 출판업이 워낙 소규모고 특히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라면 사정이 뻔했을 거 같아요. ‘알음알음’ 방식의 조직화와 ‘더불어’ 모임은 가능하겠지만 지금처럼 집회를 한다거나 이런 건 제대로 못 했을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을까요?
박강호 1990년 초반 서울지역출판노조가 만들어질 때 주요 구호가 ‘사상‧출판의 자유 쟁취!, 국가보안법 철폐’였어요. 그때 서울지역출판노조와 인문사회 출판사 사장들 대부분이 가입한 한출협(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이라고 있었어요. 노태우 정권 시절이니까 국가보안법 철폐, 사상‧출판에서의 자유 등을 함께 외치기 위해 연대한 거죠.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를 하는 사장들도 사업 못지않게 출판운동, 문화운동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IMF 외환위기 때였어요. 1998년 2월인가, 문학 출판으로 유명한 M 출판사 직원들 상담을 했는데, (대표가) 어느 날 갑자기 직원을 모아놓고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 월급 못 준다. 나오든 안 나오든 나는 모르겠다”라고 했다는 거에요. 물론 당시 그곳만 그렇진 않았겠지만 ‘참 이런 야만이 있나’라고 생각했죠.
‘운명처럼’ 출판운동에서 언론노동운동으로
조영수 1998년부터 활동 공간이 언론노련(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1988년 11월 창립)으로 확장된 거죠? 지금은 언론노조 (전국언론노동조합)지만 2000년 11월 전까지는 언론노련이었는데 회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설명 해주세요.
박강호 언론노련은 각 언론사 노동조합의 ‘연합체’인 거죠. 반면 언론노조는 하나의 수직적인 조직체인데, 쉽게 말해 언론노련일 때는 기업별로 ‘노조위원장’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언론노조 위원장’ 한 명이고, 회사별로는 언론노조에 소속된 본부장‧지부장‧분회장인 거죠. 말 그대로 기업별 노조가 하나의 단일노조를 건설한 거죠.
조영수 자리를 옮긴 때가 언론노련이 산별노조인 언론노조로 전환하려던 시기였네요. 이 과정에서 ‘모종의’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박강호 1988년 언론노련으로 출범한 뒤 1998년 최문순 위원장(현 강원도지사)이 당선되면서 산별 전환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꾸렸고, 2000년 11월 산별노조인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출범했죠. 그때 산별추진위원회에서 조직위원장 을 맡았어요. 말이 조직위원장이지 선전과 홍보도 맡아 닥치는 대로 했죠. 1998년부터 2000년까지 3년 정도, 아마도 제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살았던 때인 거 같아요(웃음). 청춘을 출판, 언론운동에 바쳤다고 해야 하나… 뭐 원해서 했고, 또 원 없이 일했다고 생각해요. 후회없이 활동했어요(이후 언론노조에서 상근 부위원장으로만 10년 활동 했는데 상근 부위원장으론 최장 기간 활동했다).
조영수 이쯤에서 묻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이렇게 활동하는 동안 아내나 자녀 등 가족의 불만이 상당했을 거 같아요.
박강호 생계를 제대로 책임지지 못했으니 늘 미안했죠. 지금도 그렇고요. 그래도 가족 간 사이는 좋아요. 처와 애들하고 맥주를 자주 마시는데 그때가 제일 행복해요. 군에 가 있는 둘째는 아주 좋은 술친구죠.
‘후원조직화’ 참 쉽지 않다
박강호 회원의 활동은 2007년 10월 언론노조 상근 부위원장을 그만 둠으로써 변곡점을 맞게 된다. 2007년 2월 언론노조 임원 선거가 있었는데 선거 직후 인수인계 과정에서 ‘총무국 직원 횡령 사건’이 터져 언론노조는 반년 가까 이 거의 식물상태나 다름없었다. 사태 수습 후 그는 사퇴했다. 18년 동안의 언론출판노조운동이었다. 그는 2008년 출판사를 시작했고, 아이들이 분당에 있는 이우중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이우학교 학부모 활동’을 열심히 했다고 한다. 이후 2014년 자유언론실천재단이 만들어지면서 다시 언론운동과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박강호 7년 정도 출판사를 하다가 언론계 선배 권유로 자유언론실천재단 사무실을 같이 쓰게 됐는데 자연스럽게 재단 일도 맡게 됐죠. 당시 현상윤 선배(전 KBS노조 위원장)가 자유언론실천재단 상임이사를 맡고 있었는데, 2015년 8월 그 역할이 제게 넘어왔죠. 벌써 만 7년이 되어가네요.
박강호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가 2021년 6월 28일 조선일보 앞에서 열린
‘조선일보 반인권보도규탄 및 제도개선 촉구 긴급 기자회견’에서 성명을 낭독하고 있다.
조영수 2014년 자유언론실천재단을 설립할 때 ‘역할이 무엇이냐’, ‘지속 가능하냐’ 등 논의가 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재단법인화 과정에서 재원확보 논의가 핵심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지금은 사정이 어떤지요?
