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비포 유 Me Before You>
감독 테아 샤록, 주연 에밀리아 클라크, 샘 클라플린, 개봉 2016년, 미국
말랑말랑한 로맨스 영화인 줄 알고 골랐는데 실상은 지독한 철학의 늪으로 인도하거나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보게 만드는 영화들이 더러 있다. 2016년 개봉한 <미 비포 유(Me before you)>(감독 티아 샤록)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자 조조 모예스(Jojo Moyes)가 시나리오로 만든 이 영화는 하루아침에 교통사고를 당해 가슴 아래 전신이 마비된 채로 2년을 버티다가 존엄사로 6개월 후 생을 마감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서른한 살의 윌 트레이너(샘 클라플린)에게 루이자 클라크(에밀리아 클라크)가 간병인으로 채용되면서 시작된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빈정대는 말로 상처를 주기도 하는 윌과 간병에 서툴면서 수다스러운 루이자의 관계는 삐걱거리면서 출발한다. 점차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관객은 윌이 결심을 바꾸고 루이자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해피앤딩을 기대하게 된다.
존엄사, 이성적으로 선택하면 괜찮을까
그러나 윌은 루이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더욱더 신체장애에 대한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미래 역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마음을 바꿔달라며 루이자가 눈물로 호소하지만 윌은 원래 계획했던 존엄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반전이 있다. 그 때문에 삶을 멈추겠다는 의지 앞에서는 사랑도 힘을 못 쓰는지, 생명 중지를 스스로 하는 자살과 다르지만 죽음의 자기결정권을 갖는다는 유사성을 갖는 존엄사를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지, 어떤 삶은 지속되어야 하고 어떤 삶은 중단되어 마땅하다는 건지 등 삶을 중단시키는 방법과 중단하려는 이유의 바람직함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영화가 발신하는 가장 큰 메시지는 “삶을 중단할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은 온전히 이성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그런 결정에 대해서는 이성적으로 판단하자”이다. 마음을 바꿔 같이 행복하게 살자는 루이자에게 윌은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을 수 있겠지만, 이것은 나의 인생이 아니다. 예전의 삶과 너무나 달라졌고,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내 인생은 과거의 것이다. 고통과 피곤함도 지겹고, 아침마다 죽었길 바라며 깨는 것도 싫다. 내 몸은 앞으로 더 나아지지 않는다. 의사도 알고, 나 역시 안다”고 대꾸한다. 윌이 존엄사를 선택한 것은 완벽한 이성을 통해서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영화는 혹시라도 관객이 윌의 고통에 감정적으로 동요되어 그의 선택에 대해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할까 저어하는 듯이, 과거 윌의 찬란한 시절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작은 비중으로 처리한다. 사고 발생 전 연인과 밀어를 나누고 출근하면서 능수능란하게 일처리 하는 행복했던 윌의 모습은 2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담았다. 또 루이자가 윌의 노트북에서 우연히 보게 된 생일 축하 영상 클립을 통해서 격한 운동을 즐기던 신체 건강한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서사의 소재가 존엄사이기에 이성의 영역 안으로 제한하는 것이겠구나 싶기도 하지만, 이 영화 곳곳에서 의미화하는 방식을 보다 보면 오히려 이성 우월이라는 지배질서를 충실히 재생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신마비 환자 윌과 간병인 루이자의 인생을 바꾼 사랑이야기를 다룬 영화 <미 비포 유> 출처=네이버 영화
여전한 남녀차별과 계급 초월 신화
가장 눈에 띄는 이성에 대한 지배이데올로기는 여전히 남녀 차별이다. 윌의 존엄사 선택을 자기결정의 대상이라고 인정하자는 측에는 윌의 아버지, 루이자의 아버지 등 남성이 있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측에는 마지막까지도 윌이 마음을 바꿔주기 바라는 윌의 어머니, 루이자, 윌의 존엄사 여정에 동반하는 것은 일종의 살인이라고 흥분하는 루이자의 어머니 등 여성이 있다. 이처럼 영화에서는 루이자를 대표로 여성을 감정의 집단에, 윌을 대표로 남성을 이성의 집단으로 분류하는 이항대립항이 작동한다. 그리하여 판단의 주도권은 이성적인 남성이 쥐고 감정적인 여성을 이끈다는 의미구조가 생산된다.
사랑은 계급을 초월한다는 신화의 생산도 여전하다. 간병인으로 선택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생은 “루이자 클라크가 트레이너네 취직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라고 말한다. 영국 마을의 성을 소유하고 있을 만큼 부자인 트레이너 집안과 가난한 노동자 집안은 서로 만나거나 교류하지 않는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윌과 루이자가 만나고 사랑에 빠지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 신체를 상실하고 남성성을 잃은 부르주아이기에 노동자계급의 딸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물론 루이자가 욕망하던 윌은 죽음을 맞기 때문에 계급 격차가 재편됨으로써 혼돈이 발생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지배적인 질서 내에서 생산되는 대중서사에서는 윌은 마음을 바꾸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정답이다.)
윌이 남은 시간을 특별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함께 모차르트 콘서트에 간 루이자 출처=네이버 영화
‘생산’해야 의미 있는 삶일까
윌이 현재 자신의 삶을 무의미하다고 단정 짓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생산하지 못하는 삶, 노동하지 못하는 몸, 그런 삶과 몸은 가치도 의미도 없다. 이런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윌을 통해 소위 이성적 선택으로 둔갑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모님, 친구, 연인 등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심리적으로 교감하는 삶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런 윌이 남아있는 삶에 대한 의미를 찾았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루이자를 계몽시키는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자막 있는 외국영화는 귀찮아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는 루이자의 말에 충격받은 윌이 프랑스 예술영화를 같이 보자고 지시하면서다. 의외로 루이자는 영화에 빠져들었고 심지어 영화 관람 후 자기 생각도 거침없이 말했다.
윌은 그녀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이때 가능성이란 루이자가 성장할 가능성이자 윌이 루이자를 계몽시킬 가능성을 의미한다. 일하는 시간 외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펍에 가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남자친구를 만나는 그녀의 삶을 윌은 따분하다고 규정한다. 삶의 경험이 미천하고 교육기간도 짧지만 고급문화에 열려있는 루이자는 계몽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윌의 판단이다.
고졸에 머문 것에 대해 루이자 본인은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윌은 “더 넓은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인생은 한 번뿐으로 최대한 열심히 사는 게 삶에 대한 의무다”라며 그녀가 그간 열심히 살지 않았다고 규정한다. 그는 루이자에게 클래식 음악 협주회를 경험하게 해주고, 해변에서 휴양을 즐기게 하고, 스킨스쿠버에 도전해보게 하면서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도와준다. 그리고 유언을 통해서 루이자가 패션을 공부하며 지식수준을 높일 수 있게 대학 진학에 필요한 경비를 제공한다. 이러한 계몽과 도움은 무언가를 생산하는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글 염찬희 회원(영화평론가)‧김선우(문화비평가)
▼날자꾸나 민언련 2021년 여름+가을호(통권 219호) PDF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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