박강호 버티는 수준이지요. 어렵다고 할까, 후원을 조직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민언련은 모니터링 등 외화 되는 확실한 활동이 있잖아요. 그런데 자유언론실천재단 활동은 특별히 표가 안 나니까요. 현안이 생길 때마다 민언련과 같은 시민단체, 언론노조나 기자협회 같은 현업단체, 동아투위나 조선투위와 같은 선배그룹을 묶어내는 역할을 하는데 이런 활동이 바로 후원으로 이어지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제가 상임이사를 맡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규모가 좀 되는 언론노조 산하 지·본부(노동조합)를 찾아가 후원을 설득한 거였습니다. 당시 ‘바짝’ 해서 그나마 사무국 장 급여와 사무실 임대료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재원구조를 만들어냈죠. 지속 가능하려면 최소 1,000명 정도 개인 회원이 있어야 합니다(현재는 200여명).
언론도, 언론단체도 중요한 건 ‘신뢰회복’
조영수 이제 맞닥뜨린 현실적인 얘기를 나눠볼까요.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잖아요. 이명박 정부가 시작된 게 2008년이니까 벌써 14년 전인데요. 그새 권위주의 정부 시절 경험이 흐려진 거 같아요. 사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극심한 언론탄 압으로 재구조화된 미디어환경 덕을 누렸다고 생각해요. 이후 문재인 정부 5년이 흘렀고, 다시금 어떤 현실이 우리를 기다 리고 있을 지 모르겠지만, 어떤 변화에 대비해야 할까요? 윤석열 정부가 이명박 정부 때와 같이 ‘고강도’ 보다는 ‘저강도’ 탄압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차라리 ‘고강도’라면 대응이 쉬울 수 있지만, ‘저강도’라고 하면 여러 가지 세심한 판단이 필요할 거 같은데요.
박강호 새 정부가 세게 나올 것 같은데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반민주 정부 아래서 벌어진 행위에 대한 적폐청 산을 추진했고, 그리고 언론계에서는 언론정상화를 추진했잖아요. 이를 반대로 행한다고 보면 쉽지 않을까요. 지난 5년간을 그대로 복수하고 싶을 거예요(웃음). 확실히 그 생각은 하고 있을 것 같아요. 공개적으로 공식적으로는 쉽지 않겠지만 온갖 방식을 동원해 괴롭힌다든지 다각도 방법을 강구할 거라고 봅니다. KBS 상황을 보면 벌써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고요.
<뉴스타파> 같은 언론사가 100개쯤 있으면
조영수 다각도의 괴롭힘에 대해 민언련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네요(웃음). 이어 언론과 언론시민단체에 당부할 말씀이 있다면.
박강호 어려운 질문이네요. 언론운동을 해온 사람으로서 느끼는 단상 정도를 말한다면, 미디어산업 전반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콘텐츠 위주로 흐를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수익을 내려니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지요.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야겠지만 그런 언론사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정통(좋은) 언론 이 설 자리는 자꾸 줄어들고 좋은 기사도 줄어드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봅니다. 바램이 있다면 같 은 언론사가 100개쯤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 공론장이 많이 건강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언론도 그렇고 언론시민단체도 그렇고, 중요한 게 뭘까 생각해 보면 신뢰회복이라고 봐요. 누구나 다 하는 얘기인데 문제는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것이냐가 고민이죠. 저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이번 대선을 거치면서 드는 생각은 정파성이 정말 큰 문제라고 봐요. 최근 몇 년 사이 정파성 문제가 더 심각해졌는데, 언론단체 도 마찬가지로 고민해봐야 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파성 문제는 굉장히 예민한 문제이긴 한데 자유언론실천재단 차원에서 토론회를 조직해볼 생각도 있습니다.
“일은 사람과 돈이 있어야 할 수가 있다”고 강조한 박강호 회원,
민언련 회원 한 분이 한 명의 후원회원을 더 늘리는 배가운동을 펼쳐달라고 당부했다.
조영수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가 된 거 같습니다. 민언련과 회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박강호 ‘회원배가 운동’에 나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개인 소신인데 일은 사람과 돈이 있어야 할 수가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사람도 없고, 사람이 없으면 일도 못하고 이게 악순환이거든요. 민언련 사무처도 최저임금 수준일 거예요. 시민단체로선 쉽지 않은 과제지만, 서울시 생활임금 수준엔 맞춰야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있어요. 이를 실현하기 위해 회원들이 한 명씩 늘리는 회원배가 운동에 나서주면 좀 방법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럼 언론운동도 다시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민언련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한국 시민사회운동 활동가들이 대부분 최저임금 수준 의 임금을 받고 있을 거예요. 이런 현실이 빨리 바뀌고 활동가들이 서울시 생활임금 수준이라도 받는 게 제가 생각 하는 선진국 기준입니다(웃음).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었어요. 활동가 실컷 키워서 다른 데 보내지 말고, 시민운동 역량이 축적되는 민언련을 바랍니다.
박강호 회원은 언론계가 풀어야 할 숙제로 '신뢰회복'을 우선으로 꼽았다.
인터뷰‧작성 조영수 협동사무처장
사진 이병국 이사
▼날자꾸나 민언련 2021·2022년 겨울호(통권 220호) PDF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